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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방언기도 (고전 14: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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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기도 (고전 14:39-40) 
 
 
오늘은 방언에 대해서 설교하겠습니다.
방언은 크게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대인방언입니다. 이 방언은 사람과 통하는 방언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120명의 제자들이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10일 동안 전혀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에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 소리가 집 안에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사람들 머리 위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120명이 했던 방언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인방언입니다.
   
둘째는 대물방언입니다. 대물방언은 짐승이나 사물과 통하는 방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대물방언이라는 말은 없지만 대물방언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발람 선지자는 나귀와 대화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때 바리새인들이 못마땅해서 주님에게 그 사람들을 책망하라고 하자 주님께서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약 15년 전에 제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 나뭇잎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해를 못하는 분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 148:9-13을 보면 모든 자연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말씀합니다.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10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11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들과 고관들과 땅의 모든 재판관들이며 12 총각과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13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교회사를 보면 영성가 프란시스는 동물들과 대화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깊은 기도를 하던 사람들 중에는 동물이나 식물과 교제를 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셋째, 대신방언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방언기도가 바로 대신방언입니다. 대신방언은 하나님과 통하는 기도입니다. 오늘 제가 설교하려고 하는 내용 역시 대신방언입니다. 고전 12장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 중에 방언 역시 대신방언이고, 고전 14장에서 말하는 방언 역시 대신방언입니다.
방언기도는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타종교에도 있습니다. 무당 중에도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방언을 하면 귀신이 역사하는 것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방언기도를 하나님 방언과 마귀방언으로 나눠서 말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방언 하는 사람의 중심입니다. 그의 중심이 하나님께 잡혀 있다면 그 방언은 하나님이 주시는 방언이고 그의 중심이 마귀에게 잡혀 있다면 마귀방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중심을 드리고 하나님을 찾으면서 방언을 한다면 그것은 마귀 방언일 수 없는 것입니다.
   
현대 오순절 사건은 1901년 1월 1일 미국의 벧엘 성서신학교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 학장이었던 찰스 팔함 목사님이 학생들에게 성령을 받은 증거가 무엇인지 성경을 연구해서 발표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사도행전을 열심히 공부했는데 논문을 발표할 때 보니까 한사람도 빠짐없이 ‘성령을 받으면 방언을 말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도 방언할 때까지 기도하자”라고 해서 전교생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오스만이라는 여학생이 제일 먼저 성령 충만을 받고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머지 학생들은 더욱 뜨겁게 기도하여 결국 모두가 방언을 하고 성령 충만의 뜨거운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5년 후에 1906년 4월에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아주사 거리에서 흑인 목사 시무어 목사님이 설교하던 중 갑자기 성령이 임하여서 많은 사람이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소문을 듣자 온 미국 전국과 온 세계에서 사람들이 구름 떼같이 모여서 그 은혜를 받으려고 부르짖는데 교회당에 사람이 너무나 많이 들어와서 교회당 마루가 꺼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때 로스앤젤레스 타임지는 “아주사 집회는 지진과 같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하는 아주사 집회의 불길은 그 이후에 유럽, 남미, 아시아, 전 세계에 일어나 오늘날 성령운동의 시금석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때와 같이 성령 충만을 체험하면 대개 방언을 말합니다. 저도 고등학교 2학년 때 삼각산에서 기도를 하다가 성령의 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방언을 하기 시작했는데 30년이 지난 지금도 방언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방언 체험을 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신기해서 방언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방언 기도를 열심히 하다가 방언의 유익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점점 식어져서 나중에는 방언을 안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보통의 경우에는 교회에서 방언기도를 금하여 방언을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서 방언이 유익하다고 말하지만 자기의 고정관념이나 지난날의 신앙생활 스타일을 버리지 못해서 방언을 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은 방언기도의 유익을 깨닫고 열심히 방언기도를 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고전 12,14장 그리고 사 28:11,12을 중심으로 방언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1. 방언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고전 12장에 보면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가 나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방언 기도입니다. 은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리스’라는 말인데 그 뜻은 ‘은혜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은 좋은 것입니다. 결코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고전 12:7에 보니 성령의 은사를 성령의 나타남이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은사를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바람과 같습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뭇잎의 움직이나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으로 바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은사를 사용할 때 성령께서 나타나시는 것이고 우리의 눈에 성령님이 계시다는 것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방언기도를 할 때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고전 12:7에 보면 성령의 은사는 우리를 유익하게 합니다. 방언기도도 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익한 방언기도에 인색할 필요가 없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방언기도는 많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느 권사님의 간증입니다. 권사님이 구역예배에 참석하려고 가방을 들고 집 문을 채워 놓고 나왔습니다. 한참 길을 가는데 갑자기 마음이 들 끌고 짓누르고 큰일이 생긴 것 같은 위협이 느껴지더랍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기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어나는데 기도가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더랍니다.   
여러분 그런 체험 해본 적 있습니까? 저는 그런 체험을 종종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살다보면 그런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이 권사님이 기도하고자 하는 강력한 성령의 인도를 이기지 못하고 할 수 없어서 가로등 옆에 앉아서 힘을 다해서 방언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한참 방언으로 기도하고 나니까 속이 시원해서 눈을 떠 보니까 지나가던 사람들이 미친 여자가 이상한 말 한다고 구경하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얼른 그 자리를 피해 나와서 구역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구역예배를 잘 마치고 집에 가보니 아이고 큰일 났더랍니다. 도둑이 들어와서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안방 문이 다 열렸는데 서랍도 다 열리고 옷가지가 방에 늘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중요한 것은 한 가지도 건드리지 않았더랍니다. 서랍 안에는 금붙이와 돈이 들어있는 보따리가 있는데 그것은 손도 안대고 그대로 놔두었더랍니다. 그때 이 권사님에게 깨달아진 것은 좀 전에 구역예배 갈 때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방언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도둑놈의 눈을 가려 버렸다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도둑질을 잘 하는 도둑놈도 훔칠 물건이 보이지 않으면 훔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권사님은 방언기도로 큰 유익을 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은사는 영적인 무기와 같습니다. 전쟁을 할 때 좋은 무기를 가진 편이 이기는 것입니다. 적들은 칼과 창을 가지고 싸우는데 우리는 총과 탱크로 무장했다면 그 싸움의 결과는 보나 마나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면 마귀가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기계와 같습니다. 맨손으로 땅을 파는 것과 삽으로 땅을 파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또 삽으로 땅을 파는 것과 포클레인으로 땅을 파는 것도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일군들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성령이 주신 기계와 같은 은사를 써야 합니다. 그래야 많은 일을 하고, 큰 일을 하고,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방언은 하나님과 통하는 통신수단입니다(2절 사 28:11). 
   
2절에 보니 방언은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 28:11을 보니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는 하나님께 말하는 기도이며 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입니다.
   
대화는 일방적이 되면 안 됩니다. 쌍방적 이어야 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방적인 기도는 응답이 풍성할 수 없습니다. 쌍방적인 기도가 되어야 응답이 풍성합니다. 마치 대화하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하나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기도가 깊은 기도입니다.
핸드폰을 쓰다보면 생각보다 수명이 짧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고장이 나서 내가 하는 말을 상대가 듣지 못합니다. 상대의 말은 내게 들리는데 내 말이 상대에게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또 반대로 상대가 하는 말을 내가 듣지 못합니다. 내 말을 상대는 듣는데 상대의 말이 내게 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는 정말 답답합니다.
   
기도는 내가 말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하나님께 말씀하시면 내가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상적인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쌍방적인 기도를 가능하게 하는 아주 중요한 기도가 방언기도입니다. 나는 주님에게 비밀을 말하고 주님은 내게 말씀하시는 기도가 방언기도입니다. 
 
3.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웁니다(4절). 
   
4절에 보니 방언을 하는 사람은 자기의 덕을 세웁니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자기를 건축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자신을 더 온전한 성전으로 세워나가는 작업입니다. 엡 2;22에 보면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또 벧전 2:5에서는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생활은 늘 발전적이 되어야 합니다. 전보다 더 신앙이 깊어지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예수님을 더욱 닮아가야 합니다. 이런 긍정적인 변화를 성화라고 합니다. 성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닮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야 할 것이 많은데 세 가지로 정리를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능력을 닮아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의 사역을 닮아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교회 안을 들여다보면 신앙생활의 연조가 오래 되었고 목사, 장로, 권사, 집사의 직분을 받았지만 여전히 어린 아기 신앙으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작은 일만 있어도 시험에 들고, 작은 시험에도 이러 저리 넘어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전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은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거슬리는 설교는 못 듣고, 거슬리는 사람은 못 보고, 거슬리는 사역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자신이 건축되지 못한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면 교회를 세우고 가정을 세우고 자기를 세우는 것입니다. 특히 방언의 은사는 자기를 건축합니다. 자기를 변화시켜서 주님을 닮아가게 만드는 것이 방언기도의 능력 중에 하나입니다. 
 
4. 방언을 하는 사람은 통역하기를 구해야 합니다(5, 13절). 
   
제가 자랄 때 운동선수생활을 하느라고 공부를 하지 않아서 영어가 많이 부족합니다. 영어를 못하니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지난번 이스라엘에 갈 때도 중앙대학교 교목하시는 이재하 목사님이 가셔서 도와주시기로 했는데 갑자기 못 가신다고 하니 아주 난감했습니다. 다행히 대구에 사시는 김희중 집사님이 도움을 주셔서 잘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내년 5월에 있을 이스라엘 사역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을 믿지만 제 안에 아직 몇 가지 근심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언어 문제입니다. 다행히 통역을 하겠다는 사람이 있지만 제가 유대인 목사님들과 깊은 교제를 하려면 언어가 문제입니다.
   
방언기도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굉장한 유익을 줍니다. 하지만 통역이 되지 않는다면 방언기도를 하는 당사자는 답답한 것입니다. 그래서 5절과 13절에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방언은 하는데 통역이 안 되는 분들은 통역하기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풍성한 통역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통역하는 사람들을 보면 통역의 수준 차이가 있습니다. 외국어를 통역하는 것도 수준 차이가 있는 것처럼 방언통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통역도 겨우 하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 통역을 능숙하게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남의 통역도 능숙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안수를 하면서 남의 방언이 통역 될 때가 있습니다. 상대의 소리가 제 귀에 잘 들리지 않아도 제 마음에 상대의 방언이 통역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통역의 내용을 입으로 말하면 상대가 놀라기도 하고 울기도하고 회개하기도 합니다. 그 통역으로 상대는 위로 받기도 하고 책망을 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통역을 통해서 응답을 받기도 합니다.
몇 주 전에 송나현 학생이 금요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그 날 제가 안수를 했는데 제 안수기도를 받고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제가 입으로 다 말했습니다. 제가 나현이 속을 알아서가 아니라 그날 성령의 은사로 통역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신기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통역의 유익입니다. 방언을 하시는 분들은 통역을 구하세요. 
 
5. 다른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많이 하십시오(18절). 
   
롬 8:26, 27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님은 우리의 보혜사이십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곁에서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다보면 무슨 기도를 해야 할지 몰라서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방언으로 기도하면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힘써서 방언기도를 해야 합니다.
   
학식도 언변도 부족한 사람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법정에 섰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하지만 두렵고 떨리고 말도 못해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학식도 많고 언변도 좋은 변호사를 선임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말을 못해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학식이 많고 말도 잘하는 변호사가 자기를 대신해서 변론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변호사이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할 줄 모르지만 방언으로 기도하면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 까지 통달하신 성령께서 보이지 않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해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방언기도를 많이 했던 것입니다.
   
18절입니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린도 교회는 방언기도를 많이 하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교회의 모든 교인들보다 방언기도를 더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 신령하고 똑똑한 바울이 방언 기도를 많이 했다면 방언기도가 좋기 때문이지요. 방언기도가 좋은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바울이 방언기도를 많이 했겠습니까? 방언기도를 많이 하십시오. 거룩한 욕심을 부리세요. 
 
6. 초대교회는 예배시간에 방언기도가 있었습니다(26절) 
   
우리교회는 예배시간에도 방언기도를 합니다. 방언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분들은 예배시간에 방언기도를 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절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게 정상적인 것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옛날 초대교회에는 예배를 보면 찬송가도 있고 가르치는 말씀도 있고 하나님의 계시도 받아서 증거 했고 방언기도도 하고 또 방언통역도 했습니다. 예배에 반드시 방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그 전통을 잃어버리고 방언하는 사람, 방언 하는 교회를 오히려 이상한 짓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7. 방언은 질서 있게 품위 있게 사용해야 합니다(27, 28, 40절). 
   
27,28,40절을 보면 질서와 품위를 말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면서 방언을 하기 때문에 방언기도를 하면서 큰 소리를 내는 것은 이해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혐오스러운 소리를 내는 것은 절제하십시오. 과거 빈야드운동을 하던 분들 중에는 짐승소리 비슷하게 내기도 했는데 그런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절제해야 합니다. 평상시 자기 목소리가 아닌데 아기 목소리라든지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도 절제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방해하고 자기 자신도 다른 사람들에게 우스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남들이 다 조용히 기도할 때 나 혼자 지나치게 큰 소리로 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공예배 시간에 통성으로 기도하면서 방언을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표기도를 하면서 방언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공예배 시간에 방언을 하면 통역을 해야 합니다. 만약 자기가 통역을 할 수 없거나 통역하는 자가 없다면 방언을 하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은 질서 있게 하고 품위 있게 해야 합니다. 
 
8. 방언을 금하지 말아야 합니다(39절). 
   
요즘 교회들 가운데 방언을 못하게 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해는 갑니다. 왜냐하면 은사를 쓰는 사람들이 덕스럽지 못하게 은사를 사용해서 교회에 해를 끼친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방언을 금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금하지 말라고 하는데 방언을 금한다면 성경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39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9.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하고 두려울 때 방언기도를 많이 하면 상쾌하게 됩니다. 
   
마음에 기쁨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환경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기쁨이 없습니다. 우울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기뻐하는데 나는 기쁘지 않습니다. 늘 불안합니다. 그럴 때 마음을 치료하는 방법이 방언기도입니다.
사 28:11,12입니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12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방언기도를 하면 마음이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마음이 상쾌해집니다. 곤비함이 사라집니다.
   
어느 자매의 간증입니다. 쌍둥이를 낳았는데 둘째 애가 밤에 잠을 자다가 깨면 밤새도록 웁니다. 무서운 꿈을 꾸기 때문에 꿈꾸고 나면 일어나서 새벽까지 벌벌 떨고 아버지 어머니에게 매달리며 우는 겁니다. 그래서 병원에 데려가서 치료를 해도 안 되고 정신적으로 어린아이가 완전히 위축되어 있습니다. 그 자매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기도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저녁에는 또 일어나서 막 울고 부르짖기는 아이 머리에 손을 얹고 “하나님 나는 왜 이런 일이 얘에게 생기는지 모르겠습니다. 성령께서 아시니 고쳐 주십시오.”하고 방언으로 한 시간쯤 기도하니 애가 그냥 조용히 가라앉더니 잠을 자더랍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다시는 밤에 깨어 일어나서 울지 않더랍니다. 늘 무서운 꿈을 꾸고 울던 아이를 엄마가 머리에 손을 얹고 한 시간 쯤 방언으로 기도하고 난 다음에 아이가 치료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이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셔서 어린아이가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건강하게 자랐다는 간증입니다.
   
어떤 사람은 방언기도를 아주 유창하게 멋있게 합니다. 그런데 방언기도를 유창하고 멋있게 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이 같은 말을 반복하기 때문에 고상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굉장히 무식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제가 광교산 기도원에 갔을 때 어느 전도사님이 강단 앞에 서서 방언기도를 했습니다. 그 전도사님은 강단 쪽을 바라보고 서서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밤바라밤바라퓨샤”를 한 시간 동안 반복해서 하는데 마치 코미디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목사님이 의정부에서 섬겼던 교회에는 기도를 무섭게 하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통성기도시간에 들어보면 성도들이 이쪽저쪽에서 “칼갈아칼갈아” 하면서 기도를 한답니다. 사람 잡는 기도처럼 들린답니다. 이런 방언기도를 듣고 있으면 방언기도에 대해서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방언기도에 대해서 회의적입니다.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같은 말을 반복하지만 하나님께는 다 다른 의미로 상달되는 것입니다.
아기가 울면 엄마는 아기가 왜 우는지를 압니다. 어디가 아픈지, 배가 고픈지, 똥을 쌌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엄마는 아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귀에는 다 같은 방언기도로 들려도 하나님께는 가장 합당한 기도의 내용으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방언기도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대통령이 준 선물도 함부로 다루지 않는데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가볍게 여기고 사용하지 않고 멸시하면 안 됩니다.
방언기도를 선물로 주신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방언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옷을 한 벌 사줬다고 생각해 봅시다. 상대가 여러분의 선물을 받고 장롱구석에 내팽개치고 한 번도 입지 않는다면 기분 좋겠습니까?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요. 그런데 상대가 여러분이 준 선물을 고마워하고 그 옷을 입고 행복해 하며 늘 그 옷을 입는다면 여러분의 기분은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기분이 좋지요.
방언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받지 못한 분들은 받기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받으신 분들은 기쁨으로 열심히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주일 낮 예배시간이지만 방언을 받지 못한 분들은 방언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고 방언을 받은 분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방언기도를 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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