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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러므로 오래 참으십시오 (엡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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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오래 참으십시오 (엡 4:1-3)

에베소서 4 : 1 - 3 (: 2b)

: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에디바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남과 시비가 붙으면 자신의 작은 집 주위를 세 바퀴 돌았습니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에디바는 나이가 들어 땅도 넓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화가 나면 지팡이를 짚고 땅을 돌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손자가 물었습니다. 

“연세도 많으신데 계속 땅을 도는 이유가 뭐예요?”

“젊었을 때부터 다툼이 나거나 시비가 생기면 땅을 돌면서 자책했단다. 내 땅이 이렇게 작은데 남한테 화내고 싸울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말이야. 그러면 이내 화가 가라앉고, 온 열정을 일하는 데 쏟아 부을 수 있었지.”

손자가 또 물었습니다. 
“지금은 부자가 되셨잖아요. 이 부근에서 할아버지보다 더 넓은 땅을 가진 사람도 없고요. 그런데 왜 계속 땅을 도세요?”

에디바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화날 때가 있단다. 화가 나면 땅을 돌면서 생각하지. 내 집이 이렇게 크고 땅도 많은데 남들과 싸우는 게 무슨 소용인가 하고 말이야. 그러면 화가 가라앉는단다.”

에디바는 땅이 적을 때는 땅을 넓히기 위하여 화를 참았습니다. 땅이 넓어진 후에는 넓은 땅을 가졌다는 만족감으로 화를 참았습니다. 그는 작을 때도 참았고 넓어진 후에도 참았습니다.

우리는 자주자주 ‘그래도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가!’ 하면서 예배당 주위를 매일매일 돌아야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사랑, 그리고 성령님의 도장 찍어 주심으로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이기에 하늘에 속한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으니 그 불러주신 목적에 걸맞게 살아야 합니다(:1). 이것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의 유언과 같은 권면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2절 말씀입니다.
: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I. 겸손

부르심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첫 번째 모습은 겸손입니다. 겸손은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나를 낮추고 짓누르기 때문에 작아진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적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깔보고 무시한다고 해도 태연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겸손은 전혀 유쾌하지 않을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기에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II. 온유

부르심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두 번째 모습은 온유입니다. 온유는 겸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겸손이 자기 스스로 낮추는 것이라면 온유는 다른 사람 앞에서 낮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는 다른 사람에게 부드러움으로 나타납니다. 힘이 없고 능력이 없어서 힘 있고 능력 있는 사람 앞에서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힘이 없어서 힘 있는 사람 앞에서 낮추는 것은 비굴함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다른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온유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겸손과 온유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스스로 높아지려고 합니다. 인간적으로 거칠고 사납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그러므로’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에게 베풀어주셨음을 믿기에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능력 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겠다는 의지도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없는 일이 이루질 리 없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 번째 모습은 무엇입니까?


III. 오래 참음

2절 두 번째 구절 말씀입니다.
: 2b오래 참음으로 

‘오래 참음’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래 참음은 그야말로 오랫동안 참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잠시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얼마 동안은 온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겸손하고 온유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래 참음[makroqumiva/마크로뒤미아]’은 인내라는 말과 거의 같은 뜻입니다. 오래 참음과 인내는 전혀 다른 단어이지만 그 뜻은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오래 참음이 ‘체념, 감수, 강제적인 수락’을 의미합니다. 오래 참음은 고통을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어떤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고통을 참아 오랫동안 견디는 것입니다.

이제, 오래 참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말씀을 읽겠습니다.

골로새서 1장 11절 말씀입니다.
(골 1:11)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여기에서 사도는 교회가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는데 능해지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에서 견딤은 곧 오래 참음입니다. 시험이 와도 고통이 와도 어려움이 와도 견디는 것입니다. 시험, 고통, 어려움 등등이 같은 뜻의 말이듯이 오래 참음, 견딤, 인내가 같은 뜻의 말입니다.

1. 오래 참음은 견딤입니다.

우리가 자주 들은 말 중에 “참을 인(刃)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자로 참을 인자는 흔히 칼 도(刀)자 아래 마음 심(心)이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칼 도(刀)가 아니라 칼날 인(刃)자입니다. 그냥 칼이 아니라 시퍼렇게 날이 선 칼입니다. 그래서 참을 인(忍)자를 해석하자면 가슴에 날이 선 칼을 얹고 있다는 뜻입니다. 가만히 누워 있는데 시퍼런 칼이 내 가슴 위에 놓여 있습니다. 잘못 하다가는 가슴 위에 놓인 칼에 찔릴지도 모를 상황입니다. 상황이 이런데 누가 와서 짜증나게 건드린다고 뿌리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움직여봤자 나만 상하게 됩니다. 화나는 일이 생겨도, 감정이 밀어닥쳐도 죽은 듯이 가만히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참는 것입니다. 잠시 참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이것은 끝까지 견디는 오래 참음입니다.

몇 일전 아침에 들판에서 보았습니다. 올 가을 들어 가장 쌀쌀한 날이었습니다. 서리가 내려서 고구마 잎이 모두 얼어서 축 늘어졌습니다. 이것을 제가 자란 시골에서는 삶았다고 표현합니다. 자세히 보니 고구마 이파리는 삶았는데, 고추 이파리는 여전히 싱싱하였습니다. 고구마 잎이나 고추 잎이나 거의 동시에 어는 것으로 알았는데 이번 추위는 고구마 잎은 얼고 고추 잎은 얼지 않았습니다. 아주 작은 기온 차이가 있었습니다.

고구마 잎은 이번 추위를 못 견뎠고, 고추 잎은 견뎠습니다. 그 온도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작은 기온의 차이가 결과적으로 확연하게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차이는 그렇게 큰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는 차이는 우리의 삶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고통은 표시가 나지 않지만 그 결과는 확연합니다. 그래서 견디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삶의 고통을 잘 견디어내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견디어내는 오래 참음을 배울 수 있습니까?

디모데전서 1장 16절 말씀입니다.
(딤전 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이 전도자의 삶을 사는 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오래 참아 주심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오래 참는 모범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2. 오래 참음은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오래 참아 주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시면서 오래 참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의 본래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 주동이 되었습니다(행7:58). 사울은 교회를 이 땅에서 완전히 쓸어버리기 위하여 각 집까지 찾아 돌아다니면서 믿는 사람들을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습니다(행 8:3). 사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행 9:1). 아예 대제사장에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올 수 있는 허락을 받았습니다(행 9:2). 이렇게 교회를 박해하는 사울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9:4)

이것은 사울을 향한 예수님의 원망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은 마치 가시 채를 뒷발질하는 고생입니다. 사울이 이것을 모르는 것을 예수님은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사울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알고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박해하는 것은 자신을 위하여 저주를 쌓는다는 것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울에게 예수님은 참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그릇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은혜를 받고 깨닫고 보니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이라는 사도가 된 후,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라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대하여 오래 참으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에게 오래 참으신 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또한 오래 참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난 속에서도 오래 참는 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오래 참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모든 유명한 사람들은 오래 참음으로써 비로소 그 이름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래 참지 않고 무엇인가를 이룬 사람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름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을 얻기 위하여 참아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얻은 사람이기에 참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얻기 위하여 오래 참지만 그리스도인은 이미 얻었기 때문에 오래 참아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은 사울처럼 예수님께 못된 짓을 하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저 자신에게 참아 주셨기 때문에 제가 여기에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언제나 참아 주셨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래 참아주셨기에 그러므로 참아내기를 원합니다.

오래 참음은 무엇에 대한 태도일까요? 오래 참음은 고통에 대한 태도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고통을 견디어 내는 것이 오래 참음입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얼마나 참아야 하느냐로 보려고 합니다.

야고보서 5장 7절 말씀입니다.

(약 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농사를 짓고 살던 사람들이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 내는 산업사회를 살게 되었습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 내던 사람들이 정보를 사고파는 정보산업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농사를 짓던 사회에서 배워야 지혜가 여전히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기다림입니다. 공장에서 만드는 물건은 필요하면 기계를 밤새 돌려서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만들어내는 창조적 아이디어가 어느 순간에 불현 듯 대박을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쌀을 거두기 위해서는 봄에 모내기를 하고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여름을 견뎌야 합니다. 이 견딤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3. 오래 참음은 시간에 대한 태도입니다.

한 때, ‘아더메치유지징’이라는 말이 유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더메치유지징’은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고, 유치하고, 지겹고, 징그럽고의 줄인 말입니다. 세상살이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참고 견디는 것이 미덕이었습니다. 왜요? ‘여우같은 마누라 토끼 같은 자식’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족을 위하여 참고 견디는 인내가 오늘의 이 사회를 만들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조금이라도 아니꼽고 더럽게 느끼면 때려(?)치웁니다. 너무 조급하고 참지 못하고 견디지 못합니다. 빠르게 달리는 시간의 흐름을 타는 것이 능력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빨리 달려도 일 년은 열 두 달입니다. 한 달이라도 건너 뛸 수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시간에 허덕이다가 말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우리의 시간은 시작되었고 언젠가 이 땅에서의 시간은 끝이 나고 영원한 시간 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조급할 이유도 없고 여유를 부릴 수도 없습니다. 농부가 알곡을 거둘 때까지 참고 견디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를 바라보며 참아야 합니다. 

언제까지? 주님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디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래 참음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오래 참음의 반대말이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하려고 합니다. 
로마서 9장 22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롬 9:22b)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진노하심을 보이시고 권능을 알리시기를 원하실 때가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끝임 없이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성서에서 보는 인간의 역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다 풀어내려면 노아의 홍수와 같은 것이 수도 없이 많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멸망 받게 되어 있는 진노의 대상들에 대하여 꾸준히 참으시면서 너그럽게 대해 주셨습니다. 당장 부수어버려야 할 진노의 그릇을 부수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참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진노를 참으셨습니다.


4. 오래 참음은 복수의 반대입니다.

오래 참음은 다른 사람에게 복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수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오래 참는 것은 앙갚음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수하는 것을 뒤로 미루는 것이 참음입니다.

한국 전쟁 당시 한국에 주둔했던 어느 외국인 부대에 음식을 하고 청소를 해 줄 한국 소년 한 명을 고용했습니다. 하우스 보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장난삼아 소년을 골탕 먹이곤 하였습니다. 끈적끈적한 바셀린을 손잡이에 발라 놓아 손에 묻게 하였습니다. 소년의 신발 속에 휴지조각을 채워놓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그들이 아무리 장난을 쳐도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괴로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소년은 가만히 웃기만 하였습니다. 마침내 군인들은 자신들이 하던 짓에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동안 장난삼아 그랬는데 정말 미안하구나. 다시는 그런 일을 절대로 하지 않을게.”

소년은 물었습니다.
“정말로 나에게 다시는 장난치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요?”
“그럼 그렇고 말로 우리는 너의 끈기에 감탄했다!”

그러자 소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이제 음식에 침을 뱉지 않을게요.”

이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소년은 군인들이 못살게 굴 때마다 몰래 음식에 침을 뱉는 것으로 이미 충분히 보복하였습니다. 하지만 보복하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냇물은 보이지도 않는데 신발부터 벗는다.’고 우리는 너무 서두릅니다. 원수를 갚고 보복하는 일에도 빠릅니다. 이것도 참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참아 주셨기에 그러므로 오래 참아야 합니다.

오래 참음은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쉽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후서 3장 15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벧후 3:15a)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여기에서 오래 참으심은 기다림입니다. 견딤이 수동적이라면 기다림은 능동적입니다. 인간은 포기하였지만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인간은 절망하지만 하나님은 희망하십니다. 절망은 포기하는 것이지만 희망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5. 오래 참음은 기다림입니다.

오래 참음은 사람의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거역하는 자들에게 대하여 오래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기 까지 참으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가 오래 참음을 열매로 맺기를 기다리십니다. 모두 하나같이 하나님의 기다리심을 나타냅니다.

어느 수녀님이 얼음과자 중에 하나인 ‘설레임’이라는 것을 우연하게 먹었습니다. 그 맛이 혀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사기 위하여 가게에 갔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게 주인에게 “‘그리움’ 하나 주세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이는 ‘설레임’을 주었습니다. 얼마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먹고 싶었습니다. 이번에는 “‘기다림’ 주세요!”하였는데 역시 주인는 ‘설레임’을 주었습니다.

그리움은 셀레임이고, 설레임은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래 참으셨습니다.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다려 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다른 사람에 대하여 기다립시다.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기다립시다. 자녀들에 대하여 기다려 줍시다.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넉넉해집시다.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역사의 희망을 기다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통계에 의하면 세일즈맨들은 한건의 계약을 위해서 최소한 다섯 번 이상 고객을 만나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50%이상의 세일즈맨들이 단 한 번의 거절로 더 이상 고객을 두 번 다시 만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마지막이라는 절망이 밀려올 때 “한 번만 더 시도해 보자!”고 외칩니다. 

그렇습니다. 오기와 패기 때문에 한 번 더 시도해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때문에 ‘한 번 더’ 입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도와주심으로 그 열매인 오래 참음을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충만하심으로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으시기를 오래 참음의 모범을 보여 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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