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늘의 왕 (단 4:1-37)

첨부 1


하늘의 왕 (단 4:1-37)


가끔 '사람이 짐승으로 변하게 되는 것'을 소재로 해서 만드는 영화들이 나옵니다.
옛날에 나타샤 킨스키라는 유명한 여배우를 무슨 표범 같은 맹수로 둔갑시키는 영화도 있었고, 마이클 제이 폭스 같은 유명한 남자배우도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늑대로 둔갑하는 영화가 나왔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특히 요즘 같이 컴퓨터 그래픽이 발달된 시대에 와서는, 사람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면서 늑대의 얼굴로 변화되는 장면이라든지 온 몸에 털이 나고 손톱이 길어지면서 짐승의 사지로 변해가는 장면이 정말 실감나게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영화를 선전하는 장면들을 잠시 보면서 '왜 사람들은 저런 황당하고 괴상한 스토리의 영화를 재미있다고 보는 것일까?'하는 궁금증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어쩌면 타락한 인간의 내면에는 '짐승의 모습'이 잠재해 있는 까닭에 그처럼 '짐승과 사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물론 사람이 정말 짐승으로 탈바꿈하는 일은 영화 속에서나 생길 수 있는 공상이지 현실적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짐승처럼 행동하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다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드문 예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자신을 어떤 짐승인 것처럼 착각하고 그 짐승의 흉내를 내는 병도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의학상 '낭광병'(lycanthropy)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정신병으로 정의된 것은 최근의 일이지만 그런 증상은 매우 오랜 옛날부터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느부갓네살 역시 바로 그런 진기한 병에 걸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33절에 보면 느부갓네살이 하나님께로부터 벌을 받아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의 발톱과 같았었다"고 했으며, 25절에 보면 이런 일이 "일곱 때" 동안 계속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그는 7년 동안 마치 짐승처럼 행동하는 병에 걸려 살았던 것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제국 바벨론의 통치자였던 느부갓네살이 도대체 어쩌다가 그런 병에 걸리게 되었던 것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것이 바로 '교만'이라는 죄 때문이었다고 명백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절부터 3절에 보면 그 당사자였던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 제국 산하의 모든 백성에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아예 "조서"를 내려서 알려 주었습니다.
즉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따끔하게 한 대 맞은 경험을 자신의 신민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간증'을 했던 셈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그 느부갓네살 왕이 당한 일을 통하여 '교만'이라는 죄가 어떻게 생기고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자수성가(自手成家)의 성취감'에 빠지면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본문 4절로 9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4나 느부갓네살이 내 집에 편히 있으며 내 궁에서 평강할 때에 5한 꿈을 꾸고 그로 인하여 두려워하였으되 곧 내 침상에서 생각하는 것과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을 인하여 번민하였었노라 6이러므로 내가 명을 내려 바벨론 모든 박사를 내 앞으로 불러다가 그 꿈의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매 7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가 들어왔기로 내가 그 꿈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나 그들이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지 못하였느니라 8그 후에 다니엘이 내 앞에 들어 왔으니 그는 내 신의 이름을 좇아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자요 그의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라 내가 그에게 꿈을 고하여 가로되 9박수장 벨드사살아 네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은즉 아무 은밀한 것이라도 네게는 어려울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아노니 내 꿈에 본 이상의 해석을 내게 고하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꿈'하면 '금신상의 꿈'이 가장 유명하지만 사실 그는 또 하나의 이상한 꿈을 꾸고 그것을 해석하지 못해서 고민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여기 기록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때를 가리켜 느부갓네살 왕이 스스로 밝히기를 "내가 내 집에 편히 있으며 내 궁에서 평강할 때에"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이 꿈을 꿀 당시 바벨론은 거듭된 전쟁에서 연승을 거두고 있었으며 제국의 판도는 확장일로에 있는 등 그야말로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중이었습니다.
그 결과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의 화려한 '궁전'에서 아무 근심거리 없이 지극히 '평강'한 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그 '평안한 침상'에서 그처럼 '편안히 즐기고 있던 뇌 속'에 그의 교만을 경고하는 "이상"을 내려 주셨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그 꿈으로 인하여 "두려워하고" "번민하게" 되었다고 했으니 뭔가 '불길한 꿈'이라는 느낌은 들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스스로는 그 꿈의 정확한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바벨론의 "박사"와 "박수"와 "술객"과 "술사"와 "점장이"들은 아무도 그것을 해석하지 못했고, 느부갓네살 왕은 결국 이전처럼 다니엘을 다시 부르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의 꿈을 들은 다니엘은 "얼마 동안 놀라 벙벙하며 마음이 번민"(19절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꿈의 뜻을 알 수 없어서가 아니라, 정반대로 그 꿈이 얼마나 느부갓네살 왕에게 두려운 경고인지를 금세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꿈은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기를 원하며 그 해석은 왕의 대적에게 응하기를 원하나이다"(19절하)라고 충심으로 느부갓네살을 걱정해 주면서 그 꿈의 뜻을 풀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꾸었던 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첫 번째는 10절부터 12절에서 그가 다니엘에게 일러주었던 대로 '한 큰 나무'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다니엘이 그 꿈을 해석해 주는 장면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는데, 바로 20절부터 22절의 말씀에 "20왕의 보신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고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21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만하고 들짐승은 그 아래 거하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더라 하시오니 22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이는 왕이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창대하사 하늘에 닿으시며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심이니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다니엘의 해석의 요점은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서 본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땅의 중앙에 한 나무"를 보았다고 했는데 그것은 곧 '고대 근동 사회의 중심이었던 바벨론 제국의 최고 통치자'였던 느부갓네살 왕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고가 높은" 나무였지만 계속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나중에는 "고가 하늘에 닿아서 땅끝에서도 보일" 정도가 되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느부갓네살의 권세가 점점 더 높아지게 된 것을 가리킵니다. 

"그 잎사귀가 아름답다"는 것은 물론 느부갓네살 왕이 누리게 된 영화를 가리키며, "그 열매가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 만하고" "들짐승"과 "새"와 "무릇 혈기 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었다는 것은 그 자신이 제국 산하의 모든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공급자로 추앙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실로 느부갓네살 왕은 한 사람으로서 성취할 수 있는 일의 최대 최고 한도에까지 이르렀다 할 수 있는 인물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느부갓네살 왕의 교만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30절에서 그가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라고 자화자찬한 말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당대 최고의 제국을 건설하고 그 제국의 최고 통치자가 됨으로써, 자신의 명성은 '땅 끝에서도 보일' 정도가 되었고 제국 산하의 백성들은 물론이요 심지어 '들짐승과 새'까지도 자신의 주권 아래에 들어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자신이 온 세상을 한 손아귀에 쥐고 모든 사람들의 생사화복을 주장하고 있는 절대적 주권자가 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진짜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교만'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분명이 지혜로운 정치인이었고 능력 있는 군주였음에는 틀림없지만, 바로 그 지혜와 능력을 통해 이루어 놓은 업적에 대한 자기만족이 그로 하여금 일생일대의 중대한 죄에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 왕은 그런 교만이 얼마나 중한 죄인지를 다니엘을 통하여 경고를 받고서도 끝내 회개하지 않았고 그 결과 실로 비참한 처지에 빠지는 징벌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고 그 무언가를 성취해 내는 것은 정말 보람되고 또한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어쩌면 한 사람의 인생을 판단해 볼 때 그 사람의 '능력'과 '성취도'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잣대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것이 인물이나 출신 배경, 학력이나 재력 따위를 두고 사람을 서로 비교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공평하고 건전한 방법임에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인생을 그처럼 스스로 저울질해 보고 나름대로 만족할 만큼 성취한 것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나, 특히 아무 물려받은 재산이나 기득권 없이 그저 빈손으로 출발해서 순전히 자신의 노력과 수고만으로 큰 업적을 이루어낸 것에 대하여 긍지를 가지는 것 또한 정당한 일인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하나의 치명적인 함정이 있습니다.
사람 사이에서는 그런 식으로 판단해도 아무 탈 없다 할지라도 그런 자세를 하나님 앞에서까지 그대로 가지고 가면 그 '자부심과 긍지'라는 것이 바로 '교만'의 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이루어낸 성공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스스로의 힘'만으로 성취한 것이며 앞으로도 자기는 '하나님 없이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세는 사실상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는 존재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서도 이런 '자수성가의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학위를 받는 것은 참으로 칭찬받을 일입니다.
하지만 그 쌓은 지식이 스스로 하나님을 모른다고 선언하는 교만이 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해야만 합니다.
사람이 작은 사업을 시작해서 큰 기업으로 발전시키는 것 역시 무슨 박사 학위를 받거나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것 못지않게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바로 그 물질적인 성공이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게 만드는 가장 큰 위험요인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아도 나 혼자 넉넉히 성공할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오히려 내 마음대로 훨씬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나는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평안하게 잘 살 수 있다.' - 바로 이 현대사회에서 성공했다고 하는 오늘의 '느부갓네살 왕'들이 빠져 있는 대표적인 죄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능력과 성취'는 인생에 대한 개인적인 만족과 긍지를 위해서 또 인류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지만,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가장 위험한 '교만'의 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극히 조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게 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꾸었던 꿈의 후반부는 13절 이하 17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다니엘은 23절부터 27절에서 그것을 해석해 주기를 "23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고 멸하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두고 철과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 청초 가운데 있게 하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으로 더불어 그 분량을 같이 하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하더라 하시오니 

24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명정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25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26또 그들이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27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금 막 해석해 준 '큰 나무의 꿈'을 통한 하나님의 1차 경고에도 불구하고 느부갓네살 왕이 회개하지 않을 때에 그에게 임할 하나님의 징벌을 예언해 주는 내용입니다.
그 모든 장면은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오심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여기 '순찰자'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영어로 'watcher'라는 단어로서, '예의주시하고 부단히 감시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고유의 속성 중의 한 면을 강조하는 이름입니다. 
시편 121편 4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을 가리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24시간, 7주야, 일 년 열두 달, 365일 내내 눈 한 번 깜박하지 않고 이 세상의 모든 인생들과 사건들을 내려다보고 계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특히 그 하나님의 눈은 '사람의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시는 눈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런 하나님의 눈은 사람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이 '교만'이라는 죄를 그 언제, 그 어디에서도 정확하게 찾아내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 '순찰자'의 눈이 일단 교만을 포착하시면 그 '거룩하신 자'께서는 느부갓네살처럼 스스로 높은 줄만 알고 있는 "나무"를 "베고 멸하는" 심판을 여지없이 내리시게 됩니다.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두고 철과 놋줄로 동이고"라는 말씀에서 '철과 놋줄로 동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조금 해석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문맥에서 볼 때에 이 말씀은 비록 느부갓네살에게 큰 형벌이 내려지기는 하지만 그의 제국 자체가 완전히 망하지는 않을 것을 가리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실제로 느부갓네살이 '7년 동안의 한정적인 징벌'을 받은 후에 다시 권좌를 회복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34절 이하에서도 확인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징벌의 예언은 결국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게 되는데, 28절 이하 33절에 "28이 모든 일이 다 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느니라 29열두 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궁 지붕에서 거닐새 30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31이 말이 오히려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가로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32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니 33그 동시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었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로부터 그 '큰 나무의 꿈'의 해석과 함께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라는 간언을 받고도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지 "열두 달"이 지난 후에 그는 자기 궁전의 지붕을 거닐다가 그 바벨론 도성의 장엄한 광경에 스스로 도취했습니다.
  
특히 그 당시 느부갓네살 왕은 바벨론 도성에 새로운 신전, 성벽, 궁궐 등을 계속 신축했었고 그 대규모의 건축 프로젝트가 완성되었을 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것들이 보여 주는 장관을 바라보면서 "아, 순전히 나 혼자의 지혜와 능력이 이 엄청난 대제국 바벨론을 건설하지 않았나? 이 바벨론 제국이야말로 나의 명성과 영예를 하늘 꼭대기까지 이르게 하고 땅 끝까지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라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화자찬은 하나님께서 일 년 전에 그에게 내리셨던 경고를 그가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았음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었고, 그래서 그 말이 곧 그가 '7년 동안 짐승처럼 살게 되는 벌'을 받는 신호가 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느부갓네살 왕이 그의 통치 말기에 무슨 큰 병에 걸렸다든지 혹은 그 권좌에서 일시적으로 쫓겨났을 가능성을 암시해 주는 기록들을 몇 군데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두로를 포위하여 주전 573년에 비로소 함락시키기까지 8년 내지 9년이 걸렸는데 그 기간 중 약 7년 동안은 아무런 군사 작전이 시도되지 않았던 것이 한 예입니다.
또 역사가 유세비우스도 어떤 바벨론의 전승을 인용하면서 느부갓네살 왕이 어느 날 왕궁의 지붕 위에서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면서 그때부터 짐승과 같은 상태에 빠졌다는 기록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느부갓네살의 아들이 대신 왕으로 추대되었었는데 나중에 느부갓네살이 정신이 돌아온 후에 그 아들을 반역 도당의 주동으로 정죄하고 종신형에 처했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여튼 느부갓네살 왕이 그의 말년에 하나님께로부터 벌을 받아 그런 낭광병에 걸렸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 이후에 그가 정말 진실로 회개하고 중생 받았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비록 본문 34절부터 37절에서 그가 그 '7년 동안의 벌'이 끝난 후에 하나님을 "하늘의 왕"으로 높이면서 "찬양하고 존경"하였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참된 회개였는지 또 얼마나 오래 지속 되었는지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당한 일을 통하여 한 가지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만이란 죄에 대하여 실로 엄중하게 다스리신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138편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나 혼자서도 할 만하다.'라고 자신하고 '내 인생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도움 없이 나 혼자서 이룬 것이다.'라고 하는 교만은 이 '순찰자'의 눈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언 16장 18절의 말씀대로 바로 그 교만한 마음이 그대로 "패망의 선봉"이 됩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약 4:6) 하나님을 스스로 원수로 삼는 최고의 바보짓이요 최악의 신성모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만한 자가 포착이 되시면 그를 아예 '짐승의 위치'에까지 끌어내리심으로써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교만한 성공자'를 대하시는 방법은 '회개하는 죄인'을 대하실 때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사람이 자기의 못난 것, 약한 것, 더러운 것, 악한 것을 스스로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나아올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를 아예 못 보신 것처럼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사람이 자기가 잘난 줄 알고 강하다고 여기거나 자기 양심만으로도 '하늘을 우러러 아무 부끄러울 것 없이' 결백하게 살았다고 자부할 때에는 완전 딴판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교만이 그 어떤 사람의 그의 마음 구석 어디에 숨어 있든지 간에 당장 '순찰자의 눈'으로 적발해 내시고 따끔하게 징계하시고 그래도 끝내 회개하지 않으면 영벌의 지옥에 던지고야 마시는 것을 절대로 잊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왕을 그처럼 경고하시고 징벌하신 이유는 그로 하여금, 또한 오늘날의 우리로 하여금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오늘 본문에 세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행하시는 주권 - '교만'은 사람으로 하여금 바로 이 가장 중대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고백하지 못하게 만드는 죄인 것입니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특별한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으로 어두워진" 교만한 인생은 "하나님의 영광"을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리고 맙니다(롬 1:21-23).
사람이 겸손하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 '하늘 아버지의 양자', 더 나아가서 '주님과 영원히 동거하는 신부'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느부갓네살 왕'처럼 '하늘의 왕' 대신 자기를 더 높이는 교만한 자는 문자 그대로 '멸망하는 짐승'처럼 제일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 딴에는 '자기 혼자의 성실과 노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자신해도, 아무리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 없이도 충분히 선하고 의롭게 살 수 있다'고 자부해도, 저 '하늘의 왕', '지극히 거룩하신 순찰자'의 눈앞에서는 그것이 '교만'이라는 죄목으로 정확하게 잡히고 맙니다.
오로지 당신의 뜻대로 세상과 사람을 다스리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지식의 근본'을 꼭 깨닫고 끝까지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