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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으로 (벧후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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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으로 (벧후 3:1-7)


방콕에는 커다란 전봇대를 쉽게 코로 말아 올리는 코끼리 쇼가 있습니다. 코끼리에게는 그처럼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서커스를 보면 신기하게도 거대한 코끼리가 조그만 말뚝에 매여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보잘것없는 밧줄에 매여서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말뚝 역시 육중한 쇠말뚝이나 아름드리 기둥이 아니라 아주 보잘것없는 나무기둥을 사용합니다. 언제라도 밧줄을 끊거나 말뚝을 부러뜨리고 벗어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코끼리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처음 코끼리가 왔을 때 무지막지한 쇠사슬과 쇠말뚝에 묶어 놓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도록 말입니다. 어린 코끼리는 쉬지 않고 계속 사슬을 잡아당겨 보다가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닫게 되고 포기합니다. 그래서 얄팍한 줄이라도 일단 다리에 감겨 있기만 하면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커스 코끼리들이 작은 말뚝이나 허술한 밧줄에 매여 있어도 도망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이처럼 사람도 몇 번의 실패, 좌절의 경험 때문에 스스로 마음의 사슬을 만들어내곤 합니다. 당신의 마음속의 사슬을 버리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벅 미니스트 풀러는 “모든 인간은 천재로 태어난다. 그러나 1만 명 가운데 9999명이 성장 환경 속에서 둔재가 되어버리고 만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세계적인 신발 회사인 캔버스가 몇 년 전 내걸었던 광고 문구 가운데 하나가 ‘챔피언으로 태어나 패배자가 되다’였습니다. 이는 사람은 천부적인 위대함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현실 환경 속에서 한계 상황을 만나 실패로 끝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코끼리처럼 사람도 몇 번의 실패, 좌절의 경험 때문에 스스로 마음의 사슬을 만들어내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의 사슬을 버리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어려서부터 ‘안 돼’라는 부정적인 말을 끊임없이 듣고 자랍니다. 이 부정적인 말이 인간의 머리를 내리치는 파괴적인 것이 되어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심지어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타인의 말이나 행동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자신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이 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주님, 무기력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날마다 기도함으로 우리 자신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랑하는 자들로 하여금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이단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순수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두 편의 편지를 쓴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 즉 구약 성경과 주되신 구주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명하신 것인 신약성경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닥쳐오는 여러 가지 제약들은 우리의 자존감을 송두리째 짓밟아버릴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좌절하게 만듭니다. 한데 우리가 좌절하는 그 이유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내 생각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 주위 여건을 보라는 것입니다. 환경도 아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가진 것이 있냐, 무슨 특별한 재주가 있냐? 그렇다고 남들보다 많이 배운 것이 있냐, 뒷받침이 되어 주실 좋은 부모가 있냐? 어느 하나도 아니지 않느냐? 내 스스로 볼 때도 나는 아닌 것 같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요 하나님이 부르시고 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서 우리는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여 넘어지는 자가 아니라 날마다 이기고 또 이기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기억하여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효자는 부모님 앞에서 한숨을 쉬지 않습니다. 부모님 앞에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 부모님이 근심하게 됩니다. 부모님 앞에서는 기쁜 표정만 지어도 효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당에 나와서 얼굴에 웃음만 지어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이 됩니다. 집에서 부부간에 싸우고 왔어도, 형제간에 다투고 왔어도 우리는 늘 웃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싸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늘 웃는 얼굴로 예배를 드리십시다. 

시편 100편 1절에서 2절은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라는 말씀은 ‘하나님!’하고 기쁨으로 외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라는 말씀은 기쁨으로 예배드리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기쁨으로 예배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의 사도’ 하면 사도 요한을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권세 있고 열심 있는 대단한 사도로 생각되는 반면, 요한은 예수님 품에 기댈 정도로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도요 받은 바 그 사랑을 성도들에게 나누어 준 사도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베드로 후서 3장을 보면 그것이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의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우리는 여기서 알 수가 있습니다. 본문 1절에도 “사랑하는 자들아” 8절에도 “사랑하는 자들아” 14절에도 “사랑하는 자들아” 17절에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릅니다. 

이 사랑하는 자라는 말 ‘beloved’는 하나뿐인 사랑입니다. 자식에게는 ‘my dear son, my dear daughter’라고 해서 dear를 쓰지만, 하나뿐인 애인에게는 ‘my beloved’라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성도들을 부를 때 그런 사랑으로, 하나뿐인 애인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성도들을 부릅니다. 그만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시편 84편 11절은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자의 해가 되셔서 빛을 비춰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의 방패가 되셔서 적을 막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에게 은혜를 주셔서 기쁘게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에게 영화를 주셔서 명예롭게 살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자, 의로운 자에게는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스코틀랜드에서 가난하게 사는 앤드류 카네기의 가족에게 미국에 사는 그의 숙모가 편지를 보냈습니다. 미국은 기회가 많은 나라이니 미국으로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카네기가 13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미국으로 가기로 결단하고 재산을 다 팔았으나 미국으로 가는 여비가 20프랑이 부족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염치를 무릅쓰고 친구인 핸더슨 부인을 찾아갔습니다.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가려고 하는데 20프랑이 모자라. 내가 미국에 가도 그것을 언제 갚을지 약속할 수도 없어. 그러나 그 돈을 빌려 줄 수 있겠니?”그 친구가 말했습니다.

“20프랑을 빌려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다른 준비나 잘 하도록 하렴.”
그래서 카네기 가족은 미국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삯바느질과 파출부 일을 하면서 20프랑을 갚기 위해 돈이 생길 때마다 돈을 모았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밖에서 돌아온 카네기의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말했습니다.
“아들아, 오늘이 내 생애에 최고로 기쁜 날이다. 오늘 하루는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자. 오늘이 내 생애 최고의 날이다. 이렇게 기쁠 수 없다.”

“엄마, 왜 그렇게 기뻐하세요?”
“핸더슨 부인에게 빌린 20프랑을 갚게 되었다. 빚을 갚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냐? 핸더슨 부인에게 감사하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꼭 감사해라.”
그때 그는 두 가지를 배웠습니다.
‘아하, 우리 어머니는 정직하시구나. 우리 어머니는 감사할 줄 아는 분이시구나.’
카네기 그가 대성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물론 크게는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의 어머니 때문이라고 그가 말했습니다. 어머니를 본받아 카네기도 정직하게, 또 그에게 조그만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도 감사하면서 사업을 했기 때문에 대성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도 ‘악한 끝은 없고 선한 끝은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실하고 정직하면 우리도 잘 되고 자자손손이 잘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우라. 진실한 마음을 그냥 두지 말고 자꾸 일깨워서 피어나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진실한 마음의 또 하나의 뜻은 이단의 사설이나 거짓 선생에게 유혹, 미혹 당하지 않고, 거짓 사설에 때 묻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마음입니다. 

미국의 체신부 장관을 지낸 워나 메이커는 백화점 왕으로 대단한 재벌입니다. 그는 십의 구조를 바쳤습니다. 십일조 바치기도 아까울 수 있는데 십의 구조를 바쳤습니다. 그는 통찰력이 있어서 어디에 투자를 하든지, 무슨 물건을 사든지 실패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신문 기자가 와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워나 메이커씨, 당신은 통찰력이 있어서 늘 성공하는데, 당신의 생애에서 최고로 귀한 투자는 무엇이었습니까?”

“열두 살 때 투자한 2불 50센트입니다. 그것이 생애 최고의 투자였습니다.”
“어디에 투자했습니까?”
“2불 50센트를 주고 성경을 샀습니다. 그 투자가 최고의 투자였습니다. 그 성경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할렐루야!
베드로가 생각했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나고, 세상이 아무리 탁하고 거짓 선지자가 아무리 많아도 진실한 마음, 깨끗한 마음을 일깨우고 신앙의 절개를 일깨우고 성경만 일깨우면 성도는 걱정이 없다. 얼마든지 승리하고 성공하고 복되게 살 수 있다.’

베드로가 이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내가 베드로전서와 후서 이 둘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깨우고 하나님 말씀을 생각나게 하노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부인하며 자기 정욕을 따라 살아가며 말씀을 왜곡하는 이단들에게 속지 마십시오. 오직 우리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우리들에게 주어진 말씀을 바로 깨달아 진실한 마음, 순수한 마음을 지켜나가게 될 때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복으로 인하여 번성한다”고 하신 잠 11:11의 말씀처럼 우리의 입술의 말이 복된 말이 되어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덕을 끼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랑받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마지막 날에 땅과 하늘이 다 불살라질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조롱하는 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달라진 것이 무엇이 있냐?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어. 벌써 2천년이나 지났건만 도대체 그 마지막은 언제 오는 것이냐?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하더니 그 때가 도대체 진짜 오기나 할 것이냐?”

하지만 벧후 3:9은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참고 기다리십니다. 하지만 악한 자들은 할 수 있으면 믿는 자라도 미혹하여 넘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때때로 낙심합니다. 이미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더란 말입니다. 그래 좌절하고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지를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은 디엘 무디가 거듭남을 체험하고 너무 기뻐서 흥분했습니다. 자신이 천사가 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몇 달 지나니 또 죄를 짓고 초라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안에 정욕이 있습니다. 그는 괴로워서 산에 올라가 특별 기도를 하다가 신비로운 체험을 하고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이젠 됐다. 이제는 승리하리라.’ 하며 내려왔는데, 아니었습니다. 몇 주 뒤에 또 영적인 시험에 들었고, 죄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다시 복잡해지고 깨끗하지 못했습니다.
‘아, 어떻게 하나?’

부흥회에 참석하여 강사님을 통해 은혜를 받았습니다. 천국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두 주가 지나니 부흥회 때 받은 은혜와 신비는 없어지고 또 죄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 양심은 화인 맞은 것일까? 나는 버림 받은 사람인가?’
그때 하나님께서 성경을 찾게 하셨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아하! 성경을 듣고 읽는 것이 최고구나.’

그때부터 매일 시간을 정해 놓고 성경을 사랑함으로 읽은 디엘 무디는 날마다 은혜 생활을 했습니다. 성경을 읽고 영력을 얻어 세계를 구원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다른 챔피언은 될 수 없어도 진실함의 챔피언은 될 수 있고, 성경 읽기의 챔피언은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성경을 읽으면 은혜 생활을 하게 되고, 믿음에 승리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자에게는 약속이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염두에 두고 기억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구약의 선지자의 거룩한 예언의 말씀이나 사도들이 우리에게 기억하도록 일러주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든지 내가 주께로 가든지 둘 중에 하나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 앞에 할 말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 때에 예수님께서 “네가 세상에 있을 때에 무엇을 하다가 내 앞에 섰느냐?”물으시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먹고 마시고 돈 벌고 자녀 키우느라고 정신없이 살다가 왔습니다.”고 할 것입니까? 이 대답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지옥에서 마땅히 할 소리입니다.
26세에 죽은 김종웅 전도사님이란 분은 짧은 메모를 남기고 갔는데, 우리가 생각해 볼 내용입니다. “선택했다는 것은 선택하지 않은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섬기기로 결정했다면 예수님을 다시 만날 것을 기다리며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다시 오셔서 예수님 있는 곳에 우리도 있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요한 계시록 22:20에 보면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말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 선지자가 들어와 성도들을 유혹합니다. 지금도 마귀는 수시로 우리를 유혹하여 우리의 믿음을 흔듭니다. 악한 마귀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성경의 명백한 사실을 의심하게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살전4:16은 말씀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또한 벧전4:7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얘기가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며 하나님은 없다고 조롱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조롱하는 이들은 세상은 창조할 때부터 지금까지 변화가 없기 때문이 예수님께서 다시 강림 하셔서 이 세상을 심판한다는 것은 쓸 데 없는 소리라고 반박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하신 시42:3의 말씀처럼 재림은 둘째 치고 하나님이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을 대할 때 참으로 속에서 눈물이 납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바람은 있는 것처럼 주님의 재림은 반드시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시고 이루지 못한 일이 한 번도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전능하신 주님의 은혜 아래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의 믿음을 굳게 지켜 승리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노아의 때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세상을 물로 쓸어버리시기로 작정을 하십니다. 한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노아를 비웃었습니다. 하늘의 궁창이 열려서 물이 쏟아진다니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을 그들이 어떻게 믿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래서온 세상이 다 물로 잠기게 될 것이라니 이거야말로 정신 나간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지금이야 우리가 비를 보니까 아하 그럴 수 있겠다고 하지만 노아의 때 사람들로서는 그저 노아의 말이 미친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깨닫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알려주시고 깨우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날과 그 때는 알지 못합니다. 오늘날 주님이 언제 오신다고 그 날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고 어디에 오신다고 장소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말에도 속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숨겨진 것을 억지로 풀려고 하다가 넘어지는 자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삶으로 바꾸어나가는 지혜가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했습니다. 이 땅을 노아의 때 물로 심판하셨듯이 이제는 불로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용광로 속에 던져진 돌덩이처럼 다 녹아지게 될 것이요 주님을 부인하던 모든 사람들이 다 영원한 불 못으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이 자리에 있는 분들 가운데는 불 못에 던져질 분이 단 한분도 안 계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지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처럼 교회에 대한 온갖 욕설과 비난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우리가 염려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왜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아니면 주님이 우리를 부르는 그 날까지 기쁨으로 살며 정직하게 살며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기쁨과 감사함으로 예배하기를 힘쓰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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