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의 흔적 (갈 6:14-17)

첨부 1


예수의 흔적 (갈 6:14-17)


I. 교회의 생명 : 십자가

금붕어 키우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비실비실 죽어가는 금붕어 몇 마리를 다른 어항으로 옮겨서 산소를 쐬이고 영양을 공급하고 막대한 돈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친구가 “이보게 바보같은 사람아! 그 비실거리는 것 갖다 버리고 그 돈 가지고 금붕어를 사오면 백 마리는 사올 수 있겠다.” 그때 이 금붕어를 키우던 이 사람은 정색하고 대답합니다. “죽어 가는 금붕어 한 마리를 살릴 수 있는 열정과 애정이 없는 사람은 만 마리의 금붕어를 키울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게야.”

우리교회 성공의 사다리 첫 번째 단계는 Win - 영혼구원의 승리입니다. 
“한 영혼을 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댓가라도 지불한다”는 정신이 
 Win 승리의 정신입니다. 

한국교회가 한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기 위해 함께 몸부림 할 때! 교회의 생명이 회복될 것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십자가 신학입니다. 모든 성도들 가슴에서 십자가의 보혈이 살아서 꿈틀거리게 될 때 그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가 됩니다.

여러분, 양복점이나 양장점에 서 있는 마네킹을 보십시요. 코도 있고 입도 있고 손발도 멀쩡합니다. 우리보다 더 잘 생겼습니다. 그러나 말도 못하고 생각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왜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DNA가 없으면 껍데기만 남습니다. 형식만 남습니다. 교회 흉내만 내게 됩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예수님을 생각하고 십자가를 생각할 때 설레임이 있습니까? 가슴이 벅차 오르고 십자가를 전하고 싶은 끓는 마음이 있습니까? 감격이 있느냔 말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신앙의 생명을 상실한 것입니다. 

오래 예수를 믿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예수 없이, 십자가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전도하지 않아도 이제는 아무런 부담도 가책도 없어지고 맙니다.

지금 여러분의 신앙생활에서 활력과 감격을 잃었다면 틀림없이 영혼구원에 관심을 상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섬겨줍니다. 그래서 재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1년 2년 10년 예수를 믿고 나면 이제는 내가 누군가를 전도해서 섬겨주어야 사는 맛이 나고 신앙생활에 활력이 나타납니다. 

처음교회 나올 때는 건강을 얻기 위해 사업이 잘되기 위해 어린아이 같은 기도를 하면서도 재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예수를 믿고 나면 이제는 영적인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리더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섬겨 주고 교회에 힘껏 헌신함으로서 오는 보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침체가 옵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퇴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아들이 어릴 때 장로님댁에 갔다가 고양이를 보고 고양이를 가지고 싶어했습니다. 장로님이 “고양이 새끼 낳으면 한 마리 줄께.” 그래서 고양이가 새끼를 낳아 장로님이 한 마리 가져왔습니다. 또 어느날 장로님이 교회에 차를 타고 왔는데 그 차가 크고 좋아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때 제 차는 소형차였습니다. 우리 아들이 장로님께 “장로님, 이 자동차 새끼 언제 낳아요? 새끼 낳으면 우리 아빠한테 먼저 드리세요.” 장로님이 껄껄대고 웃으시더니 “그러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 25년이 다 되었는데 아직 그 자동차 새끼를 못 낳았는지 자동차 새끼를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왜요? 생명이 없으면 새끼를 낳지 못합니다. 

오늘 교회가 생명을 잃으면 불신자를 전도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십자가의 생명을 잃어버리면 전도의 열정을 상실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자랑은 십자가입니다. 성도의 자랑은 십자가를 전한 흔적입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보혈의 피가 끓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발에 십자가를 전하다 생긴 흔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입술에 십자가 보혈의 피가 묻어 있습니까?
여러분의 시간은 십자가를 전하는데 쓰여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얼마나 많은 재물이 십자가를 전하는데 쓰여지고 있습니까? 

II. 우리의 자랑 : 십자가 흔적

우리 모두 언젠가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내 제자라 확신할 수 있는 나의 흔적을 보여다오” 요구하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보여드리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흔적’이란 말은 원어로 ‘스티그마타’ ‘스티그마’입니다. 

‘흔적’이라는 말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옛날에는 노예가 많았지요. 노예에게는 물론 주인이 있었습니다. 도망가지 못하게 쇠사슬에 묶어 놓았습니다만 때로 이 노예가 도망을 갔습니다. 한번 도망갔다가 붙잡히면 주인 마음대로 죽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죽이면 주인에게 손해가 됩니다. 그때 노예의 몸에 문신을 합니다. 인두를 불에 달구어서 몸에 주인의 이름을 새겨 넣습니다. 

이제 그는 영원히 그 집의 노예입니다. 노예라고 하여 모두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예는 본디 팔 수도 있고 자유를 주어 내보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한테 양도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주인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한번 도망갔던 종은 영원한 낙인을 가지게 됩니다. 어디에 가도 인두로 새긴 낙인이 드러나서 절대로 도망가지 못합니다. 도망을 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늘 아래 어느 곳을 가도 아무개의 종이라는 표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티그마’ - 흔적입니다. 

흔적이 새겨지는 순간은 인권이 완전히 박탈당하는 순간이요 내 존재가 없어지는 순간입니다. 완전한 소유물, 영원한 소유물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부끄러운 흔적을 영광으로 받아들입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다. 나를 건드리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이요, 내가 하는 말이 곧 그리스도가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흔적을 자랑하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바울은 십자가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십자가의 관점에서 볼 때 자신이 지닌 고난의 흔적, 희생의 흔적이 영광스럽다는 말이지요.

여러분, 눈을 뜰 때마다 십자가가 보입니까? 내 눈에 때가 묻어 십자가가 안보입니까? 십자가를 쳐다보면 그 속에 내 모습이 보이고 내가 앞으로 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가 환히 보입니다. 숱한 죄에 시달리다가도 십자가만 쳐다보면 그 십자가로부터 내게 오는 빛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속에 엄청난 자유와 기쁨과 감격이 찾아옵니다. 온갖 문제가 얽히고 섥히다가도 십자가를 보변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만하면 제대로 헌신했지 싶다가도 십자가만 보면 부끄럽고 부족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종종 임종을 지켜봐야 할 때가 있습니다. 누구나 임종을 앞에 두고는 고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먹고 살 걱정이 아닙니다. 죽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남은 가솔들에 대한 아쉬움도 아니요 명예에 대한 걱정도 아닙니다. 임종의 고뇌는 바로 주님의 심판대 앞에 어떠한 모습으로 설 것인가 입니다. 

심판대와 나, 내가 일생동안 산 그 모습이 주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그 순간이 반드시 다가옵니다. 이 고통을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합니다마는 다 부질없습니다. 오직 하나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오직 이 한마디 뿐입니다. 십자가라는 말이 나오고 그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게 될 때, 얼굴이 비로소 환하게 밝아져옴을 보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14절)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2절) 하고 맹세한 사람입니다.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말하지 않기로, 결단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자랑이 무엇입니까? 본문에서의 자랑의 의미는 마음의 거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쁨의 근거를 말합니다. 내 마음에 기쁨이 있다면 보람과 긍지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자랑입니다. 그 근거를 말합니다. 모든 것보다 우선적인 것, 이것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희생할 수 있는 것, 가장 높은 가치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랑입니다. 

III. 예수의 흔적

여러분의 가슴 깊이 십자가에 대한 자랑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동안 자랑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십자가를 알게 된 후에 그 모든 자랑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모두 덧없는 것이요, 헛된 것이요, 해로운 것이 되었습니다. 분토와 같이 여겼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배설물? 할 때 갈비 먹은 것은 아까우니 놔두고 상추만 버리자? 그럴 때가 있습니까? 많이 버리면 버릴수록 시원한 것입니다. 왜요? 내가 얻은 새로운 가치관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예수가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십자가가 너무 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 하나 하나 신분을 가지고 살아가는게 너무 어마어마하고 영광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이 땅에 썩을 것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더라는 것이지요.

이제 다 내버리고 다 잊어버렸습니다. 남은 것은 오직 십자가, 십자가만을 자랑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내 육신 가운데서, 내 이력서 가운데서 나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나에게 죄사함을 가져다 준, 나에게 영원한 삶의 감격을 가져다 준, 나에게 삶의 구체적 변화를 가져다 준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십자가의 사건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설교의 왕자」라고 일컬어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펄젼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설교를 할 때 설교의 90%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오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날마다 들어도 마르지 아니할 감격의 샘터, 그것은 십자가 앞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향한 감격을 상실했다면 우리의 신앙은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보다 더 영광스런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죄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우리의 삶이 새로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게 오늘 문제가 있다면 사업이 실패한 그것도 아니고 명예를 잃어버린 그것도 아닙니다. 정말 문제인 것은 이 십자가의 감격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격이 사라진 그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율법적인 질문을 가져와서 나를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내가 지니기를 원하는 것은 예수의 흔적입니다. 나를 자유케 하신 그 분, 그리고 나에게 놀라운 생명을 가져다 주신 그 분, 그 그리스도의 흔적만을 나는 갖기를 원합니다.”

“내 언어 속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나타나길 원합니다. 
내 피 속에 예수님의 숨결이 뿜어나길 원합니다.
내 심장 속에 예수님의 고동이 맥박치기를 원합니다.
내 걸음걸이 속에 예수님이 걷기를 원합니다.
내 눈동자 속에 예수님의 사랑과 연민이 넘치기를 원합니다. 
나는 주님의 흔적을 갖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간증입니다. 이것이 오늘 그리스도인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IV. 흔적: 남은 고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주님의 위대한 명령을 감당할 수 있다면 어떤 댓가, 어떤 고난이라도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아픔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이라고 고백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괴로움을 기뻐한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말입니까?

이 짧은 구절의 말씀은 함축적이면서도 대단히 의미심장한 구절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명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무엇인가? 예수님께 무슨 남은 고난이 있는가? 이 남은 고난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를 구원하기에 불충분하다거나 불완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의 죽음은 인류를 구원하기에 완전하고도 충분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남은 고난이란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이 고난의 사실을 증거하는 복음전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로부터 모든 성도들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기뻐했습니다. 성도의 가장 위대한 기쁨은 주님의 위대한 명령을 감당하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적어도 성경의 전도자들에게 있어서 전도는 낭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 생명을 거는 모험이었습니다. 전도에는 엄청난 고난이 따랐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에 비유하여 남은 고난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첫째로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이 완전한 우리 구원의 도구가 되었듯이 남은 고난은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길이 됩니다. 
둘째는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현이 되었듯이 남은 고난의 분량은 예수를 향한 우리의 사랑의 표현이 됩니다.

남은 고난의 의미를 깨달으려면 우리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보상하시기 위해 실제로 어떤 고통을 견디어내셨던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둥에 두 손목이 묶인 채 매를 맞으셨습니다. 가혹한 몇 갈래의 채찍들은 납덩어리와 뼈 조각들을 끝에 매달고 있었습니다. 이 채찍으로 한번씩 내려칠 때마다 예수님의 등에는 검푸른 채찍 자국과 함께 뼈 조각 끝에 찢겨 피가 쏟아져 나오고 흐물거리는 살점이 묻어 나왔습니다. 이때 피부가 약한 사람들은 옆구리나 등쪽으로 창자가 흘러나왔다고 로마의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상처라기 보다는 차라리 망가져 버린 어깨 위에 십자가가 지워졌습니다. 로마의 관습에 따라 60kg이나 되는 십자가 기둥을 끌고 600m의 험악한 골고다 언덕을 올랐습니다. 쓰러질 때마다 상처가 터져 피가 흐르고 군인들이 휘두르는 채찍에 그리스도의 몸은 전율하며 거친 숨을 몰아쉬셨습니다. 그러다 기어코 예수님은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마침내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이 십자가 기둥이 지워졌던 것입니다. 왜 구레네라고 하는 지명을 성경이 밝히고 있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프리카에서 온 천한 사람을 들어 쓰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오늘도 예수께서는 구레네 사람처럼 천한 나를 통해 그의 남은 고난을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기쁘게 지던, 억지로 지던 예수의 십자가를 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일은 기쁨으로 하는 것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고 체면이나 위신 때문에 억지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분명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더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지금 정발산 언덕에 쓰러졌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께서 피투성이가 된 얼굴, 피로 엉겨 붙은 머리카락에 반쯤이나 가리워진 그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모두 삥 둘러서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때 두 주먹으로 눈물을 움켜쥐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지요. 주님, 내 비록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천한 몸이요 힘은 없으나, 그 십자가만은 제가 지고 가오리다”하고 나서시겠습니까? 아니면, “주님 그 십자가를 제가 져야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사업과 장사에 바쁘니 나중에 와서 지겠나이다”하고 핑계를 대시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골고다 언덕에 오른 예수님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완전히 발가벗기우게 됩니다. 성화에 보면 차마 예수님의 하체까지 벗길 수 없어 수건으로 가려 놓았습니다만, 로마 십자가 형은 사형수의 옷을 완전히 벗겨 수치를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고의 창피를 당하신 것입니다.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이요, 창조주께서 사악한 그 인간들 앞에서 완전 나체로 창피를 당했다는 사실을 상상해 보십시오. 

물론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처음에는 부끄러움도 느끼실 것입니다. 창피와 수치를 당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예수께서 나 때문에 당하신 그 창피와 수치와 비교 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예수를 부끄럽게 여기면 예수께서도 최후 심판 앞에서 나를 부끄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감당하다가 지닌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 그것은 천국의 면류관이요 영광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 몸에 짊어지고 있던 예수님의 흔적은 그가 예수님의 복음 때문에 받았던 핍박으로 말미암은 그의 육체적 상처와 마음의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4장 9절에 보면 실제로 그는 갈라디아 지방의 한 섬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은 후 죽는 줄로 여김을 받아 성 밖에 버려진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의 어깨에도 돌로 맞은 흉터가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2절 - 28절에 보면 그는 복음을 위해서 수없이 매를 맞았다고 증거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태장으로 세 번 맞았으며, 돌로 한번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의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했고, 잠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던 흔적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말할 것 없고 정신적으로 날마다 고통이 있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이 모든 것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자기의 몸과 마음에 그리스도의 충성스런 종의 흔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런 흔적을 자기 몸에 지님으로 그날에 주님을 영광스럽게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V. 당신의 삶에 어떤 흔적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최후의 날에 우리의 손을 만지시며 일한 흔적을 찾는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공산주의자들은 6.25때 많은 인사를 반동으로 몰아 죽였습니다. 
저들은 일하지 않는 자를 반동분자로 취급했습니다. 

목사님 한 분이 지역유지들과 같이 붙들려 창고에 갇혀 있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공산군이 후퇴하게 되었는데 밤중에 한 사람씩 끌어 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손바닥을 만져서 유지와 농민을 구별했습니다. 그래서 손바닥에 일한 흔적이 있으면 살려주고 일한 흔적이 없으면 반동분자로 몰아서 죽였습니다. 목사님은 마침 성전건축 공사장에 나가 일을 했기에 손바닥이 거칠었습니다. 인민군은 “동무는 무엇을 했나”하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큰 소리로 “목사 일을 했습니다” 하였더니 인민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목수 동무가 어찌 왔어 빨리 나가라”해서 살아 나왔다는 것입니다. 일한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주님께 소속된 종의 흔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들이나 핍박 속에서 믿음을 지킨 분들 같은 흔적은 남기지 못할 지라도 무릎꿇고 기도한 흔적은 있어야겠습니다. 우리의 얼굴에 눈물의 흔적이 있어야겠습니다. 우리의 손에 열심히 교회에 충성한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내게 주신 행복한 환경과 재물에 예수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을 위해 마음껏 사용했던 흔적 말입니다. 

우리는 인류의 최대의 영광스런 흔적을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존귀하신 몸에 인류는 잔인하게 상처를 냈습니다. 차마 그 얼굴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양을 잃었습니다. 이마는 가시에 찔린 흔적이요, 손과 발은 대못에 박힌 흉터였습니다. 그 옆구리에는 창에 찔린 큰 상처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상처를 부끄럽게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영광스런 흔적으로 그 몸에 남겨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을 때 그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부활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대신해서 저주를 받았다. 내 흉터는 율법의 저주에서 너희를 속량한 흔적이니 이제 너희에게는 저주와 죽음과 불행이 없어졌다”는 약속입니다. 

이제 다시 묻습니다. 
예수 우리 위한 이 엄청난 흔적을 가지셨는데 당신은 예수 위해 어떤 흔적을 가지셨는지요?

VI. 예수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이 너무 복잡해진 것이 오늘 신앙인의 위기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합니다. 예수 사건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앞을 봐도 예수, 뒤를 봐도 예수입니다. 옆을 봐도 위에서 내려다봐도 예수입니다. 속을 뒤집어 봐도 예수입니다. 예수 잃어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게 없는게 우리 기독교입니다. 

중세의 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었고 위대한 복음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무서운 질병으로 커다란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그 사람을 찾아가서 조용히 침묵하고 그 사람 곁에 그냥 앉아 있다 떠납니다. 그런데 병든 사람의 병이 낫습니다. 문제가 해결됩니다. 한 가정에 커다란 어려움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그 가정에 가서 하루를 지내면서 아무 말 않고 그냥 앉아 있다가 떠나는데 그 집의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한 고을이 문제가 있다고 하면 언덕 위에 올라가 그 고을을 바라보고 조용히 침묵하고 몇날 며칠 있다가 떠납니다. 그런데 그 고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 사람으로부터 영성을 배우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아무런 가르침이 없습니다. 그냥 아침에 일어나 함께 가서 노동합니다. 밭을 일굽니다. 산을 가꿉니다. 그리고 해가 서산에 넘어갈 때가 되면 그늘 밑에 가서 침묵하기를 즐겨합니다. 기다리다 못해 제자들이 묻습니다. 그런데 모든 질문의 대답은 한마디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묻든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마디 대답 이외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들은 무엇을 믿느냐?  무엇 때문에 사느냐?  너희들은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냐?  너희들은 왜 그렇게 즐겁고 행복하냐?  이에 우린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입으로, 우리의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한국대학생선교회 고 김준곤 목사님은 젊은이들을 광장에 한데 모아 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외치도록 했습니다. 

우리도 찬양을 하다가 예수의 이름을 부를때 물밀듯이 감격이 밀려오지 않습니까? 제가 무엇이라고 묻든지 간에 당신은 크게 예수 그리스도라고 외치십시오.

이 나라를 어떻게 살릴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어떻게 살려낼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어떻게 부흥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내 인생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부흥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한국교회가 새로워지려면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어떻게 달라질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살아야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
어떻게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도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류영모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