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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 선언 (행 26: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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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선언 (행 26:24-29)


I. 행복자

어느 고3 수험생이 수능 시험일을 얼마남겨두지 않고 시간이 너무 부족함을 느끼고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시험 준비를 마치는데 한달쯤 시간이 모자랍니다. 아니 보름 정도만 이라도 시간을 더 주세요.” 

이 학생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도 감동을 하셨는지 응답이 왔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노라. 좀 더 여유있게 시간을 주마. 네게 1년을 더 주노라.” 그래서 이 학생 재수 했습니다. 

행복이란 환경의 문제도 시간의 문제도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자는 언제 어디서든지 아쉬움과 후회함이 없이 행복을 선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신33:29)

“성공한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성공하더라” 
성공철학자 죠지 와싱톤 카버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한 사람이 사역에 성공합니다.
누가 전도자입니까? 예수 믿은 행복을 아는 자가 행복한 전도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형통한 길을 걸을 때 뿐만 아니라 고난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행복하라」 말씀하십니다. 인생의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 뿐만 아니라 사명의 짐을 짊어지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높은 자리에서도 행복하고 낮은 자리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가져도 행복하고 잃고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건강할 때도 행복하고 병들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사역자를, 전도자들은 그 어떤 자리에서도 행복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평생 행복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행복의 기름부으심을 구해야 합니다. 때로 핍박을 당하고 손해를 보고 어려움이 있어도 행복만은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은 「목장 프로포즈」 선포주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한 전도자임을 선포하는 주일입니다. 

나의 고난, 핍박, 상실을 통하여 예수님이 전파될 수 있다면 그건 확실히 행복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죽음을 통하여 예수를 전할 수 있다면 그건 최고의 행복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순교라고 합니다. 순교는 그리스도인 최고의 영광, 최고의 행복입니다.


II. 자기 행복 선언

오늘 본문은 전도자 사도 바울의 자기 행복선언입니다. 바울은 참 행복했던 전도자였습니다. 바울의 이 행복선언이 고루거각에서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한 말이 아니라고 하는데에 오늘 그 귀중함이 있습니다. 바울은 쇠사슬에 매인 죄인의 몸으로 행복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평소 행복을 느끼고 살던 사람도 손에 쇠고랑을 차고서까지 행복에 겨워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내 꼴이 이래서야, 설사 내가 행복을 선언한들 누가 내 말을 믿어 주겠는가?” 내적인 갈등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재판정에 서 있습니다. 재판관은 일개 하급판사가 아니라 한 나라의 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흔히 기도를 한다면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 나도 저 왕처럼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은 “저 왕도 나처럼 되게 해 주소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선언입니까? 

바울은 포박된 몸으로 재판하는 왕 앞에 서서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나처럼 행복할 수 있기를 원하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입니까?

아무리 높은 행복감이나 고상한 마음의 평강도 밖으로부터의 아픈 자극이 오면 무너지기 쉽상입니다. 

① 가령 모욕을 당했을 때 그렇습니다. 강아지 한 마리는 주림을 참기 어려울지 모르나 인격을 가진 사람은 모욕을 참기가 어려운 법이지요. “바울아 너의 많은 학문이 너로 미치게 했구나” 바울은 자신이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는 모욕 앞에서 태연자약하며 나는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② 동정을 받았을 때에도 행복감과 마음의 평정을 잃을 수 있습니다. 묵묵히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던 사람도 애틋한 동정의 말을 듣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바울아 네가 교육계로 나갔더라면 총장은 되었을 테고, 사업을 했더라면 사장 회장은 했을 테고, 정치를 했더라면 로마 총독은 했을 터인데 어쩌다 이 신세가 되어서 쇠고랑에 묶인 몸이 되었느냐?” 동정 앞에 마음이 약해질 수 있지요.

그러나 바울은 불운아로 혹은 박복한 사람으로 동정하는 사람 앞에 

“당신들도 나처럼 되라”고 외칩니다. 그 사람들처럼 못된 자신의 신세를 한스러워 하거나 불행해 하기는커녕 자신이 하나님 앞에 복받은 자 임을 깨닫고 “당신들도 모두 나와 같은 행복자가 되시오”라고 말합니다.

③ 사람들은 흔히 권력 앞에 위축을 당하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권력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습니다. “아그립바 대왕도 베스도 총독도 만장하신 고관 대작 여러분도 모두 나와 같이 되시오” 당당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재판정에 서 있는 지금 바울을 상상해 보십시다. 두 해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있었으니 얼굴은 창백해 있을 테고 그동안 부실한 음식으로 연명했으니 얼굴엔 영양실조가 완연했을 터이고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었으니 건강상태가 좋을리 만무했습니다. 의복은 남루했고 형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속인들의 눈으로 보면 쉽게 업신여길 만도 했고 쉽게 동정할 만도 했습니다. 불행하게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속에서 바울은 “나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복 받은 행복자다. 나는 복음을 받았고 나는 복음을 전하며 산다. 이것은 금생과 내생에 영광스러운 일이다.” 자신의 행복과 영광을 자신만만하게 지금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도무지 행복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나는 행복한 전도자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선언합니다.


III. 나는 예수 믿고 구원 받은 행복자

무엇이 그토록 행복했을까요? 구원받은 한 가지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선 이 말은 나 바울처럼 예수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전 바울은 흑암의 권세 아래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요 천직인 줄로 알고 살았습니다. 회당마다 찾아다니며 박해의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외국의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내 죽이기 위해 다메섹 언덕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 그는 하나님을 모독하다가 죽은 천벌받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그가 바로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셨구나. 

이 땅에 와 내 죄를 걸머지고 돌아가셨구나. 그분은 살아나셨구나. 
지금도 살아계시는 구나. 선악간에 우리를 심판하러 오실 심판주가 되시는 구나.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여기서 사도바울의 인생사에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아 하나님을 섬긴다는게 하나님을 핍박하는 일이 되었구나. 저들이 내 형제 자매인줄 알지 못하고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가두었고 채찍질하여 죽였구나. 나는 그분이 내 아버지 내 주님인줄 알지 못하고 채찍 휘둘러 때린 불효자식이었구나. 나는 흑암의 권세에 사로잡혀 내 하는 짓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죄악 덩어리였구나.”

땅을 치며 울었습니다. 음식 한톨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자복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났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전혀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핍박자가 변하여 전도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원수가 변하여 예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자가 변하여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옥에 갇히고 채찍에 맞으며 피흘리는 일을 기쁨으로 알았습니다. 고난은 그의 행복이었고 영광이 되었습니다. 

“내가 구원받았고 나는 전도자가가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행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최고 행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할렐루야.

그러니 그는 담대히 외칠 수가 있었습니다. 
“왕이여 당신도 나처럼 예수믿고 변화받아 새사람이 되시오. 총독이여 당신도 예수믿고 새사람이 되시오. 그때 당신도 진정 행복자가 될 수 있소.” 

당당히 외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설교를 잘하기로 소문난 크리소스톰이란 교부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로마 황제로가 불러 “네가 예수를 믿어도 좋지만 오직 예수만이 구원이란 얘기는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때 크리소스톰은 “그 얘기를 하지 않으면 내가 할 말이 없습니다”고 말합니다. “네가 기어이 내 명령을 거절한다면 너는 감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자 “나는 감옥에 백번을 들어가더라도 이 복음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크리소스톰은 독방에 갇히게 됩니다. 황제 신하들이 황제를 찾아갑니다. “큰일났습니다. 크리소스톰이 얼마나 기다렸던 일입니까? 혼자서 독방에 넣어놨으니 마음껏 기도하게 될 것이고 마음껏 성경을 읽고 연구하게 될 것인데 그가 얼마나 좋아하는 일을 우리가 했습니까?” “그러면 흉악범들 속에 들여보내라.” “그러면 더 큰일이 납니다. 흉악범들이 모조리 예수를 믿고 감옥이 교회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아예 목을 짤라 죽여버려라.” “그러면 더 큰일이 나지요.” “크리소스톰 지도자 한 사람이 순교를 당하면 온시민들이 모두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순교는 저들의 영광입니다. 왜 저들에게 영광을 주는 것입니까?” “그러면 어쩌자는 것이냐?” 

세상의 그 어떤 힘도 핍박도 저의 능력과 행복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감옥도 영광이요 죽음도 행복입니다. 이것이 전도자의 행복선언입니다. 
오늘도 우리로부터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행복이 있습니다. 
영생 얻은 행복이요 천국가는 행복입니다. 


IV. 나는 진정한 힘을 아는 행복자

사도 바울이 그토록 행복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둘째 “다 나와같이 되기를” 이 말은 힘의 근원을 알라는 말입니다. 흔히 돈이 힘이라고도 하고 아는 것이 힘이라고도 합니다. 또 권력이 힘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나처럼 되라는 말은 자기보다 힘이 없는 사람이나 낮은 사람에게나 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한나라의 대왕과 그 앞에 죄수의 몸으로 선 사도바울, 이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보고 자기를 닮으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에게는 이 통념을 깨뜨리는 무서운 힘이 있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당신도 나처럼 되십시오.” 왕을 침묵케 했던 저 의젓한 바울의 기개를 보십시오. 세상의 그 어떤 힘 앞에서도 그 우아함과 고상함과 당당함을 잃지 않는 저 대장부를 보십시오. 그는 어디에서나 누구 앞에서나 어떤 상황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진하게 뿜어댔습니다. 향나무는 찍는 도끼에게까지 향냄새를 묻히듯이 사도바울은 때리는 채찍에도, 핍박하는 재판관의 가슴에도 그리스도의 진한 향기를 토설했던 것이지요.

왕관이 없으면 일개 졸장부에 지나지 않았던 아그립바 왕 앞에서 왕관 없이도 천지에 군림하는 바울의 그 위대한 힘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 떨어진 옷을 걸치고서도 비단옷에 온갖 보석걸친 사람들을 부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향하여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행17:6) 사도바울의 위대한 감화력에 대한 고백입니다. 변사 더둘로는 바울을 송사하여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라고 악평했습니다.(행24:5)

당시 세상을 휩쓸었던 페스트 전염병보다 더 무서운 위력을 가졌다고 저 이방인들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반대자들은 천하를 어지럽히고 소요케하는 염병처럼 그를 두려워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가 전한 복음 앞에 생명의 환희와 감격을 누리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바울이라는 존재는 멸망자들에겐 염병같이 무서운 것이었고 구원얻은 자녀들에겐 생명에 이르는 영생에 이르는 향취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힘은 곧 살아계신 예수의 힘이었습니다. 바울의 권세는 곧 하늘의 권세였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그의 권능은 곧 성령의 권능이었습니다. 

행복한 전도자 바울은 말합니다. 
“왕이여 썩을 땅의 권세가 아닌 다른 권세가 있는 것을 아십시오. 멸망할 세상의 힘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힘을 알기를 원하오.” 

진정한 힘, 진정한 권세, 진정한 부를 알고 가졌기에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패하지 않습니다.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참된 힘, 영원히 승리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자입니다. 


V. 세상이 내 행복 빼앗아 갈 수 없다.

사도 바울이 행복을 선언할 수 있었던 이유는 또 있습니다. 바울은 그 어떤 환경에도 메이지 않는 자유인이었습니다. 지금 바울 앞에 버티고 앉아 있는 왕은 세상 영화와 권세와 명예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저를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부러워하기는 커녕 이 왕도 자기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비록 왕이라 하나 저에게서 금관을 벗겨 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남을 것이 없는 허깨비에 불과했습니다. 겉은 화려하나 속은 비어 있었고 남루하기 짝이 없는 속빈 강정이었습니다. 죄악과 탐욕의 노예가 되어 살았습니다. 

몸은 자유했으나 저의 영혼은 사슬에 묶여있는 가련한 노예였습니다.

이것이 예수 없는 인생들의 허상이요 허무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아그립바 왕을 향하여 “당신도 이처럼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즉 왕관을 쓴 노예가 되기 보다는 무관의 자유인이 되고 죄악의 포로에서 벗어나 세상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영혼의 자유자가 되란 말입니다. 바울의 몸은 투옥되어 있었고 손발은 묶여있었으나 그의 심령은 한없이 하늘을 날며 자유를 만끽하고 살았던 것이지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보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넘치느니라.  할렐루야!

질병도 가난도, 핍박도 죽음도, 감옥도 채찍도 쇠사슬도 바울을 얽어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거듭난 생명의 자유를 억압할 수 없었습니다. 

“환경이 나의 행복을 앗아갈 수 없다. 예수안에서 나는 무한한 행복자로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선언이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복선언입니다. 

세상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 세상 어떤 가치에도 묶이지 않는 자유인! 세상 유행도 온갖 환경도 그를 가둘 수 없는 자유인! 그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챤의 행복입니다. 어떤 환경에도 메이지 않는 행복 말입니다. 


VI. 미치도록 행복한 전도자

바울은 참으로 행복한 전도자였습니다. 
바울! 그는 예수에 미치고 복음에 미쳤던 사람입니다. 죽을 만큼 행복했던 사람, 미칠만큼 행복했던 사람. 행복한 전도자! 그가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바울의 간증을 듣고 있던 베스도 총독이 바울을 향하여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라고 합니다. 구원받은 간증 때문에 바울은 미쳤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바울의 중생체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저들의 눈에는 바울이 미친 사람으로 보일만도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던 저들로서는 미쳤다는 얘기를 할만 했습니다. 죽은자의 부활, 하나님의 심판, 영원한 천국같은 얘기가 세속적인 인간에게는 황당무계한 얘기로 들려질 수 있었겠지요.

믿음없이 세상을 보면 세상은 아주 간단합니다. 태어나 먹고 자고 싸고 그러다가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육체말고 영혼이 있습니다.  고기나 밥 외에 먹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의 짤막한 인생이 전부가 아니고 영원히 이어지게 될 영생의 세계가 있습니다.

현미경으로 보면 맑은 물 속에도 득실대는 대장균이 있고, 망원경으로 보면 멀어서 보이지 않던 별나라가 보이게 되고, 내시경 or X-광선으로 들여다 보면 피 속에 살 속에 뼈 속에 숨어있던 질병들도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의 눈으로 바라보면 영혼이 보이고 믿음이 보이고 내세가 보이고 천국이 보입니다.

땅의 눈 땅의 가치관으로만 살던 베스도 총독이나 아그립바 대왕의 눈에는 바울이 미친사람으로 보였던 게지요. 예수님도 미쳤다는 얘기를 한때 들었습니다. 요한복음 10:20에 보면 “저가 귀신들려 미쳤거늘”이란 말이 있고, 마가복음3:20에 보면 예수님이 미친줄 알고 가족들이 예수를 붙잡으러 왔다고 기록합니다.

주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미친자 취급을 받게 될 것이라고요. 이 땅에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눈엔 미친사람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미친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을 수 있지요.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너의 많은 학문이 너로 하여금 미치게 하였구나” 한마디로 미친소리 하지 말라는 거지요. 사실 바울은 한때 학문에 유대 종교에 미친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학문이 아니라 유대 종교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쳐 있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더냐 천지를 창조한 말씀이 아니더냐. 지금도 지옥에서 영원히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인생들을 건져내는 능력의 말씀이 아니더냐 말씀에 미쳐서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핍박하던 자신을 거두어 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살았습니다. 주의 사랑에 노예가 되어, 성령의 노예가 되어, 사명의 노예가 되어, 말씀의 노예가 되어 살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구세주이시다. 그분은 부활하셨다 지금도 살아계시다. 나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며 여러분들을 심판하러 이 땅에 오실 것이다” 목이 터져라 외쳐댔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무엇엔가 미쳐야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어디엔가 빠져들게끔 되어 있습니다. 흔히들 20대는 사랑에 미치고, 30대는 야망에 미치고 40대는 일에 미치고, 50대는 소유에 미치고, 60대는 명예와 고독에 미치고, 70대는 은퇴와 죽음에 미친다고 합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미쳐 살아가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필요로 하는 사람, 오늘 교회와 이 시대가 진정 필요로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똑바로 미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미칠 줄 아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저들의 뜨거운 정열, 불타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눈물과 감격과 열정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울 줄도 모르고 웃을 줄도 모르고 감격도 열정도 없는 고드름 같은 믿음 가지고는 어떠한 역사도 변화도 기적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예수 사랑, 자신의 사명에 미칠 수 있는 사람이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가 진정 행복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분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독생자를 날 위해 보내 주실 수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 시대는 무감각의 질병으로 역사가 시들어 가고 교회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신앙의 열정도 감격도 잃어버리고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 때문에 오늘 이 시대가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한소망 성도들아 네가 미쳤구나. 
 한국교회 성도들아 너희들이 미쳤구나.” 

이 땅에 미쳤다는 얘기를 듣는 사람이 쏟아져 나올 때에 
시대가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민족이 달라지게 됩니다.

예수 천당을 외치던 최권능 목사가, 내 조국 스코틀랜드를 구원할 수 없다면 차라리 죽음을 주십시오 외쳤던 죤 낙스가, 이 교회에서 되살아 나야 합니다.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외쳐댔던 에스더의 혼이 오늘 이 민족 가운데 살아나야 합니다. 

여러분, 사명에 미치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비전에 미쳐야 행복합니다. 예수 믿고 미쳤다는 얘기 한번은 들어야 제대로 믿는 사람입니다.

저는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님들을 보면 참 행복해집니다. 
전도하며 행복해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저도 덩달아 행복해 집니다. 
헌신하고 수고하고, 힘들고 어려운 자리에서 봉사하며 행복해하는 사람을 보고 있는 행복! 그건 참 근사한 행복입니다.


오래된 편지 하나를 읽고 말씀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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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어머니!

이 곳 조선땅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모두들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 같습니다. 선한 마음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보아 아마 몇 십년이 지나면 이곳은 예수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복음을 듣기 위해 20킬로미터를 맨 발로 걸어 오는 어린아이들을 보았을 때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저께는 예수님을 영접한지 일주일도 안된 서너명이 끌려가 순교했고, 토마스 선교사와 제임스 선교사도 순교했습니다. 선교본부에서는 철수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그들이 전도한 조선인들과 아직도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순교를 할 작정인가 봅니다. 오늘 밤은 유난히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외국인을 죽이고 기독교를 증오한다는 소문 때문에 부두에서 저를 끝까지 말리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제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 뒤 뜰에 심었던 한 알의 씨앗이 이제 내년이면 
온 동네가 꽃으로 가득 하겠죠?

그리고 또 다른 씨앗을 만들어 조선 땅에는 많은 꽃들이 피고 
그들도 여러나라에서 씨앗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저의 심장을 묻겠습니다. 
바로 이것은 제가 조선을 향해 가지는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선을 향해 가지신 열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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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 나이로 순교한 Ruby Kendrick 선교사님의 비석에 적힌 글입니다. 

이 소식이 미국에 있는 그녀의 교회에 전해지자 눈물 바다를 이뤘고, 
이후 그녀의 희생을 전해들은 많은 젊은이들이 낯선 땅 한국을 위해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서울에 있는 외국인 

묘지에 가보면 거의 100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심장을 묻었습니다. 그 중에는 대부분이 20대 초반에서 30대 중반이었고, 부활을 소망하는 글 귀들을 비석에 새겨놓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죽음의 자리에서도 저들을 그토록 행복하게 했을까요?
오직 예수, 오직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한분, 복음 하나로 영원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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