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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고후 7: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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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고후 7:9-11)


여러분 자다가 혹시 가위에 눌려본 적이 있습니까? 스트레스를 받거나 무언가에 쫓길 때 악몽에 시달리면서 숨이 막히고 발버둥을 쳐도 몸은 꼼짝도 않고 참 답답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고통에 시달리는데도 유감스럽게 이 가위란 놈은 정신신경과에서도 치료가 어렵답니다. 내분비계통의 내과의학에서 꾸준히 연구를 하고 있지만 여태까지 치료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답니다. 심지어 동의보감에도 다른 비책은 다 있어도 가위 눌린 것에 대한 해답은 없다고 하네요. 

그런데 그 가위 눌린 것을 해결하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우선 가위 눌리는 사람은 잠들기 전에 반드시 찬 물을 한 잔 마시고 엎드리지 말고 반듯이 누워야합니다. 그리고 두 주먹을 꼭 쥐고 가슴에 올린 채 잠들면 됩니다. 여기서 마지막까지 주먹을 꼭 쥐는데 핵심이 있습니다. 가위에는 바로.........주먹 아닙니까? 여러분, 주먹을 쥐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내 손안에 들어옵니다. 

[존 F. 케네디]가 “세상에는 진실 된 것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님, 인간의 어리석음, 그리고 웃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웃음이 가장 진실한 인간된 모습이라는 말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억지로 웃는 웃음은 표가 납니다. 이해하지 못한 웃음은 뭔가 어색합니다. 한 연구에 의하면 지성인일수록 웃을 준비가 잘 되어 있고 유머에 더 많이 감사한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머리가 좋아야 웃을 줄도 안다는 말입니다. 
어느 날 아들이 아빠에게 묻습니다. “아빠! 찹쌀떡 열 개가 있는데 그 가운데 세 개를 먹었거든요. 그러면 몇 개가 남아요?”,“그야 일곱이지.”,그러자 아들이 “틀렸어요. 아빠! 세 개가 남잖아요.”, “아니, 어째서?”, “왜 어른들이 먹는 게 남는 거라잖아요.” 여러분, 유머에 민감한 지성인이 됩시다. 

지금 우리나라 미혼 남녀들에게 물었습니다. “결혼 상대자로 어떤 사람을 원하는가?”이 질문에 남자는 교사인 여자를, 여자는 공무원인 남자를 각각 원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 부모들에게 물어봅니다. “당신의 자녀가 장차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까?” 당연한 교사나 공무원이라는 대답이 나오겠지요. 그 외에도 약사, 의사, 판검사가 되길 원한다고 대답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인기 직업들입니다. 역시 우리나라 국민성은 현실에 민감합니다. 

자녀들의 삶에도 먹고 사는 문제에 배고파합니다. 그래서 소위 돈 잘 버는 직업위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런 기대들과는 달리 서양의 부모들은 좀 색다른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웃음을 잃지 않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현실의 문제에 급급한 우리들과는 달리 정서적인 문제, 인격적인 문제에 소망을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맥아더] 장군의 유명한<자녀를 위한 기도문>을 아실 것입니다. 거기에도 “웃음을 잃지 않게 도와주시며....”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참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새삼 해보게 되는데요. 사실 “웃음을 잃지 않게 해 달라.”는 속에 모든 게 다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너무 단면적인 생각만 가지고 살고, 저들은 포괄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진실한 웃음을 웃을 줄 안다는 것은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라는 세상노랫말이 아니라 정말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진실로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행복 그 자체입니다. 그러니“웃음을 잃지 않게 해 달라.”는 바람이 얼마나 가치 있는 소망입니까? 

실제로 우리들에게는 웃음이 없습니다. 웃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웃을 줄 몰라서 안 웃는 게 아닙니다.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근심과 걱정과 염려가 커서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다보니 미래에 대한 웃음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간혹 팔자니 운명이니 하는 말을 믿으며 미래를 결정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 운명대로 팔자 사납게 살아야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만약에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버린 것이라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무의미한 것입니까? 기대도 소망도 노력도 필요 없이 그야말로 근심과 걱정과 염려 속에 살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생각과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좋은 미래, 밝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운명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아무런 노력도 밝은 생각도 없이 산다면 어두운 미래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다양합니다. 영광된 미래가 있고, 비참한 미래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두운 미래가 있는가 하면, 밝고 아름다운 미래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중간쯤 되는 미래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미래 중에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미래를 성취해 나가려고 하는 노력이 어떠냐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동기와 자세에 의해서 3등급으로 나눕니다. 3등급은 <과거에 매여 현재에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미 행한 자기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기 위해서 만부득이 살고 싶지 않은 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불가(佛家)에서는 <업보(業報)>라는 말을 합니다. 자신의 생애 안에서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불가(佛家)에서는 아주 전생까지 올라가서 그때에 한 행위에 의해서 오늘 그 값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업보(業報)>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어쨌든 과거에 매여서 과거에 잘못된 것을 뉘우치고 지우고 싶어 하지만 사실이지 그렇다고 지워집니까? 그래서 평생 못 지운 과거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하며 한평생을 마치는 유감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2등급은 <미래에 매달려 사는 사람>입니다. 오로지 미래만 기대합니다. 현실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반드시 열매가 있을 것이라는 다소 허황된 마치 잡으려면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무지개와 같은 것에 매달립니다. 미래가 없는 현재도 문제지만 현재가 없는 미래도 문제입니다. 막연하게 앞날을 위해서 오늘은 고생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그래서 고진감래(苦盡甘來)니, 와신상담(臥薪嘗膽)이니 하면서 스스로 최면에 빠져 삽니다. 근심도 하고, 걱정도 합니다. 염려에 매여 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대한 깊은 의미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막연한 미래에 대한 치러야 할 액땜이라고 여깁니다. 이 2등급 인생 또한 어지간히 힘든 인생입니다. 

그러면 1등급 인생은 어떤 인생일까요?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이 가난도 좋고, 지지리 궁상도 만족한다.” 는 식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현재에 대한 만족이란 그 충족의 노력이 있는 만족을 의미합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땀 흘리고 이루어 놓은 현실에 대해서 “지금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나아가서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현실이 반복된다면 영원히 행복한 것입니다. 

여러분, 한평생 살아온 가운데 오늘이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이 가장 만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쩌면 오늘을 위하여 나는 한평생을 살아왔다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1등급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늘 만족하고 언제나 행복한 삶에 무슨 근심이 있으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걱정과 근심이란 이렇게 살지 못했기 때문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1등급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근심과 걱정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까? 걱정도 근심도 없는 삶을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왜 걱정이 없고 근심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선별할 줄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해야 할 근심과 하지 말아야할 걱정은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하지 말아야 할 근심이 있는가하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해야 할 근심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은<세상 근심>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구분지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의 근심의 결과는 명백합니다. 무엇입니까? <세상 근심>의 결과는 사망을 이루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해야 할 근심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까봐, 죄 용서 받지 못할 까봐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십자가의 크신 은혜로, 그 피의 공로로 이미 죄 사함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형벌이 두렵고 지옥이 무서워서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에 가기는 가지만 그분 앞에 섰을 때에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어서 걱정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후회할 것이 많게 살았습니다. 지나친 욕심 때문에 많은 유익한 것들을 잃고 살았습니다. 헛된 명예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잃었습니다. 빗나간 물욕 때문에 성도답게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살았던 내 모습이 있습니다. 그 모습들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쳐야겠다고 하면서 요리조리 핑계하고 빠진 것,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게으름 피운 것들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근심해야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오늘 우리가 적극적으로 해야 할 근심이 바로 이 근심입니다.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임을 깨닫고 그에 대해 전심으로 애통해 하며 어떻게 하면 다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가운데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날마다 하는 근심입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근심하지 않고 살수는 없습니다. 살아 있는 한은 근심하고 걱정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근심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무엇에 근심하느냐하는 문제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망에 이르기도 하고, 구원에 이르게도 하는 근심 중에 무엇이 중요한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차피 근심해야할 인생이라면 차라리 열심히 걱정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세상근심이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걱정으로부터 오히려 자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근심은 부작용 투성입니다. 머리도 아프고 위도 아프고.....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도, 부작용도 없습니다. 아니 할수록 나에게 유익이 되는 근심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근심 속에 사십니까? 이제부터라도 정말 근심해야할 것을 근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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