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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높이 날아오르십시오 (사 40: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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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날아오르십시오 (사 40:27-31)
  

<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십시오 >   

1997년 2월 28일, 누님으로부터 갑자기 대학생이던 조카가 경기로 쓰러져서 기도해달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처음에는 그 문제를 크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조카는 더욱 심한 경기로 혼수상태에서 빠져 인천 길병원에 급히 입원했습니다.  

입원 다음 날, 주일예배 후에 병원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의사 선생님이 병실 출입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병원 로비에서 기도하면서 조카의 상태가 매우 위중함을 깨달았습니다. 그 뒤 조카는 언어능력을 상실했고 거의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때부터 조카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개척교회를 할 때 많은 도움을 준 누님의 딸입니다. 그 일을 기억하시고 조카를 낫게 하소서!” 

1997년 3월 18일, 3주째 조카는 혼수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심신이 지친 누님은 돈도 싫고, 약국도 싫고, 아무 것도 하기 싫고, 아무런 사는 낙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누님을 위로했습니다. “누님! 하나님이 반드시 일으켜주실 겁니다. 마음 편히 가지세요.” 그러나 그 위로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1997년 3월 28일, 조카는 더 나은 치료를 위해 삼성의료원 특실로 옮겼습니다. 그때 삼성의료원 특실의 하루 병원비가 40만원이었는데 지금 돈으로 백만 원이 넘는 돈입니다. 그때서야 누님이 온전한 십일조를 못하고 매달 십만 원만 십일조로 드렸는데 그것이 돈 버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십일조를 제대로 못 드린 것이 그렇게 후회된다면서 몇 번이나 자신이 인색했다고 탄식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힘써 모은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때로는 잠깐의 운전 실수로 10년 동안 어렵게 장만한 집 한 채를 날립니다. 내가 돈을 충성스럽게 움켜줘도 돈은 내게 충성스럽게 있어주지 않고 기회만 되면 어느새 다른 연인을 찾아 매정하게 나를 버리고 떠납니다. 그처럼 내 곁에 영원히 있어 주지도 않으면서 그토록 믿음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돈입니다. 그래서 스펄전은 말했습니다.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는 회개를 누가 믿겠는가?”  

1997년 5월 6일, 삼성의료원에 입원한지 40일이 지났지만 병세는 여전했고 수많은 검사와 신종치료법을 다 동원해도 원인조차 못 밝혔습니다. 의사 선생님들은 병자에게 충격이 된다고 여전히 모든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고 심지어는 삼촌 목사가 기도해주는 기회까지 막았습니다. 그때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누님! 이제 의사 선생님의 손길도 떠났으니 퇴원시키고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그러나 누님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1997년 5월 14일, 병원비 문제로 강남의 다른 종합병원으로 옮기려고 누님 부부가 그 병원의 정신병동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시설이 너무 차이가 나서 마음이 아파 도저히 병원을 옮길 수 없다면서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돈을 생각하면 빨리 옮기고 싶고 딸을 생각하면 도저히 옮길 수 없었습니다. 

그날 억수같이 비가 내렸는데 병원을 나서면서 누님이 매형에게 그냥 비를 맞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30분 동안 두 부부가 병원 후문 계단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그냥 비를 맞았습니다. 그제야 딸에 대한 미안함과 슬픔이 조금 가라앉았다는 말을 듣고 나도 눈물이 나왔습니다. 항상 자신만만하게 살던 누님이 그렇게 약해질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자신만만’은 주님만 믿는 ‘주(主)신만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1997년 5월 17일, 거의 3개월 만에 조카를 잠시 집에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상태를 보며 토요일마다 데려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때 같이 예배드리고 기도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주관 하에 가족과 친지들이 함께 간절히 예배를 드렸는데 그 첫 예배 때 읽었던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이 말씀을 통해 믿음을 도전한 후 모두가 간절히 조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1997년 5월 25일, 조카를 향한 우리의 지극한 정성에 감명 받고 드디어 매형이 다니다말다 하던 큰 교회를 떠나 매주 우리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래 처남의 말을 주의 종의 말로 존중하며 들었습니다. 그때 매형의 순수한 신앙을 보면서 “희망이 보인다!”고 생각했습니다.

1997년 5월 28일, 병원에 있을 때보다 집에 있을 때 상태가 조금 호전되는 것 같아서 집에서 요양하기로 하고 병원에서 퇴원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조카는 혼수상태였고 가끔 발작을 일으켜서 가족들의 심적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가족과 친지들의 몸과 마음도 지쳐갔습니다.

1997년 6월 15일, 주일예배 때 강단에서 보니까 매형이 찬양하면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그 눈물을 보면서 곧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누님이 한 남자 약사와 대화중에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의 아들이 배가 아프다고 호소한 후 정신이 혼미해져서 약 20일간 미친 듯이 집안을 헤집고 다녔는데 20일 후에 소화제를 먹고 나서부터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얘기였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그날 누님은 조카에게 백 원짜리 소화제 두 알을 먹였습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지난 4개월간 1시간 이상 못 자던 조카가 그때부터 18시간을 내리 잤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급히 누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깨어난 후 조카가 어떻게 될까 초조하게 기다렸는데 깨어난 후 잠깐 식사하더니 또 다시 12시간을 내리 잤습니다. 그때부터 조카가 정상적으로 잠을 자면서 점점 상태가 좋아졌습니다.  

1997년 7월 17일, 기도원에서 금식 7일째 되는 날, 다른 기도제목은 다 응답을 받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조카는요?” 그때 지극한 평안과 함께 마음속에 이런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염려하지 말라.” 

1997년 8월 3일, 주일예배 중에 이런 말씀을 전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7년 동안 기억상실 상태에서 짐승처럼 지내다가 7년 후에 하늘을 우러러 보아 총명을 회복했는데 조카는 7년이 아닌 7개월 만에 총명이 돌아올 것이란 믿음을 가지자고 도전했습니다. 그때 매형이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997년 9월 말, 조카가 정말 7개월 만에 과거의 기억을 거의 회복했습니다. 그 후 1998년 1월 초에 영어 회화 반에 등록하며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했고, 1998년 1월 말 구정 때는 조카한테 세배를 받으면서 정말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좋은 남편을 만나 결혼해서 지금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2가지 큰 교훈을 주었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연약성’입니다. 처음에 조카가 심한 복통으로 경기(驚氣)를 일으켰는데 병원에서는 경기를 억제하는 간질병 약을 썼습니다. 그 약 부작용으로 정신이 혼미해지자 병원에서는 다시 안정제와 수면제를 썼습니다. 그 약 부작용으로 손이 떨리는 파킨슨씨병 증상이 생기자 병원에서는 또 파킨슨씨병 약을 썼습니다. 그런 계속된 약 부작용으로 결국 식물인간처럼 된 것입니다. 2백 원짜리 소화제면 해결될 일을 3개월에 1억 원 이상을 쏟아 붓고 안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실상입니다.  

또 한 가지 얻은 교훈은 바로 ‘기도의 능력’입니다. 그때 조카의 치유는 2백 원짜리 소화제 때문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이 눈물의 기도를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성도의 진실한 예배와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 여호와를 앙망하십시오 >   

본문 31절 말씀을 보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듣기만 해도 힘이 솟구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1. 하나님을 알라는 말  

본문 2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말씀처럼 사람들은 가끔 어려운 일을 당하면 이렇게 탄식합니다. “하나님! 왜 제 사정과 원통한 일을 외면하십니까?” 그러나 그런 답답한 말을 하기 전에 자신의 예배생활과 기도생활과 교회생활을 먼저 성찰해보아야 합니다. 그런 탄식에 하나님도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28절 말씀에서 “너는 아직도 모르느냐? 아직도 못 들었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을 확실히 알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알려고 하십시오. 그러나 지식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knowing about God)’과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knowing God)’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알 때 지식적으로 알지 말고 인격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미국의 한 자살자의 자동차 번호판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습니다. “Jesus is the answer(예수님이 해답이다).” 그런 지식적인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그때부터 복된 역전 인생이 펼쳐집니다.   

1970년, 한 17세의 백인 소녀가 실수로 임신했습니다. 상대 남자는 흑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낙태를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집에서도 낙태하든지 아니면 집을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흑인 남자는 도망가 버렸고 자신도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길에서 한 부인을 만났습니다. 그 부인은 그녀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고 아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하나님도 잘 몰랐고 기도할 줄도 몰랐지만 그냥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아들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의 일에 써주소서.” 그 아들이 자라면서 놀라운 음악적인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아픔과 상처를 노래로 승화시키고 복음성가를 만들면서 예배를 도왔습니다. 그가 미국에서 찬양 인도자로 유명한 이스라엘 휴톤(Israel Houghton)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면 삶은 달라지고 축복의 지경도 넓혀집니다. 그러므로 매일 하나님을 붙잡고 더욱 큰 은혜와 축복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축복을 원하는 것은 이기적인 기복주의가 아닙니다. 축복만 원하는 것이 이기적인 기복주의입니다. 더 축복받고 더 헌신하면 됩니다. 이제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큰 축복을 예비하며 사십시오. 
  

2. 하나님께 다 맡기라는 말  

본문 28절 말씀을 보면 창조주 하나님은 지금도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않고 창조물을 하나도 빠짐없이 돌보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얼마나 더욱 잘 돌봐주시겠습니까?  

또한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해주신다고 했습니다(29절). 그처럼 하나님은 고통과 아픔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가까이 찾아와주십니다. 자녀가 울면 부모가 즉시 달려오듯이 우리가 눈물로 기도하면 하나님도 즉시 우리에게 달려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위기는 언제나 하나님의 기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 인생을 자신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30절). 그러므로 열심히 땀을 흘리되 일의 결과와 미래는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가끔 사방이 막히는 절망적인 상황을 당해도 하나님이 달아주신 독수리 날개로 높이 날아오르고 어떤 상황에도 결코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조만간 반드시 축복의 때는 오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말  

어떤 대상을 계속 바라보면 그 바라보는 대상이 점점 확대됩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계속 바라보면 하나님이 크게 보이면서 미운 사람이나 어려운 문제는 점점 작게 보이게 됩니다. 그처럼 자신의 약점과 실패와 고통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말씀에 약속된 축복을 바라보십시오. 살면서 어떤 면을 바라보기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모습은 현저히 달라집니다. 밝은 면을 바라보면 삶이 밝아지지만 어둔 면을 바라보면 어둠이 확대됩니다.  

어느 날, 남편이 밤에 늦게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보니까 남편 옷에서 카바레 전단지가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떤 전화가 와서 받았는데 갑자기 끊어집니다. 그러니까 의심이 더욱 커집니다. 그처럼 계속 의심하니까 점점 남편이 미워지다가 나중에는 여자의 직감은 못 속인다면서 아예 직감을 믿습니다. 

그런 망상을 주의하십시오. 망상을 환상과 계시로 생각하는 교만이 가정을 망치고 이단을 만듭니다. 이제 나쁜 생각을 버리고 실패와 약점과 상처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성도가 계속 바라보고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계속 바라보면 하나님이 그 영혼과 생각의 주인이 되어주시고 그때부터 선한 변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 높이 날아오르십시오 >   

살다 보면 시련을 겪을 때도 있지만 그때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면 그 시련조차 축복의 밑거름이 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13년 동안 무수한 환난을 이유 없이 당했지만 변함없이 신실했습니다. 언젠가는 자기 때가 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으면 어떻게 축복받지 못하겠습니까? 결국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상황이 절망적이어서 사람 생각으로는 끝인 것 같아도 하나님이 끝이 아니라고 하면 끝이 아닙니다. 믿음과 희망만 잃지 않으면 절대적인 위기도 얼마든지 절대적인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든 상황이 펼쳐져도 끝까지 하나님만 붙들고 나가십시오. 그러면 문제와 질병과 시련의 때는 끝나고 조만간 응답과 치유와 축복의 때가 올 것입니다.  

이제 사람을 너무 의지하지도 말고 사람에게 너무 실망하지도 마십시오. 내가 도와준 사람이 배신해도 너무 상처받지 마십시오. 그들이 꼭 내 곁에 있어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떠나도 믿음을 잃지 않으면 하나님이 반드시 더 좋은 사람을 붙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거룩한 커넥션을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적절한 때에 우리의 비전을 도울 사람을 만나게 하셔서 마침내 비전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어느 날, 산봉우리에서 독수리 새끼 한 마리가 둥지 밖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새끼를 지나가던 농부가 발견하고 자신의 칠면조 농장에서 칠면조와 함께 키웠습니다. 그러자 새끼 독수리는 자라면서 칠면조와 똑같이 행동했습니다. 칠면조처럼 곡식을 먹고 칠면조처럼 날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새끼 독수리가 커가면서 가끔 날개를 파닥이면 다른 칠면조들이 어떤 강력한 기운을 느끼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칠면조 우리에 강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때 독수리가 자신의 날개를 펴자 바람이 독수리의 날개에 부딪치면서 독수리가 두둥실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독수리 날개와 우리 천장이 부딪히면서 요란한 소리가 났습니다. 농부가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달려오면서 그 장면을 보고 중얼거렸습니다. “독수리야! 나는 네가 언제 네 참 모습을 알게 될지 참 궁금했단다. 너는 창공에서 날도록 창조된 독수리야!”   

곧 농부는 독수리를 처음 발견한 산봉우리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바람이 불 때 독수리를 놓아주었습니다. 그러자 독수리는 자신의 강한 날개를 펴고 높은 창공으로 솟아올라 마침내 자신의 원래 있어야 하는 창공의 세계로 돌아갔습니다.  

그처럼 성도는 영적으로 높이 치솟아 큰 꿈을 이루며 살도록 계획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과 비전도 없이 칠면조 우리에서 사는 것처럼 사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끔 성령의 바람을 느끼면 창공으로 날 것 같지만 시련을 만나면 다시 꿈과 비전을 잃고 “나는 칠면조에 불과하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창공으로 솟아올라 산봉우리 너머에 예비된 축복된 세계를 얻어 누리길 원합니다.

이제 칠면조 성도가 아닌 독수리 성도가 되십시오. 산봉우리 밖으로 나가면 편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모습에 안주하지만 용기 있게 산봉우리 밖으로 나가십시오. 지금 형편이 부족하고 상황이 안 좋고 나이가 들었어도 결코 거룩한 꿈과 비전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앞으로 놀라운 세계가 펼쳐지고 수많은 경이로운 일들이 이뤄지는 것을 반드시 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1991년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C&MA) 소속 목사로 한국에 C&MA를 만들고 좋은 선교사를 양성하겠다는 개척자의 비전을 가지고 귀국했습니다. 그처럼 큰 꿈과 비전을 가지고 귀국하면 하나님이 비전을 후원해줄 루디아를 즉각 만나게 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성공적인 유럽선교는 루디아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루디아는 금방 나타나지 않고 한국 사역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C&MA가 뭐냐?”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저의 선교연맹은 한국의 순복음 교회와 성결교회의 뿌리가 되는 건전한 복음주의 교단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한국에는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아서 유독 한국 성도들만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단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장로교나 감리교로 옮기라는 주변 사람들의 권고도 있었지만 그래도 한눈팔지 않고 저희 선교연맹을 알렸기에 지금은 저희 선교연맹이 좋은 교단으로 한국 기독교계에 꽤 많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지난 20년이 저희 선교연맹을 알리는 기간이었다면 이제는 교회가 조금 더 영향력이 있는 교회가 되어 한국 교회를 잘 섬기고 싶습니다. 현재 모습이 부족해도 얼마든지 그 비전을 이룰 수 있을 줄 믿습니다. 부흥한 교회를 보면 한 사람의 헌신이 부흥의 초석이 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한 사람이 역사적인 교회를 향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헌신하면 지금부터라도 얼마든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성경 66권 전권파일>과 <네트영어>는 하나님이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를 섬기라고 주신 역사적인 콘텐츠입니다. 그런 콘텐츠도 누군가 뜻있는 성도의 거룩한 비전과 만날 때만이 비로소 빛을 발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이뤄지는데 자신이 크게 쓰임 받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이 그 기도대로 응답해주실 줄 믿습니다.   

개척자의 길은 힘든 길입니다. 그것은 길이 없는 숲에서 나무를 하나씩 잘라가며 가야 하는 길입니다. 특히 불도저도 없이 맨 손으로 그 길을 만들어 가려면 더욱 힘듭니다. 그래도 필요하다면 누군가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면 가장 적절한 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비전을 도울 루디아도 만나게 해주고 불도저 및 필요한 물질도 주시고 마침내 폭발적인 부흥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가는 길이 역사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 현재의 모습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더 나은 복된 세계를 찾아 산봉우리 밖으로 나가십시오. 시련의 바람을 겁내지 말고 강한 날개를 길러 시련의 때에는 더욱 높이 날아오르십시오. 그처럼 큰 축복을 기대하며 개척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이제까지 있었던 가장 복된 일보다 더 복된 일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고, 만약 축복의 보상이 지연되면 자녀와 손자에게라도 축복이 곱빼기로 주어질 것입니다. 그런 축복을 믿고 나감으로 앞으로의 삶을 최상의 삶으로 만들어가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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