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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이런 일을 알겠느냐 (호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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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런 일을 알겠느냐 (호 14:1-9)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에 수학에 관한 어떤 교양서적 한 권을 읽다가 '4원수(四原數)'라는 것을 처음으로 보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현재 수학에서 가장 넓은 개념의 수체계(數體系)인 '복소수(複素數)'와 대응하는 것으로서 '교환법칙이 성립되지 않는' 새로운 수체계인데 해밀턴이라는 수학자가 생각해 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4원수'의 설명을 아무리 읽어 보아도 그 '곱셈의 교환법칙이 성립되지 않는 수식'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참 답답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미국에 있을 때 교회의 청년회 모임에 갔다가 수학을 전공했다는 어떤 자매님 한 명을 우연히 만나게 되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마침 그 '4원수'라는 것이 생각나서 그게 도대체 어떤 수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물론 저는 상대방이 수학을 전공했다고 하니까 으레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 청년은 자기는 그런 용어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고 대답하면서 거꾸로 제게 어디서 그런 내용을 읽게 되었는지 되물어 오는 바람에 질문을 했던 제가 오히려 당황하고 미안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수학뿐 아니라 그 어떤 학문에서도 그것을 전공했다고 해서 그 분야에 포함된 모든 것들을 완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목사라고 해서 신구약 성경의 모든 구절들과 단어들을 하나하나 즉석에서 자세히 해석하기는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수학자라면 수학에 대해서, 목사라면 신학에 대해서 속속들이 다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남이 볼 때에 '명색이 기독신자라고 한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겠지.'라고 짐작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것이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 대표적인 것들이, 정말 놀랍게도, '회개'와 '축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두 가지 문제들은 불신자들조차 귀에 익숙한 용어이며 그네들 나름대로는 그 의미들도 잘 알고 또한 사용까지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이 회개와 축복이라는 말의 바른 의미에 대해서 신자들조차 잘 모르거나 혹은 알아도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 9절 상반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그와 같은 맥락에서 "9a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고 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호세아서에 기록된 전체 내용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지만, 또한 그런 까닭에 이 14장에 기록된 내용에 아주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누가 정말 이 말씀에 기록된 내용들을 제대로 깨닫고 정확하게 알겠느냐?'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 중에서도 사실은 '이런 일을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이 호세아서의 마지막 장을 통하여 평소에 우리가 자주 듣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들, 참된 신자라면 당연히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되지만 실상은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는 '회개'와 '축복'의 바른 의미를 다시 한 번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는 것'이 회개의 본질임을 알고 고백해야 합니다.

'회개'란 신자는 물론이고 불신자까지 잘 알고 있는 단어이지만 정말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란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참된 회개는 먼저 '죄가 내 인생에 가장 큰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시작된다고 했는데, 바로 1절 말씀에 "1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고 기록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당신 앞으로 돌아오라고 즉 간단히 말해서 회개하라고 마지막으로 또 한 번 간절히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회개가 올바른 것이 되기 위해서 꼭 깨달아야 할 첫 번째 사실이 바로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려진 것"이라고 일러 주신 것입니다.
사실 여기의 "불의"라는 단어는 그냥 '죄'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네 죄로 인하여 네가 엎드려졌다.'라고 이스라엘 백성을 일깨워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던 북조 이스라엘은 당시 앗수르 제국의 강력한 위협을 받으면서 나라가 멸망당하기 직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난관과 위기를 맞이하게 된 원인은 오직 그들의 죄에 있다는 바로 이 사실을 똑바로 깨닫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로보암 2세의 통치 하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이스라엘이 그처럼 급속히 '엎어지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정치를 잘못해서가 아니요 때를 잘못 타고나서도 아니요 남들보다 운이 나빠서 그런 것도 아니라 오직 그들이 저지른 우상숭배의 죄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참된 회개를 하고자 한다면 그 무엇보다도 이 점부터 가장 먼저 깨달아야만 했던 것이었습니다.

회개에 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두 번째는 '입술을 통한 심령의 자복'이 회개의 필수 단계라는 사실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성경에서 가르치는 회개란 '사람 쪽에서 그 무언가를 행함으로써 자기의 죄를 갚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고백'하는 그 자체에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본문 2절에서 "2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라고 권면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여기 "말씀을 가지고"란 말은 '회개하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고'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회개하는 자가 하나님께 아뢸 말씀은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라고 했는데, 이것은 '저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는 간단하면서도 간절한 기도입니다.
즉 자신의 죄값을 치르기 위한 어떤 대속물을 스스로 가지고 나오면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빈손이지만 진정으로 애통하고 자복하는 심령을 그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바로 참된 회개의 조건인 것입니다.

이것은 그 뒤를 보면 더욱 분명해지는데, 바로 "선한 바를 받으소서"라고 하면서 죄 용서를 구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바"란 회개하고 있는 사람 쪽의 어떤 선한 공로나 행위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선한 것'이란 바로 뒤이어 나오는 말씀에 있는 대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 제물 중에 가장 좋은 것이 바로 수송아지였는데, 그것 대신에 '우리의 입술'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했습니다.
즉 '통회 자복하며 회개하는 심령'을 그대로 밖으로 고백하는 입술 이것이 수송아지보다도 더 귀한 회개의 제물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회개에 대하여 꼭 알아야 할 세 번째 사실은 '죄 용서함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변화되는 삶'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이 변화됨으로써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을 수 없고 받을 공로도 없는 죄'를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하여 용서받게 되니 그 감격과 감사로 인하여 자연히 그 생활도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3절에서 기록하기를 "3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미래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참으로 회개한 자들이 자기네들이 지은 대표적인 죄 세 가지를 돌이켜 보면서 회개할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즉 그들은 그들이 국난을 당하는 동안 '불신 이방 민족인 앗수르의 도움'이나 '마병과 같은 군사력'이나 또한 '자기의 손으로 지은 우상'을 하나님 대신에 의존했던 죄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이스라엘의 회심이 어떻게 해서 일어났습니까?
그것은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아는 도움이나 사랑을 베풀어 줄 부모가 아예 없는 존재입니다.
바로 그런 고아와 같은 상태에 있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긍휼을 그야말로 무조건적으로 내려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아무 의지할 곳 없던 고아에게 어느 날 갑자가 자비로운 양부모가 불쑥 나타나 준다면 그 고아로서는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죄 용서 받은 이스라엘의 기분이 그와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긍휼의 감격에 넘쳐서 이스라엘은 지난날 저질렀던 죄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즉 회개하는 사람 쪽의 변화가 먼저 일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이 임한 것이 결코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긍휼을 받았기 때문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절로 따라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며, 바로 여기에 참된 회개의 마지막 단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지혜와 총명이 있어서' 회개에 관한 이런 일을 깨닫고 알겠느냐고 오늘 우리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하지만 신자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람 편에서의 변화가 회개의 가장 우선적인 조건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 없이 완전히 변화되어야 하나님께 회개할 면목이 서고 무슨 제물을 가지고 나가야 그 죄를 갚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회개를 아는 것 같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말인 것입니다.

자기 인생에 어떤 문제가 생길 때에 그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자신의 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바로 참된 회개의 첫 단계입니다.
그렇지 않고 무슨 운수 탓으로, 조상 탓으로, 정부 탓으로만 돌리는 것이 오늘날 현대인의 대표적인 병폐인데, 이것은 자기 자신을 항상 타인에 의한 '피해자'(victim)라고만 보는 일종의 피해망상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문제가 물질적이든지 영적이든지, 가정의 문제이든지 직장의 문제이든지, 개인의 문제이든지 사회의 문제이든지 간에 그 모든 원인은 나 자신의 '불의함'에 있다는 바로 이 사실을 깨닫고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바로 거기에서부터 그 '엎드러짐'에서 다시 회복되고 소생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바로 그 자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자기 죄에 대해서 '자책'과 '후회'만 했지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복'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완전히 '엎드러지고' 말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보여 드릴 수 있는 최대의 '선한 바'는 어떤 제물이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애통하고 자복하는 심령'을 '진실한 입술을 통해 고백'하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사람의 상식으로서는 그런 회개가 도저히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없이 그저 용서해 달라고 빌기만 하는 것은 아주 염치없고 뻔뻔스러운 회개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입술의 고백'만으로 '수송아지'를 대신하는 우리의 그런 회개를 '선한 바'라고 받아 주시고, 그것만 가지고도 다 용서해 주시는 실로 '신비한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런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일단 우리가 '맛보아 알게' 되면 우리의 생은 그 감격으로 인하여 절로 변화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고 선언해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을 자신의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꼭 깨닫고 느낄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축복의 근본임을 깨닫고 체험해야 합니다.

'축복' - 이것만큼은 정말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누구나 다 잘 아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지만 사실은 또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4절 이하의 본문은 앞서 나타난 것처럼 진정으로 회개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차 내려질 축복을 일러 주시는 내용인데, 이것 역시 세 단계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서 4절에 "4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회개하는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축복은 그들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이나 경제가 살아나는 것 따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해 주시는 모습'이 달라지는 것이 제일 먼저였습니다.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패역'이란 '등을 돌리고 떠나간 행위'(back turning)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고치다'라는 말은 '옛날의 상태로 회복시키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을 떠났던 이스라엘'을 원래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로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축복이었습니다.
그 관계 회복이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즐거이 사랑"해 주시는 것과 그 "진노"를 거두어 주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회복되는 것 - 바로 이것이야말로 회개한 사람이 누리게 되는 최고최대의 축복인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축복의 두 번째 의미는 '날마다 하나님의 일반 은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바로 5절부터 7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5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6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7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저희는 곡식 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한 눈에 알 수 있듯이 여기서는 신자의 축복이 여러 종류의 식물들이 자라는 것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백합화 같이 피겠고"라는 말은 한 뿌리에서 50개의 가지가 뻗어 나오기도 한다는 백합화의 왕성한 번식력을 가리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것은 "백향목의 뿌리"처럼 튼튼한 기반을 가진 것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즉 회개한 성도에게는 백합화처럼 번성하면서 동시에 견고하여 흔들림 없는 축복이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가운데 "가지가 퍼지며" 그 전체의 "아름다움"이 돋보이고 또한 동시에 그 "향기"까지 주위에 가득 풍기며 그 "열매"의 풍족함까지 넘치는 축복의 생활이 약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식물을 들어 비유하는 축복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고 한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도가 누리는 모든 '일반적 축복들'을 총망라해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에서 더욱 강조하고 있는 요점은 과연 무엇이 이런 각종 식물들이 자라고 번성하게 만들어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가리켜 본문 5절에서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슬'은 한 번에 큰 비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조금씩 식물에게 수분을 공급해 주는 자연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이슬은 팔레스타인과 같이 건조한 지역에서는 오히려 비보다 더욱 요긴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이슬 때문에 백합화도 피고 백향목도 자랄 수 있는 것이며 종내에는 꽃과 열매까지 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내려 주시는 '일반 은총'을 비유하는 말씀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생이 영위되는 데 꼭 필요한 만큼 내려 주시는 이 '이슬 같은 은혜'야말로 실로 귀중한 축복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비나 소나기'처럼 큰 축복을 왕창 내려 주실 때도 있지만 또한 '이슬'처럼 '매일 일용할 것'도 베풀어 주고 계시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축복을 체험하게 되면 될수록 성도는 '그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더욱 감사'하게 됩니다.
바로 이어지는 8절에서 "8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저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날마다 맛보게 되는 달콤한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된 성도는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즉 '하나님 한 분 외에 내게는 다른 아무 사랑의 대상이 없다.'라고 자신의 신앙을 재차 천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고백이 성도의 입에서 나오게 되는 것을 듣게 되시면 하나님께서도 가만히 계실 수 없게 됩니다.
바로 "내가 저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이라고 즉시 화답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가리켜 '포도나무'라고 하셨는데, 이처럼 '고소하고 달콤한 열매'를 공급해 주는 이 나무들은 둘 다 대표적인 '축복의 상징'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회복이 된 후에 하나님께서는 축복해 주시고 사람 쪽에서는 더 뜨거운 사랑을 고백하게 되는 것 - 이것이야말로 실로 '깨가 쏟아지듯이 고소하고 꿀처럼 달콤한' 축복의 생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아니 신자들 중에서도 꼭 '비나 소나기'가 왕창 내려오는 것만이 축복인 줄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누가 지혜와 총명이 있어서' 진짜 축복이 무엇인지를 바로 깨달을 수 있겠느냐고 하시면서 우리를 다시금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그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을 떠났던 죄인'을 하나님께서 '고쳐' 주셔서 다시금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로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시작됩니다. 

그처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이루어지게 되면 그저 아무나 받지 못하는 것, 쉽게 얻을 수 없는 것, 그 무슨 운수대통이라 부를만한 것들만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무지한 소치인 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날마다 대하는 것, 항상 평범하게 접할 수 있는 것,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것, 아니 자동적으로 공급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이슬이 되어 주심'으로써 누리게 되는 가장 귀하고도 풍성한 축복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도, 아무리 가정에 돈이 굴러 들어오고 직장에서 진급을 한다 해도 부모자식 간이나 형제자매 사이에 금이 가면서 소위 '콩가루 집안'이 되어 있다면 그 가족이 어떻게 행복하겠으며 그 누가 그 집안사람들을 가리켜 복 받았다고 말하겠습니까?
부부나 부자나 친구 사이에서도 먼저 서로 사랑 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고 사랑을 주는 행복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세상적으로도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사랑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그 하나님께서 '날마다 내려 주시는 일반은총' 가운데서 행복을 만끽하며 그로 인하여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드리면서' 살 줄 아는 여기에 신자의 진짜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날 사랑해 주심을 매사에 느끼고 또한 나 자신 역시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고 있음을 날마다 고백하고 증거함으로써 인생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진짜 축복을 평생토록 향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9절 하반절에 "9b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여호와의 도" 즉 바로 이런 '회개와 이런 축복에 관한 진리'는 아무나 알고 누릴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이라야' 이 '도에 행할 수' 있고, 반면에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하는 '죄인은' 오히려 '이 도에 걸려서 넘어지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똑같은 '여호와의 도'이지만 이것을 이해하는 방법과 이것이 적용되는 길은 극과 극으로 갈라지고 있지 않습니까?
의인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에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회개를 할 줄 알지만, 죄인은 '자신의 불의함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선한 바'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려 합니다.
의인은 탕자와 같았던 자신을 하나님께서 다시 '당신의 양자'로 회복시켜 주신 것이야말로 최고의 축복인 것을 깨닫고 감사 감격하지만, 죄인은 여전히 자기에게 '건강과 부와 명예'의 복을 자기 소원대로 내려 주지 않는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멸시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 후자들은 실로 '회개와 축복의 도'에 오히려 '거쳐 넘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회개를 할 줄 알고,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축복을 누릴 줄 알겠느냐?'라고 오늘도 저와 여러분에게 다시 묻고 계십니다.
바른 회개를 알고 행함으로써 자신의 의로움 대신 주님의 긍휼하심을 뜨겁게 체험하는 자, 하나님과 날마다 사랑으로 동행하며 그 자상하신 은혜를 구석구석에서 맛봄으로써 진짜 축복이 무엇인지를 만끽하는 자 - 이처럼 오묘하고도 은혜로운 도를 깨달아 알고 행하여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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