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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열매(8) “온유” (갈 5: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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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8) “온유”


갈라디아서 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여덟 번째 열매는 ‘온유’입니다. 한자로 따뜻할 온(溫) 부드러울 유(柔)를 써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말합니다. 사회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강하고 바른 사람이 그 하나요,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다른 하나입니다. 강하고 바른 사람만 있으면 숨 쉴 틈이 없는 율법 사회가 됩니다. 반면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만 있으면 규모가 없는 사회가 됩니다. 양자가 조화를 이룰 때 건강한 사회가 됩니다. 강하고 바름으로 사람들을 이끌며 따뜻함과 부드러움으로 낙오된 사람들을 격려할 때 그 사회가 행복하고 건강합니다. 가정으로 따지면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전자요, 어머니와 같은 사람이 후자입니다. 아버지의 권위와 능력과, 어머니의 섬김과 사랑이 함께 할 때 그 가정이 행복하고 자녀들은 건강하게 자랍니다.

사람의 성장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시절엔 강하고 바른 것이 좋습니다. 강하고 능력 있게 일을 추진하고 원칙이 있는 바른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는 따뜻하고 부드러워지는 것이 옳습니다. 일보다는 사람이 중요하며, 매사가 원칙이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으며, 모든 것에는 시간이 필요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사람을 얻습니다. 군대에서 소대장급이 가져야 될 가장 필요한 품성은 용기입니다. 그들은 용장이 되어야 합니다. 영관급이 가져야 할 것은 지혜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지장이 되는 것입니다. 전략을 잘 짜야 합니다. 그러나 장군이 가져야 될 것은 덕입니다. 덕장이 되어야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 똑똑하다는 말을 들으면 좋은 칭찬입니다. 그러나 만약 나이 들어서도 똑똑하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것은 욕입니다. 나이 들어서는 덕이 있어야 합니다.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덕덕’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온유하신 하나님

온유하다는 것은 결코 약하고 무르다는 뜻이 아닙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바보거나 실력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온유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온유는 거인이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과 같습니다. 힘이 있지만 힘을 절제하는 데서 나오는 품성이 온유입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품성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신 분이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온유는 그 힘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온유는 달리 말하면 자기에게 정당한 권리가 있지만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충분히 분노할 수 있지만 분노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늘 보좌에서 영광을 받으실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내려놓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하나님이 온유해지셨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시내 산에서 십계명 율법을 들고 강한 바람과 지진과 우뢰의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는 그 앞에 감히 눈을 들고 서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이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사랑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시자 누구든 두렴 없이 그 사랑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의롭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판단하고 심판하실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우리들을 사랑함으로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왜 이렇게 죄 지었니 왜 이렇게 무능하니 묻지 않으시고 그 품에 안아주셨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강함이 아버지의 속성이라면 온유는 어머니의 속성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어머니처럼 우리를 감싸고 안아주십니다. 이 온유함의 사랑이 우리를 살아나게 했습니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강한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태양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 죄악의 옷 꺼풀들을 하나하나 벗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의 온유한 사랑은 간음하는 현장에서 끌려온 여인에 대한 사랑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간음 중에 잡힌 한 여인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끌고 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 나아와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한 여자는 돌로 치라고 하였다고 하며 예수님을 곤궁에 몰아넣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들의 비정함을 봅니다. 한 여인의 목숨이 위태한 순간인데 이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을 정말 악랄한 생각을 합니다. 돌로 치라고 하면 그동안의 예수님의 사랑에 위배되는 것이요, 돌로 치지 말고 살려주라 하면 모세의 율법에 어긋난 일입니다. 온유함을 잃어버린 비정한 사회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의 이런 완악함 마음에 화가 나셨던지 아니면 곤혹스런 처지여서 그랬는지 주님은 이들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다 무엇을 연신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재촉하자 예수님은 그때서야 허리를 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그러자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들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들이 모두 물러가고 그 여자와 예수님만 남게 되었습니. 그때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8:11) 말씀하시고 여자를 돌려보냅니다. 

예수님의 이 태도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분명 여자가 간음한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율법을 어긴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자를 정죄하는 대신 온유한 마음으로 용서해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첫째는 오늘 장면에 묘사된 그대로 아무도 의로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여자는 드러난 죄인이고 다른 사람들은 단지 드러나지 않은 죄인일 뿐입니다. 또 여자의 죄는 상대적으로 무거운 죄이지만 다른 사람들 또한 그에 못지않은 죄인들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온유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처럼 우리가 동병상련의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암 병동에서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죽어가는 인생들에게는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단지 서로 껴안고 불쌍히 여기는 일밖에 없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이 여자의 곤궁한 처지를 보았을 것입니다. 간음을 했다면 둘이 했을 터인데 남자는 달아났는지, 혹은 용서받았는지 없고 여인만 남아 있습니다. 또 그 여인이 이렇게 간음할 정도로 위기를 맞게 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남자가 강제로 그랬을 수도 있고, 오랫동안 수절 끝에 외로워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돈이 궁해서 몸을 팔았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한 이유를 안다면 미워하거나 정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눈은 우리 중심을 보시는 눈입니다. 설사 우리가 예수님처럼 그 중심을 모른다 할지라도 우리는 어떤 행동이나 죄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온유한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그 사연을 알기 위해 온유해야 하고 그 사연을 알고 나면 우리는 더 온유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어린 아이가 지하철에서 소리 지르고 뛰놀며 난장판을 칩니다. 사람들이 모두 언짢아하는데 그 아이의 아버지는 그 자녀를 자제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보다 못한 한 사람이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 가서 당신 아이 좀 교육시키라고 말합니다. 그때 갑자기 그 아이의 아버지는 정신을 차린 듯 사람들을 향하여 고개를 숙이며 미안하다고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죄송합니다. 실은 이 아이 엄마가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며칠 전에 죽었습니다. 지금은 아이 엄마를 화장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이 말을 듣자 그 차 안에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숙연해지면서 더 이상 그 아이를 나무랄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들 사이에 이런 갈등에 이르게 된 데는 모두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이유를 알기까지 기다리는 마음 이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이 여자를 용서하신 이유는 용서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죄를 정죄하자면 그녀는 모세의 법대로 투석형으로 죽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사회 정의는 세웠을는지 모르지만 한 사람은 죽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용서해야 이 여자가 스스로 뉘우치고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사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딱딱한 매보다 온유한 사랑입니다. 매는 사람으로 타율적인 존재가 되게 합니다. 두려워서 일단 피하자는 심리를 유발할 뿐입니다. 사람에 대하여 온유함으로 품는 것은 스스로가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함입니다. 사람 안에는 정의의 마음이 있고 또 무한한 능력도 있습니다. 그것들이 온유하고 부드러운 사랑을 만날 때 마치 봄날에 부는 훈풍처럼 우리 안에서 의와 가능성의 새순을 내고 꽃을 피게 합니다.

온유한 사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온유의 열매를 원하시는 이유는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온유해야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돌멩이를 벽이나 유리를 향하여 던지면 깨지거나 상처가 남습니다. 그러나 물에다 던지면 흔적도 없습니다. 벽이나 유리는 단단하기 때문이요 물은 부드럽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 또한 그렇습니다. 마음이 강하면 상처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온유하면 상처를 잘 흡수합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한 기준을 강요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이 늘 불편합니다. 마치 어떤 심판관이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온유한 마음으로 대하시는데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마음 밭을 부드럽게 만들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우리 마음을 온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에스겔 서 말씀입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36:26) 백사장에 가면 고운 조약돌들이 많이 있습니다. 거친 돌들을 몽글게 만든 것은 날카로운 정이 아니라 부드러운 물이었습니다. 부드러운 물이 오랜 세월 거쳐서 그렇게 예쁘고 모가 전혀 나지 않은 조약돌을 만든 것입니다. 성령님이 바로 물과 같은 분입니다. 그분은 너무 부드러워서 거칠고 모난 우리 심령에도 들어가십니다. 도무지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은 곳에도 그 빈 곳을 찾아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 안에서 성령께서는 우리 심령의 모난 부분들을 부드럽게 갈고 굳은 마음은 제거하여 부드럽게 하고 계십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부드러운 사람들이 되어갑니다. 예전에는 매우 예민하고 불같았는데 이제는 매우 온유하고 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갑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요한이 있습니다. 요한은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이 붙을 정도로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길에 사마리아를 통과하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사마리아의 한 촌에서 예수님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일을 거부하자 요한과 그 형제 야고보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9:54) 성격이 불같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기록한 요한 서신들을 보면 그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요일4:7)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만을 외치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그를 온유한 사랑의 사람으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월을 통해서 사람을 온유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구약의 모세가 바로 이런 온유한 사람의 대표입니다. 민수기 12장 3절의 말씀입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민수기 12장에서 모세의 작은 흠을 가지고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던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했습니다. 이 일이 아내 십보라가 죽은 이후에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정말 모세가 잘못한 일인지 우리는 확인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이 기회를 이용해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합니다. 이런 비방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유하게 참습니다. 이런 모습에서 성경은 모세가 온유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온유함으로 참자 대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위해서 일하시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미리암과 아론을 불러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민12:8) 모세는 여호와의 충성스러운 종으로 하나님을 대면하여 볼 정도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의 지도력을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한 벌로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리게 합니다. 그런데 온유한 사람 모세는 이 때도 자기를 험담한 미리암을 위해 고쳐주시길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이 덕분에 미리암은 문둥병에서 용서를 받습니다. 

모세가 온유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요? 저는 두 가지라 생각합니다. 하나는 세월입니다. 모세는 미디안 목자로서 40년의 세월을 보내면 인간의 무력함을 깨달았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졌습니다. 사람이 온유해지지 않는 이유는 자기 생각이나 기대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자로서의 40년 동안 모세는 자기는 nothing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가 마치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여기는 교만이 그 안에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이 모세의 강함과 고집을 꺾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연단하시되 시간을 통해서 연단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베드로전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5-6) 모세가 온유함으로 인내하자 하나님께서 대신 모세를 위해서 싸우셨습니다. 온유함은 하나님의 능하신 손에 일의 결국을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회

우리 사회는 강한 것을 숭상하는 사회입니다. 권력, 물질, 숫자를 최고로 생각합니다. 이것들은 한정되어 있고 서로 차지하려보니 사회가 갈수록 사나워집니다. 말도 갈수록 거칠어집니다. 일단 큰소리를 쳐야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저는 TV 토론회 같은 것을 잘 보지 못합니다. 부드럽고 이성적인 대화보다는 대부분 거칠고 상대방을 비방하는 태도도 일관하기 때문입니다. 가벼운 접촉 사고가 나도 먼저 삿대질을 하고 큰소리를 치고 봅니다. 직장에서도 좀 까칠한 모습을 보여야 자신을 만만히 보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인터넷의 언어폭력은 그 도를 넘었습니다. 인터넷 댓글은 아예 보지 않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

부드러움은 여성의 특성입니다. 그런데 요즘 여성들도 그 부드러움을 버리고 강함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나운 여성들이 많아졌습니다. 여성들이 사회나 정계에 많이 진출하면 분위기가 부드러워질 것 같았는데 반대로 남성들의 못된 강함을 그대로 닮아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의 목소리가 좀 낮아졌으면 합니다. 쉽게 흥분하기보다는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한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약자와 낙오자에 대해서, 또 자신이 반대하는 사람에 대해서 좀 여유 있게 지켜볼 수 있는 온유한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는 말들이 온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데 있습니다. 말은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을 드러내는 수단입니다. 말이 거칠다는 것은 마음이 거칠다는 것과 같습니다. 잠언서 말씀입니다. “온순한 혀는 곧 생명 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잠15:4)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따뜻한 말은 생명나무와 같지만, 가시 돋힌 말은 마음을 상하게 한다.” 말이 부드러우며 다른 사람을 살리고 자신도 살립니다. 그러나 말이 거칠면 다른 사람을 죽입니다. 칼로 벤 상처는 곧 아물지만 말로 벤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습니다. 고대 현인들의 말에 대한 교훈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말이 참 말인가?’ ‘이 말이 필요한 말인가?’ ‘이 말이 친절한 말인가?’ 이 세 개의 문을 통과하거든 마음껏 말하라” 온유한 사람은 무엇보다 말이 온유합니다. 말이 친절합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온유함으로 대해야 합니다. 자녀를 대하여서도 온유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온유함은 부모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낳았고, 내가 번 돈으로 먹고 자고 공부하니 내 말 들어야 한다는 식의 태도는 온유가 아닙니다. 자녀 쪽에서는 자기가 힘이 없어서 당하는 것처럼 부당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의 키 높이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말이 그대로 수용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욥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이 온유입니다. 먼지만도 못한 한 인간에게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기를 낮추시고 욥에게 말을 걸고 욥을 설득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온유입니다. 

온유함은 부부간에도 필요합니다. 부부간의 온유는 상대방이라는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가 모났건 자기 이상과 맞지 않건 그대로 받아주는 것입니다. 부부는 둘이 만나 하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셋을 이루는 것입니다. 같지 않은 둘을 억지로 하나로 만드는 것은 폭력이고 그 때문에 부부관계가 깨지고 맙니다. 셋은 무엇입니까? 원래 남자와 여자 각각의 삶이 하나씩 둘입니다. 셋은 둘이 공통적으로 만들어가는 ‘우리’라는 교집합 부분입니다. 부부관계는 이 교집합 부분을 차츰 확대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인간은 변하지 않는 자기라는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아래 사람에게도 온유해야 합니다. 늘 깐깐하게만 보여 그 앞에만 가면 주눅 들게 만드는 것은 좋은 인간관계가 아닙니다. 아래 사람과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부드럽게 대하면 사람을 만만히 보고 기어오른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권위를 부리고 가끔 심술을 부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온유한 사람은 상대방을 편안하게 만들면서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는 위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를 친구처럼 대해주시는 온유함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 앞에 마음 문을 열었습니다. 또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딛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이처럼 온유함으로 사람을 살리고 자신을 살리고 모두가 행복한 인생을 만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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