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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포기하지 않는 믿음 (눅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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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지 않는 믿음 (눅 18:1-8)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어느 고을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그 고을에 과부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그 재판관에게 줄곧 찾아가서, ‘내 적대자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그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얼마 뒤에 이렇게 혼자 말하였다. ‘내가 정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지만,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하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시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 본문에 대한 협소한 이해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24 절기 가운데 한로寒露입니다. 공기 중에 있는 습기가 차가운 공기를 만나 찬 이슬로 맺히는 때라 하여 그런 이름이 붙은 것 같습니다. 이맘때면 농촌 일손이 바빠집니다. 추수를 서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겨울잠 자는 동물들은 영양분을 비축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단풍도 사실은 나무의 겨울나기 과정 중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도 이 계절에는 삶의 구조조정을 시도해야 합니다. 불필요한 활동이나 소비를 줄이고 내면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더불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에 들려주신 비유입니다. 여덟 절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 본문은 2절부터 5절까지입니다. 1절은 이야기를 이끌기 위한 도입문이고, 6-8절은 비유를 삶에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누가는 주님께서 이 비유를 들려주신 까닭을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1)

‘기도하다’라는 단어와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단어가 접속부사를 통해 나란히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비유를 끈질긴 ‘기도’에 대한 당부라고 쉽게 단정해 버리곤 합니다. 하나님이 당장은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하면 결국에는 들어주신다는 것이지요. 기독교인들은 일쑤 어떤 일이 성취되지 않을 때 ‘기도가 부족해서’라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인데, 문제가 풀리지 않는 것은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가요? 질보다는 양인가요? 사람들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을 변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또 그 뜻에 ‘아멘’ 하고, 그 뜻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기도를 통해 변화되는 것은 상황이 아니라 자기 자신일 때가 많습니다. 물론 상황이 변할 때도 있습니다. 

• 권리를 찾아주십시오

이제 예수님이 들려주신 비유의 본문에 집중해보겠습니다. 이 비유에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편에는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재판관이 있고 다른 편에는 사회적 약자의 대명사인 과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사회적 지위가 판이하게 다른 두 사람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둘은 사회적 지위 뿐만 아니라 성격도 아주 다릅니다. 재판관은 지나칠 정도로 자신만만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오만합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과부 따위는 그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비유에 등장하는 과부는 자기의 처지를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그릇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끈질김이 있습니다. 대단한 여성입니다. 

그리스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의 성격이 그의 운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똑같은 어려움에 직면해도 어떤 사람은 대범하게 돌파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문제에 짓눌려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성격에는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내향적인 사람도 있고 외향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내향적인 사람에게 너는 왜 내향적이냐고 책망해서도 안 되고, 외향적인 사람에게 너무 외향적이라고 탓해서도 안 됩니다. 물론 자신의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지만 근본 바탕을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또 다른 요인은 그가 서있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서있는 자리가 다르면 똑같은 현실도 달리 보입니다. 길을 걸을 때는 자동차들의 난폭함이 눈에 거슬리지만, 자동차를 타고 보면 어슬렁거리는 보행자들이 밉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리를 바꿔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자기 자리를 고수하면서 남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재판관과 과부는 서 있는 자리가 다르기에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다릅니다. 대화가 그 자리바꿈의 단초가 될 수도 있습니다. 과부가 재판관에게 요구하는 내용은 간단합니다. 

“내 적대자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 주십시오.”(3)

여기에 사용된 적대자antidikos라는 단어는 소송 상대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과부는 비유에는 등장하지 않는 누군가로부터 권리를 침해 받았거나 재산상의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재판관에게 사안을 잘 살펴 시시비비를 가려내 짓밟힌 정의를 바로 세우고, 빼앗긴 권리를 회복해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권리’라고 번역된 단어의 헬라어 어간은 ‘디크dik’입니다. 이 짧은 비유 속에서 그 단어가 여러 번 등장합니다. 

디크라는 말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디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디케는 제우스와 테미스 여신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 자매들은 ‘질서’를 관장하는 에우노미아와 ‘평화’의 수호자인 에이레네입니다. 그들이 자매라는 사실은 무슨 뜻일까요? 그리스인들은 정의와 질서와 평화가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디케 여신은 무고한 피를 흘리게 한 자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신으로도 유명합니다. 지금 여인이 요구하는 것은 정의 곧 자신의 권리 회복입니다. 

• 두드리면 열린다

재판관은 처음에는 들은 척도 안 했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집요합니다. 요구하고 또 요구합니다. 몇 번 무시당하거나 거절당하면 포기하고 체념할 법도 하건만 여인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여인은 삶의 벼랑 끝에 서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집요하고 완강한 모습에 질렸는지 재판관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하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5)

재판관을 움직인 것은 정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안위입니다. 여기서 ‘귀찮게 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휘포피아조hypopiazo)는 두 가지 뜻으로 쓰입니다. 첫째는 ‘눈 밑을 때리다, 얼굴을 치다’는 뜻으로 물리적인 폭행을 가리킵니다. 둘째는 ‘괴롭히다, 귀찮게 하다’는 뜻으로 심적인 괴로움을 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인이 재판관을 때렸을 리는 만무하니 이 경우에는 성가시게 한다는 뜻으로 새기는 게 옳겠습니다. 그 여인의 존재 자체가 재판관에게 부담이 되었을 겁니다. 자신의 평판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인의 송사 건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하면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사안이니 머뭇거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재판관은 못된 사람이기는 해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 사람 같습니다. 요즘 <도가니>라는 영화 한편이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장애인 학교에서 벌어진 인권유린과 성폭행 사건의 실태를 고발하는 영화라 합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던 그 사건이 뜨거운 이슈가 된 것은 그 사건을 차마 망각의 강물 속에 떠내려 보낼 수 없었던 작가 공지영 덕분입니다. 

그는 그 사건을 소설로 형상화했고 소설을 읽고 분노한 이들이 그것을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소설과 영화는 그 사건을 은폐하고 왜곡하기 위해서 사회적 강자들이 어떻게 협력했는지를 낱낱이 밝히고 있다 합니다. 힘 있는 이들과 법을 수호해야 하는 이들의 불의한 공모가 피해자들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혔습니다. 저는 작가 공지영 씨와 영화감독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집요한 기억투쟁을 통해 불의한 세계의 한 모퉁이를 깨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바이지만 세상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기들의 특권을 내려놓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피와 땀을 흘렸습니까? 경제정의를 요구하는 이들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 정도나마 자유를 누리고 사는 것은 온갖 비난을 받으면서도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사람들 덕분입니다. 예수님은 두드리면 열린다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의 집요함이 재판관을 움직였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이처럼 자기 권리를 요구할 줄 아는 약자들입니다. 

• 믿음은 낙심하지 않는다 

저는 1절의 도입문에 나오는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자칫하면 오해될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이 비유의 핵심을 말해야 할 때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기도와 낙심하지 않는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기도하는 것이 곧 낙심하지 않는 비결이고, 낙심하지 않는 삶의 자세야말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기 위해서는 특별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삶의 자리야말로 기도의 자리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여건이 어떠하든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그냥 살아서는 안 되고, 더 나은 세상을 이루리라는 꿈을 꾸며 살아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얼마 전 도쿄대학교 정보학연구소 교수로 봉직하고 있는 강상중 교수의 책 <어머니>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그는 재일 조선인으로 살아온 자기의 정체성의 뿌리를 탐색하기 위해 가족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무시와 차별 속에 살던 어머니 세대의 이야기는 보는 이들의 가슴을 찡하게 만듭니다. 저자는 어머니가 집 앞을 흐르는 도랑을 뒤져 돈이 될 만한 것을 찾아내기 위해 역한 냄새를 뿜어내던 도랑에 엎드려 갈퀴질을 하던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그 억척스런 어머니가 옴쭉달싹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될 때마다 했던 말이 있습니다. “어떻게 되겠지. 그리고 어떻게든 해야지.” 강상중 교수는 주술과도 같은 그 말을 눈물로 떠올립니다. 그 대목을 읽다가 마음이 울컥했던 것은 내 부모님도 절망을 이기기 위해 그런 말을 속으로 삼키며 사셨을 거라는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쉽게 절망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는 이 여인을 칭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시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것이다.”(7-8a)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시는 분입니다. 그가 어려움을 겪을 때 모른 체 하며 오래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되찾아 주시는 권리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인간적 존엄성을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할 수 있는 권리,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아니겠습니까? 성숙한 사회란 그런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일 것입니다. 그런 사회는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얼마 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들의 참정권이 인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만 그것은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지금 아랍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재스민 혁명은 인간을 억누르는 어떠한 체제도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다음 대목입니다. 주님은 마치 탄식하듯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여기서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 것이 믿음임을 배웁니다. 우리의 가능성에 의지하여 살아간다면 우리는 낙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제 자리로 돌리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낙심할 수 없습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때는 반드시 옵니다. 이것이 우리 희망의 근거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이들보다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 후에 주님의 섭리를 기다리는 이들을 더욱 사랑하십니다. 좋은 세상은 바란다고 오지 않습니다. 그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한 걸음을 내딛는 이들을 통해 옵니다. 주님은 그런 믿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그런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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