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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러므로 겸손하십시오 (엡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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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겸손하십시오.

에베소서 4 : 1 - 3 (: 2aa)
: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10월 9일, 한글날입니다. 1446년에 세종대왕께서 우리글을 만들어 펴신 날을 기념하여 만든 뜻 깊은 날입니다.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올해로 565돌을 맞았습니다. 훈민정음이라 한 것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입니다. 훈민정음을 만들기 전, 우리글이 없이 중국 글자인 한자를 썼습니다. 하지만 한자는 배우기가 너무 어려워 그 뜻을 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를 가엽게 여긴 세종께서는 집현전의 여러 학자를 통하여 글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하여 생각을 적고 표현합니다.

신약성경은 대부분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헬라어는 당시의 세계어였습니다. 헬라어는 복음의 진리를 정확하게 기록하는데 적절한 언어였습니다. 헬라어는 성과 수와 격과 시제를 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글로 번역한 성경으로도 구원의 진리를 표현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다만 헬라어의 의미를 조금만 고려한다면 한글로 기록된 성경은 정말로 아름답고 훌륭한 성경입니다. 그러나 더 아름답고 훌륭한 성경은 우리가 읽는 성경입니다. 성경을 읽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국어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말을 바로 알고 바로 쓰는 것은 곧 나라를 사랑하는 길입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로 한글 성경을 읽는 신앙인입니다. 한글날을 맞으면서 한글로 기록된 성경을 열심히 읽어 한글도 사랑하고 신앙도 성장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가을에 성경을 펴서 읽으므로 나라도 사랑하고 신앙도 가꾸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의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에베소서 4장 1절 말씀입니다.
: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바울은 성도들에게 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권하였습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하고 그것을 원인으로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이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을 부르심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부르심을 입은 성도가 살아야 할 구체적인 덕목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겸손과 온유입니다. 그것은 오래 참음입니다. 그것은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첫 번째 덕목입니다.


I. 겸손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겸손’이라는 말은 많이 듣습니다. 과연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겸손이라는 말을 통하여 우리가 살아가야 할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서 ‘겸손[tapeinofrosuvnh/타페이놉흐로쉬네]’이라는 말은 그렇게 호감이 가는 말은 아닙니다. 이것은 본래 ‘마음의 굴욕감’을 나타냅니다. ‘자신의 작음에 대한 깊은 인식’입니다. 겸손은 자신의 부족과 무가치함을 깨닫고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자세입니다. 그래서 바울 당시에 ‘겸손’은 비열한 마음과 노예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결코 미덕이 아니었습니다. 1세기와 2세기의 세속적 헬라어 문학작품에서 겸손은 ‘나쁘게 생각하는 것, 마음이 약한 것, 비굴한 마음을 가지는 것’ 등의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결코 자유민의 덕목이 아니었습니다. 노예들이나 가져야 할 품위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1. 겸손은 인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겸손은 별로 인기 있는 덕목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을 내세우고 알리고 자랑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남을 깎아내리고 흠을 잡아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겸손은 이제 도덕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사라진 단어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을 낮추는 것, 다른 사람의 가치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뜻으로의 겸손은 바울 당시나 오늘날이나 썩 유쾌한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20장 19절 말씀입니다.
(행 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바울은 복음을 위한 자신의 발걸음을 ‘모든 겸손과 눈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시험을 참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조금 더 편하고, 조금 더 안락함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겸손은 걸림돌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어느 날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말이죠. 부모님과 나, 그리고 아이들이 물에 함께 빠졌다면 누구부터 구할 거예요?”

남편은 한참 생각 후에 부모님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아내는 속으로 화가 났지만 꾹 참고 다음은 당연히 나겠지 하고 다음은 누구냐고 물어보았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대답은 아이들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내는 왜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남편 왈, “아내는 다시 얻으면 되잖아!”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후부터 아내의 삶은 무기력해졌습니다. 급기야 우울증까지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정신과 병원을 찾았습니다. 이야기하는 내내 통곡하는 부인을 보고 있다가 이윽고 의사가 한마디 했습니다.

“부인, 그렇게 너무 상심하지 말고, 수영을 배워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진짜로 이런 경우 수영을 배워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아내가 그렇게 물어본 것은 나한테 더 잘해달라는 뜻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극단적으로 물어 볼 필요도 없고, 사실적으로 대답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더욱 직설적이고 극단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물에 빠졌을 때 누가 건져주기를 기대하기보다 수영을 배워서 독립적이 되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민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무시무시한 정글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먹히는 세상이기만 하다면 이미 사람이 사는 세상이 아니라 동물의 왕국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겸손은 결코 미덕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겸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그러므로’ 겸손하라고 말씀합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친히 낮아지는 모범을 통해 겸손의 미덕을 보여주셨습니다. 


2. 겸손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그러므로’ 겸손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므로’의 내용은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므로’ 겸손하여야 할 이유는 예수님께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 말씀입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여기에서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겸손입니다. 우리에게 겸손하라고 명령합니다. 예수님이 겸손하셨으니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겸손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겸손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범에 근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 위에서 값을 치루고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겸손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겸손하여야 합니다. 

에베소서 1장 7절 말씀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잘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기에 그러므로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은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노력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선물로 받은 사람입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선물을 주신 분에게 감사하여야 할 따름입니다. 선물을 받고나서 자신이 그런 선물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은 선물이 아니라 상급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구원은 상급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우리가 잘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풀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니 자격이 없는 자에게 은혜로 베풀어 주신 것을 받은 사람으로서 겸손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러므로’ 겸손하여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모시고 따르는 예수님은 겸손한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 나귀를 타셨습니다. 이를 성경은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마 21:5)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싸움터에서 군인들이 말을 타는 것처럼 하지 않으셨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겸손하게 나귀를 타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게 섬기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저 자신이 예수님을 닮아 겸손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자신이 겸손하여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하여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겸손 이전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3. 겸손은 자신을 향한 태도입니다.

겸손은 다른 모든 덕목과 마찬가지로 드러나 보이는 것보다 드러나 보이게 하는 숨은 마음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진정으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에 대하여 빌립보서 2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이 말씀에서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비우셨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예수님께 자신을 비우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예수님께 자신을 낮추라고 명령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십니다(빌 2:6). 

그런데 예수님은 굳이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과 같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도 여전히 하나님과 같은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자신을 고귀한 존재라고 생각하다가도 천한 일을 하게 되면 천한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게 되면 자신을 하찮은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고귀한 사람은 천한 일을 해도 고귀한 사람입니다. 천한 사람은 고귀한 일을 해도 천한 사람입니다.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보이는 대로 그 이상을 보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와 사랑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부르심에 함당하게 행하기 위하여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나 겸손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는 자신을 부르신 은혜를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기억하여야 합니다.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았음을 확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겸손하게 살려고 하는 것을 힘들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겸손하지 못하게 하려는 악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4. 겸손은 교만의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겸손의 문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오십니다. 우리가 겸손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더욱 성숙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탄은 교만의 문을 통해 들어옵니다. 사탄은 우리를 교만하도록 부추기고 그 교만을 통하여 우리를 지배합니다.

야고보서 4장 6절 말씀입니다.
(약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이것이 영적인 원리입니다. 이 영적인 원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 사탄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러 있기 못하도록 훼방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흩뜨려 놓으려고 사탄이 사용하는 방법이 교만입니다.

사막에서 오랜 시간을 수도하고 있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한 떼의 악마들이 수도사를 시험하여 넘어지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악마는 수도사 앞에 예쁜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육체적인 유혹하였습니다. 그러나 수도사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악마는 겁을 주어 공포심을 자극하였지만 수도사는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악마가 많은 금은보화로 유혹을 하였지만 사막에서 홀로 사는 수도사에게 재물은 유혹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때, 악마들의 우두머리인 사탄이 나섰습니다. 사탄은 수도사에게 가까이 가서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당신은 당신과 함께 공부하던 그 친구가 주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그러자 수도사의 평온하던 얼굴에 갑자기 질투심이 스쳤습니다. 그리고 수도사는 갑자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였습니다.

“아니, 나보다 변변치 못하던 그 친구가 주교가 되었다고? 그 친구가 주교가 되었다면 나는 교황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결국, 다른 사람의 성공을 부러워하는 시기심,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낫다고 여기는 교만이 그를 파괴하였습니다.

겸손이 자신을 향하는 태도라면 교만은 다른 사람을 향하는 태도입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받은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교만은 다른 사람이 받은 은혜를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결코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만은 분명히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참 겸손은 ‘나는 겸손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대단한 겸손은 ‘나는 교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최고의 교만은 ‘나는 교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구제불능의 교만은 ‘나는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렇다고 대단한 겸손임을 보이기 위하여 ‘나는 교만하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 겸손입니다(골 2:18).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결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고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더욱 묵묵히 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기 위하여 우리가 겸손하여야 할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합당하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걸맞은 행동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5. 겸손은 낮춤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어찌 단 한 마디로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겸손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낮춤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8절 말씀입니다.
(빌2: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의 겸손은 자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무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권한 사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Saint Augustine, 354~430)에게 어느 날 한 제자가 “선생님! 그리스도인들에게 최고의 덕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겸손이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제자가 다시 묻기를 “그러면 겸손의 반대는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교만이니라.”도 대답하였습니다.

제자가 또 다시 묻기를 “선생님 교만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어거스틴은 “나는 지극히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자신은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즉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성 베르나드가 가르쳐주는 겸손의 다섯 가지 덕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자기의 죄를 알아 비천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둘째, 내 죄를 통회하고 사실대로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여야 합니다. 셋째, 남이 내 결점을 알고 업신여김을 달게 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에서 오는 고난을 견딜 수 있어야 합니다. 넷째, 사람의 모욕을 참을 뿐 아니라 달게 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힘겹게 견디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하여야 합니다. 다섯째, 모든 전쟁과 공포를 하나님께 돌리고 내게 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 살아가는 일이 참으로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조용히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함으로써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겸손한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것은 자신을 낮추었을 때 빛나는 것입니다. 겸손은 상대를 먼저 배려하고 자신을 낮추므로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당시나 오늘이나 겸손은 그렇게 인기 있는 덕목이 아닙니다. 겸손은 오히려 힘없고 연약한 종의 태도입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은 겸손하지 못해도 겸손한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습니까! 더욱이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써 오히려 겸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겸손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와 겸손은 예수님을 닮은 것이자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평화를 누리기 원한다면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여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이미 행복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그러므로’하는 행하여야 할 권면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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