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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막 9: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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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막 9:14-29)


우 리 교회에서는 오늘 새벽부터 다니엘 세이레 새벽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번 세이레 새벽기도회를 연례행사로 여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기대를 가지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문제들을 해결할 기회로 삼으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장애물을 무너뜨릴 기회로 여기십시오.
사단의 회를 훼파할 기회로 여기십시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간섭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갖가지 보화가 가득 찬 동굴을 탐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기막힌 영적 여행에 여러분을 초청합니다.
한분도 빠짐없이 동참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도, 초등부 학생들도, 청년부 회원들도 꼭 참여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본문에는 ‘벙어리 귀신 들린 아이’가 나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성경 내용이지요? 
이 아이는 무엇 때문에 귀신이 들렸는지는 모르지만, 어린 시절부터 망가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도움이 필요한 이 아이를 앞에 놓고 아무도 도울 수 없다.’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일이 많을까요? 할 수 없는 일이 많을까요?
‘인간이 우주정거장을 만들어 우주여행 시대를 열어가고 있는데 못 하는 게 뭐가 있어?’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지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따지고 보면 몇 가지 안 됩니다.
‘오늘 점심식사로 설렁탕을 먹을까?’ ‘햄버거를 먹을까?’라든가, ‘오늘 교회에는 무슨 옷을 입고 갈까?’ 정도는 여러분이 결정을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인생의 99.9%이상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 교육하는 것, 여러분 마음대로 할 수 있나요?’ 
‘건강, 여러분 마음대로 할 수 있나요?’ 
‘사업, 여러분 마음대로 됩니까?’ 
‘인간관계, 여러분 마음대로 됩니까?’ 
사람이 조금만 겸손하면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어요.

본문을 보십시다!

도움이 필요한 이 아이를 앞에 놓고 아무도 도울 수 없습니다.

① 먼저 이 아이 곁에는 서기관들이 서 있습니다.
14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서기관들은 지식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말은 청산유수처럼 논리 정연하게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보십시오! 
‘변론은 있었지만, 구원은, 고침은, 변화는 없습니다. 
옳고 그름을 알고, 바르고 비뚤어짐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름을 고치고, 비뚤어짐을 바르게 할 능력은 없습니다.’

② 또 이 귀신들린 아이의 주위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지만 그 귀신들린 아이에게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18절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제자들은 얼마나 낭패감에 빠졌을까요? 
여러분, 그 낭패감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저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교인들이 “목사님은 하나님의 종이니깐 뭔가 하실 수 있을 거야.”라는 기대감으로 문제를 가지고 옵니다. 
그런데 아무런 도움을 드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는 정말 낭패감에 빠지게 됩니다.
제자들은 당혹해 하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무런 고침도, 구원도, 변화도 시킬 수 없었습니다.

③ 그리고 이 귀신들린 아이의 곁에는 그의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이 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니지요! 
아버지는 이렇게 고통에 찬 하소연을 합니다. 
18절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
경련을 일으키며 파랗게 죽어가는 자식의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부모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여기보세요! 
성경은 그 아버지의 안타까움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22절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이 아버지는 ‘저 아이’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했습니다. 
이 아버지는 자식과 자신을 동일 시 시킵니다.
안타까움의 극치이지요! 

자식의 일을 내일처럼 여기고, 망가진 자식의 삶을 내 삶처럼 여기고, 자식의 아픔을 하나도 남김없이 내 아픔으로 끌어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도, 아버지의 부정()으로도 자식을 변화시키거나 고칠 수는 없습니다.
이것들이 우리 인간들의 형편이고 한계입니다. 
그런데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이 그 아이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그 아이를 고치셨습니다. 변화시켰습니다.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세이레동안 기도의 탐험을 시작하는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진실로 고백하건대 “예수님을 가지면 다 가지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고후4:7-9절에서 이렇게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예수그리스도) 질그릇(우리 자신)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심히 큰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얘기입니까? 없다는 얘기입니까?
있다는 얘기이지요.
그래서 고후4:8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로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주님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도와주옵소서.”라는 그 아버지의 간청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23절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어떻게 하나님께 ‘할 수 있거든’이란 말을 붙일 수 있느냐? 
하나님께 그런 말을 사용해도 되느냐?
‘할 수 있다 또는 할 수 없다.’라는 말은 사람에게 붙일 수 있는 말이지 하나님께 붙일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할 수 있다.”만 됩니다!

류태영 박사의 ‘기도인생’이란 책의 마지막 장의 제목이 ‘빌사일삼’입니다.
‘빌사일삼’이 무슨 말인가요?
무슨 뜻인지 추측이 가나요?
내용인즉 빌4:13절을 말합니다.“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이 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랍니다.
이 말씀을 붙잡고 그는 보통사람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믿음의 기도로!’
29절 “......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기도 없이는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어떤 방법으로도, 나 자신의 변화, 가정의 변화, 직장의 변화, 교회의 변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묻습니다. “어째서 나의 생활에는 발전이 거의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기도가 없어서이다”

낙심한 목사가 묻습니다. “제 사역에 열매가 적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기도가 없어서이다”
수많은 신자들이 묻습니다. “어째서 저에게는 이렇게 힘이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기도가 없어서이다”

초대교인들은 엄청난 능력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의 박해는 가혹하고 끈질겼습니다. 
그래도 그들의 사역은 거침없었습니다.
행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행5:14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사도들은 이렇게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분출하는 그들의 능력의 근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행 6: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기도하는 일에 전 시간을 바친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능력은 기도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바칩니까?
우리는 너무 바빠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피곤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위기가 안 잡혀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애는 많이 쓰지만 성취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복음성가-갈보리 십자가

기도의 능력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1) 기도는 우리 자신을 알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참 놀라운 것은 기도를 하면 자신의 죄 됨, 자신의 연역함, 자신의 추악함, 자신의 이기심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자신의 죄 됨을 깊이 자각하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그런데 이사야가 자신의 죄 됨을 깊이 자각한 곳이 어디입니까? 
성전이지요?
이사야가 왜 성전에 있었을까요? 
기도하기 위해서지요.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죄 됨을 통절히 느끼고, ‘하나님, 살려주세요!’라고 매어 달릴 때에 그의 위대한 삶은 시작되었습니다. 

2) 기도는 유혹을 이기고 승리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코 뀐 송아지처럼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끌려갑니다.
그 때 그 유혹을 이기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런 유혹에 쉽게 빠져드는 사람을 돕는 길은 무엇입니까? 
말려보세요. 매일 싸움하다가 말지....... 
기도 밖에는 없습니다.

눅22:40절 이하에 보면,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후 한 밤을 새워 땀이 핏빛으로 변할 정도로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기도해야할 때 잠을 잤습니다. 
얼마 후 시험이 닥쳐왔을 때 완전히 패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그날 밤을 기도로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혹한 시험이 닥쳤을 때에도 영광스러운 승리를 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걸음이 실족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3) 기도는 우리가 하는 일에 하나님의 능력을 충만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하고 있는 개인적인 일, 자녀 양육, 아무튼 그 어떤 일에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시길 원하십니까? 
그러면 기도하십시오. 
저는 참으로 교회부흥을 소원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교회부흥을 가져다줍니다.

스펜서 박사는 ‘목사비망록(pastor's sketches)'에서 "불구의 몸으로 집안에만 갇혀 있는 한 경건한 노인의 기도로 그의 교회에 큰 부흥이 온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커다란 부흥이 훌륭한 설교와 전도기관이 없이 일어난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기도 없이 크고 참된 부흥이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바울은 뛰어난 설교가요 열정적인 복음전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의 편지를 보면 거의 모든 편지에 ‘하나님의 말씀 증거’를 위한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저의 설교를 위해서도 여러분이 기도해 주셔야만 합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시간을 내어 기도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시는 능력 충만을 얻는 것에 대한 모든 기대를 포기한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사40:31에는 “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것은 식사하기 전 몇 분간 눈을 감고 기도하는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것은 교회에 나와서 예배 전 몇 분간 기도드리는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기도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기도에는 애씀이 필요합니다.
어느 일에서든지 능력 충만을 체험하려면 반드시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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