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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 위의 은혜 (요 1: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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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위의 은혜 (요 1:14-18)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중에 하나가 "은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은혜라는 말은 참으로 익숙한 말입니다. 은혜라는 말이 좋습니다. 은혜를 받으라거나 은혜을 받았다는 말은 참으로 고마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 은혜를 힘입고 그 은혜에 이끌려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은혜를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심령이 메말라서 가시만 무성해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찌르고 상처내서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누구나 사막을 지나다보면 참으로 황량함을 느낄 것입니다. 사막을 보면서 황홀하다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막의 그 황량함은 비와 연결되어있습니다. 사막에는 비가 잘 오질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넓은 잎을 가진 나무는 없고 모든 나무의 잎은 가시로 변합니다. 풀과 나무가 더러 있지만 거의가 선인장과 가시가 있는 나무들입니다. 나무 잎이 넓으면 수분을 쉽게 빼앗기기 때문에 나뭇잎이 다 가시로 변한 것입니다. 이 가시가 자신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쉽게 찌르고 아프게 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비가 적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늘 이른비와 늦은비가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은혜의 비'가 없으면 이렇게 '심령의 사막화'가 되고 '심령의 가시화'가 되는 것입니다.

비가 자주 내리면 나무들의 잎사귀가 커지고 가시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은혜의 비가 내리게 되면 심령에도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은혜를 받게 되면 가시는 사라지고 다른 이들의 그늘이 되어주고 쉼터가 되어주고 위로자가 되어주는 넓은 나무잎과 같은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 16절에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은혜 위의 은혜"라는 말씀을 함께 생각해 보고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은혜 위의 은혜"란 어떤 은혜입니까?
  
신학적으로는 "은혜 위의 은혜"를 "이중은혜"라고 합니다.  
이미 받는 은혜 위에 특별한 은혜가 더한다는 뜻입니다. 이미 받은 은혜만 있어도 족한데 그 은혜 위에다 다시 은혜를 더하는 것이 바로 '은혜 위의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은혜의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로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을 구원의 주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을 "은혜 위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이전의 인생들도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았습니다. 구약의 백성들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았다는 말입니다. 믿는 백성이나 믿지 않는 백성들이나 모두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서 살아가고 그 분이 주시는 햇빛과 비를 값없이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먼저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선행은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대가없이 거저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 일반적인 은혜만 가지고는 인생들이 하나님의 진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특벽한 은혜로 그의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주시는 은혜는 구약의 은혜에 비하여 훨씬 능가하는 하늘만큼 높은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이 가르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란 것이 뭡니까? 일반은혜, 율법의 은혜, 인생이란 사실의 은혜, 이것으로는 불완전하고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구원과 영생을 얻고 누리고 들어가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이 믿게 된 것은 큰 은혜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왕 믿으면서 가장 옳고 바른 길에서 믿게 된다면, 은혜 위에 은혜라고 표현하게 됩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받는 일반적 은혜가 있는데, 그 은혜에 더하여 하나님이 사람되어 날 구원하기 위해 오셨으니 더 큰 은혜이며 일반 은혜 위에 특별한 은혜입니다. 

2. 은혜 위에 은혜란, 어떤 은혜입니까?
  
흘러넘치는 은혜가 '은혜 위에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 넘치는 은혜"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넘친다는 말은 남아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독생자를 주신 은혜"입니다.

롬8:32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하셨습니다.

" 태평양의 물고기가 바다물이 마를 것을 걱정하고, 공중에 나는 새가 자신들이 날아갈 공간이 없어질까 염려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마를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마르는 법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나누어주어도 흘러넘치는 은혜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초특대형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7장 37-38절에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말씀하셨다. 

내게 있는 돈, 건강, 자녀, 명예 이런 것은 모자랄지 몰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흘러넘칩니다. 

3. 은혜 위의 은혜란
  
은혜 대신에 은혜란 말입니다. 은혜 위의 은혜라고 할 때 '~위에'의 헬라어는 '안티'인데 그 의미는 '~대신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 안에서 받은 은혜는 한 가지로 끝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은혜가 만가지 은혜가 됩니다. 또 다른 은혜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통로가 됩니다. 모든 것을 대처할 수 있는 만큼 충분한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혔던 일을 말하면서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둘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1:12) 당한 일은 고통이었으나 그 일로 얻은 것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몸에 질병이 있었습니다. "육체의 가지, 곧 사단의 사자"라고 합니다. 질병이 떠나가기를 세 번이나 진지하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병을 고쳐주지 않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육체의 가시로 아픔을 당하면서 하나남의 능력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존 밀턴은 시력을 잃고 소경이 되어 쓰라린 고통 속에서 '실낙원'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이루었고, 베토벤은 청각을 잃어버린 뒤 오히려 더 훌륭한 작품을 완성시켰습니다. 모차르트는 가난과 굶주림 속에 시달리며 불멸의 명작인 '진혼곡'을 작곡했습니다. 단테는 사랑하는 여인 베아트리체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마음에 심한 상처를 입은 채 '신곡'을 저술했습니다.

고난은 어차피 겪어야 할 과제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궁핍하고 핍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한다면 기뻐해야 합니다(고전 12:10).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는데 은혜를 잊고 살 때, 혹은 그 은혜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살아갈때, 그 은혜를 깨닫게 하시며 은혜를 회복시켜주시려고 주신 은혜가 바로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4. 은혜 위의 은혜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경악스러운 은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 위에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큰 은혜도 그 어떤 어려운 일들도 "여호와 보시기에는 오히려 작은 일"(왕하 3:18)입니다. 
왕하 3장에 보면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자 이스라엘왕 여호람이 유다왕 여호사밧과 에돔왕을 움직여서 모압왕을 치려고 광야길로 가는데 7일만에 물이 없어서 가축들을 먹일 수가 없음으로 인해서 모압에게 패할 위기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이때 대책회의에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찾아가서 문제를 해결하자고 한 것입니다. 

이 때 3:15~20절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의 손이 엘리사 위에 있더니, 그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바람도 보지 못하고 비도 보지 못하되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하여 너희와 너희 가축과 짐승이 마시리라 하셨나이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작은 일이라 여호와께서 모압 사람도 당신의 손에 넘기시리니, 당신들이 모든 견고한 성읍과 모든 아름다운 성읍을 치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모든 샘을 메우고 돌로 모든 좋은 밭을 헐리이다 하더니, 아침이 되어 소제 드릴 때에 물이 에돔 쪽에서부터 흘러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크고 보이는 일도 여호와 보시기에 지극히 작은 일일뿐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일 났다고 낙심하고 경악하고 호들갑을 떨 것이 아니라 이것도 하나님께는 큰일이 아니며 지극히 작은 일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늘 놀라울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헤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다 그 은혜가 놀랍다고 고백했습니다. 

5. 은혜 위의 은혜로 가는 지름길?
  
약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더욱 큰 은혜가 곧 은혜 위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더 큰 은헤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종의 자세를 추천해 주었습니다
"종의 자세로 감당을 하는 것이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지름길이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종이 그 주인의 긍휼을 바라듯이, 여종이 그 주모의 손길을 바라듯이 그런 자세가 되면 은혜 위의 은혜가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은혜를 받고 개인이나 가정이 잘되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의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종의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잘되는 비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교역자나, 성도님들이 다 같이 종의 자세로 교회를 섬기고 교회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종의 자세로 살 때 잘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 위의 은혜, 충만하여 흘러넘치는 은혜,부족함이 없는 은혜, 한 가지 은혜가 만가지 은혜가 되는 은혜, 놀라운 은혜입니다. 
영국의 설교가 스펄전은 "알파도 은혜요 오메가도 은혜"라고 했습니다. 은혜위에 은혜를 받는 삶을 사는 것이 이 험한 세상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능력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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