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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늘'의 소중함 (유 1: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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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소중함 (유 1:17-21)


지난주에 ‘21세기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불리던 스티브 잡스가 췌장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56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디지털시대에 새로운 문화 혁명을 주도하며 인간과 기술의 소통 방식에 있어서 일대 혁명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삶에 있어서 세 번의 변화하는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한 번이 17살에 일생일대의 문장을 읽은 후입니다. 

‘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간다면 어느 날 분명하게 올바른 길에 서 있는 당신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문장입니다. 잡스는 그 문장을 대한 이후부터 39년간 매일 아침마다 거울을 보면 자신에게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지금부터 하려는 바로 이 일을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하루하루를 나의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집중력을 가지고 살았던 그의 하루인 ‘오늘’이 모아져 스티브 잡스의 삶이 되었습니다. 

탈무드에는 ‘오늘은 최초의 날이자 최후의 날이다. 내게 남아 있는 날 가운데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외에 내게 확실한 날은 없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부도수표에 불과합니다. 미래는 아직 내 손에 잡히지 않은 어음과 같은 것입니다. 내게 확실한 것은 현재밖에 없습니다. 오늘 내가 사는 하루가 모아져 나의 미래가 만들어지는 것이지 오늘이 없이 갑작스런 내일은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 현재입니다. 잘못된 신앙은 오늘을 쉽게 보내면서 내일이 아름답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건강한 신앙은 오늘을 믿음 안에서 의미 있게 보내는 것을 감사하며 사는 삶입니다. 오늘을 성실하게 감사하게 사는 믿음의 사람에게 하나님은 내일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을 참으로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여리고 성에 삭개오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의 직업은 세리로서 동족들에서 많은 세금을 거두어 로마 정부에 바치고 그 사이에서 부정을 일삼는 못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직업이 세리라고 하면 침을 뱉고 돌아서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은 삭개오는 세리의 직업에서 떠나겠다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고백과 변화를 보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회개와 변화가 이뤄지는 모습을 보고 ‘오늘’ 즉 ‘바로 그 자리’에서 구원이 이루어졌음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예수님이 십자가 오른쪽과 왼쪽에 강도들이 달려 있었습니다. 한 편의 강도가 예수님을 향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너도 구원하고 우리도 구원해 보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반대편에 있는 강도는 예수님을 향해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향해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도 예수님께서 강도였던 사람에게 구원을 선포하실 때 ‘오늘’ ‘지금’ ‘현재’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어느 정도 지켜 본 후에 평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가는 과거가 아닌 미래가 아닌 오늘입니다. 아무리 극악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오늘’ 진실로 회개하면 예수님은 그 사람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든지 그것을 문제 삼지 않고 ‘오늘’을 인정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용서는 ‘오늘’의 진실함에 근거를 두고 있기에 바른 회개를 하면 언제든지 ‘오늘’에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은 과거와 미래보다 현재를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오늘 본문이 담긴 유다서를 기록한 유다는 ‘오늘’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 주고 있는 사람입니다. 유다서 1장 1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들이 대부분이 유다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예수님을 30냥에 팔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에 죄책감을 느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유다서는 그 가룟 유다가 쓴 것이 아닙니다. 

유다서의 저자는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 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야고보는 예수님이 제자였던 야고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는 헤롯 아그립바 왕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야고보는 성경 야고보서를 쓴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마가복음 6장 3절에 보면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야고보와 유다입니다. 즉 유다서를 쓴 유다는 예수님의 동생 유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가룟 유다와 예수님의 동생 유다의 삶을 비교해 보면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12제자였습니다. 12제자 가운데도 아주 명석하고 똑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모든 재정을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그만큼 가룟 유다는 제자 가운데서도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랑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가룟 유다가 어느 날부터 재물과 명예에 욕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보기 시작하면서 실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부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조금씩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에는 은 30냥에 예수님을 유대지도자들에게 팔아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그는 죄책감에 눌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 후에 가룟 유다라는 이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저주스런 이름 가운데 대표적인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처음에는 아름다운 이름이었지만 나중에는 가장 비참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유다서를 기록한 유다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동생이었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를 않았습니다. 자신의 형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고 사역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예수님을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형을 대신해 가정을 이끌어가면서 힘든 일들로 인해 불평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유다는 예수님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었습니다. 그때부터 유다는 형인 야고보와 함께 복음을 증거하며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야고보와 유다는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초대교회에서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하며 섬김의 삶을 살았습니다. 유다는 초대교회와 모든 성도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유다의 생애를 보면 그의 처음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멀리 했고, 예수님과 가까이 있는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중은 아름다웠습니다. 유다는 모든 성도들과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교회에 기둥처럼 쓰임을 받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시작은 아름답고 사랑스러웠지만 끝은 추하고 악했다면 예수님의 동생 유다는 시작은 무기력하고 별 볼일이 없었지만 끝은 아름답고 사랑스런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이 가룟 유다와 유다서의 저자인 유다의 차이입니다. 저는 그 차이가 ‘오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룟 유다는 어느 순간부터 ‘오늘’을 자신의 욕망과 명예를 중심으로 생활했습니다. ‘오늘’ 하루하루 속에서 하나님과 교회를 소홀히 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면에 유다는 ‘오늘’ 하루하루 속에서 하나님과 교회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오늘’을 믿음 안에서 바르게 세우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과거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다는 믿음 생활을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20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좋은 집을 지으려면 기초가 튼튼해야합니다. 기초가 약하면 그 위에 아무리 좋은 재료로 집을 짓는다 해도 곧 무너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성숙한 신앙인의 삶은 믿음에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믿음의 기초가 굳건하지 못하면 온전한 신앙인의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유다는 이어서 ‘성령으로 기도하며’라고 말합니다. 튼튼한 믿음의 기초 위에 성령 안에서 기도로 기둥을 쌓고 집을 세우라고 말씀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짓는 믿음의 집의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기도가 없는 믿음의 삶은 기둥이 허약한 집과 같습니다. 조그만 충격만 가해져도 흔들리고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믿음을 떠받드는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21절에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기초 위에 기도의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지었으면 그 집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잘 관리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집은 잘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집을 잘 관리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아무리 집을 좋은 재료를 가지고 잘 지어도 그것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곧 흉가처럼 됩니다. 사람이 관리하며 살지 않는 집은 곳곳이 무너집니다. 이것은 믿음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에 기초를 두고 기도의 기둥을 세워 믿음의 집을 지어도 그 믿음의 집을 매일 매일 관리하여야 좋은 집이 됩니다. 믿음의 집을 세워 놓고 ‘오늘’을 방치하기 시작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집이 낡아지고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좋은 믿음의 집이 되려면 과거보다도 ‘오늘’ ‘현재’가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과거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옛날에는 교회에서 이렇게 봉사했고, 성경도 이렇게 많이 공부하고 읽었으며, 기도도 새벽 제단을 열심히 쌓았고 이렇게 기도를 했고...’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과거를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현재 신앙생활을 성숙하고 뜨겁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 옛날이여’라는 말은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의 영웅담적인 신앙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기보다 오늘의 내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점검하는 신앙이 신실한 신앙입니다. 오늘 드리는 예배, 오늘 만나는 사람, 오늘 함께 하는 가족, 오늘 함께 하는 성도, 오늘 내가 섬겨야 할 일 등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신실한 믿음입니다. 건강한 신앙의 모습은 주어진 환경에서 오늘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분명한 것은 과거를 자랑하며 ‘오늘’ 현재가 무너진 신앙인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하지만 과거는 연약하고 부족했지만 ‘오늘’ 현재를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세우는 신앙인에게는 미래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가정과 직장, 이웃과 교회 속에서 ‘오늘’을 소중하게 여기며 사랑으로 믿음의 집을 잘 관리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와 복을 누리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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