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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근심 (고후 7: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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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근심 (고후 7:9-11)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의 삶속에서 싫어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우상숭배고 또 하나가 교만입니다. 우상숭배는 어떤 이유로도 하나님이 용납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 또 하나는 근심입니다. 

그 ‘근심’이라는 놈은 ‘염려’라는 누이가 있고 ‘걱정’이라는 동생이 있습니다. 이 세 놈은 같은 패거리입니다. 그래서 늘 우리 성도들에게 악착같이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놈들은 우리 성도들이 누릴 복을 빼앗아 가는 놈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놈들은 계속 우리 속에 머물면 ‘불신앙’과 ‘의심’이라는 열매를 맺게 하고 있고 결국은 우리를 하나님과 거리가 멀게 만드는 결과를 만드는 놈들입니다. 이 근심이라는 놈의 배후에는 사탄이라는 놈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송가 486장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내 주 예수 날 오라 부르시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주예수의 구원의 은혜로다 참 기쁘고 즐겁구나. /그 은혜를 영원히 누리겠네. 곧 평안히 쉬리로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길에는 참 근심이 많습니다. 지나고 보면 별것도 아닌데 걱정 근심합니다. 그리고 막상 닥치지도 않은 문제인데 저 멀리 있는 것을 끌어다 앞에 두고 근심 걱정 염려하며 불안해합니다. 

어제 인터넷 뉴스를 보니 2031년에 추석에는 9일정도의 연휴가 있다고 하며 좋아하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직 20년 뒤의 이야기입니다. 내 나이가 74세입니다. 그때는 연휴 아니어도 늘 쉬는데... 

사람들은 이렇게 먼 미래 것을 앞으로 가져다가 좋아하기도 하고 먼 미래 것을 앞으로 가져다가 걱정하기도 합니다. 

옛날 어르신들이 하신 말씀처럼 걱정도 팔자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예수를 구주로 믿는 성도라면 근심 걱정 염려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면하십니다. 

마태복음6:31~32절을 보세요.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방인들이나 걱정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아신다했습니다. 그런데 왜 걱정하냔 말입니다. 

또 요한복음14:1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하셨습니다. 

그리고 잠언 10:22절에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그렇다면 예수를 구주로 믿는 우리 성도들은 어찌해야 합니까? 
우리 성도는 전혀 근심 염려 걱정 없이 살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때로는 근심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보면 근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을 분류해 본다면 1)육신적인 근심이 있고 2)영적인 근심입니다. 그런데 이 육적인 근심은 세상 근심을 말하는 것이고 영적인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신적인 근심에 대하여 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영적인 근심은 마땅히 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의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세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로 아주 호되게 책망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고린도 전서입니다. 그 책망 때문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근심을 했었습니다. 그 서신을 보면 고린도 교회는 골치 아픈 교회였습니다. 교회 안에 온갖 문제가 가득한 교회였습니다. 근친 상간문제, 소송문제, 혼인문제, 우상제물 문제, 은사 문제 등등……. 수많은 문제를 다 갖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 전서를 적어 보내면서 심하게 책망을 했습니다. “어찌”란 말이 고린도전서에만 19번이 기록되었습니다. 어찌 나뉘었느냐 하며 파당싸움을 책망합니다. 

심지어는 고전 16:22절에는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라고 까지 책망했습니다.   

그런 책망 때문에 고린도교회가 큰 근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신을 보낸 바울도 후회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그 근심케 한 책망이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그 서신으로 인해 교린도 교회가 회개를 하고 바르게 서게 된 기회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근심’이라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세상 근심이 있고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육적인 근심, 세상 근심은 어떤 것인가? 간단히 살펴보고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근심은 어떤 것을 말하며 어떻게 복으로 누릴 수 있는가를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기를 축원합니다. 

A. 사망에 이르는 근심이 있습니다. 

세상 근심이란 육신의 근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근심은 결과적으로 사망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이 근심은 왜 우리로 사망을 이루게 하는가에 대하여 알아봐야 합니다. 


1. 세상 사람들의 근심은 무엇일까요? 

1)‘죽음’에 대해 근심합니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 그리고 가족들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근심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다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음이 눈앞에 닥치면 예외 없이 다 근심 걱정하고 심한 공포를 느끼며 살아갑니다.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보호자를 데려 오시라하면 가슴이 철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근심을 벗어 버릴 수 있을까요? 
이 능력은 오직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믿는 믿음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참으로 믿는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설피 믿는 사람과 가짜로 믿는 사람은 죽음이 눈앞에 닥치면 바들바들 떨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다니엘 같은 이, 그리고 바울 같은 이는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삶을 사는 것을 보게 됩니다. 

 
2)질병에 대해 근심합니다. 

질병은 사람에게 고통뿐 아니라 슬픔과 근심을 주며 생의 의욕을 빼앗아 갑니다. 그 누구도 질병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요즘 현대인이 최고로 두려워하는 질병은 암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성도의 믿음을 시험해 볼 최고의 도구는 ‘암’이라 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암은 ‘하나님의 초대장’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합시다. “암은 하나님의 초대장이다.” 그러기에 암 병에 걸리거든 ‘할렐루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믿음의 성도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하나님은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죽을 병에 걸린 히스기야가 살아난 것처럼 치유를 체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치병이라 해도 그 질병으로 두려워 근심 걱정하다가 생애를 마감하지 말고 하나님이 허락한 생애 동안 행복하게 살다가 가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자녀들을 근심합니다. 

자식 문제로 근심해 보지 않은 부모가 이 세상에 어디 있을 것입니까? 

아마 초등학교 시절까지는 그 부모들의 마음에 기쁨과 기대를 주는 사랑스런 자식일지라도 자식은 평생 부모의 근심 걱정 대상입니다. 중고등학교 들어가면 나아질것라 생각했는데 더 걱정입니다. 대학들려 보내면 한숨 쉴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대학졸업하면 걱정 안할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지금 남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하루도 자녀 문제로 근심걱정 안하시는 분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중요한 것은 내 자식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하나님 자식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맡기는 부모 되시길 축원합니다. 
 

4)환난과 재난을 근심합니다. 

예상치 못했던 환난과 재난이 닥칩니다. 어느 날 갑자가 홍수가 나서 힘쓰고 애써 세워놓은 농산물이 다 떠내려갑니다. 
욥처럼 사랑하는 자녀가 어느 날 사고로 먼저 떠납니다. 

온힘을 다해 사업이 다른 업체가 부도를 내면서 부도가 납니다. 이런 종류 이외에도 각가지 말 못할 재난도 닥칩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갑작스런 불행한 일이 밀어닥쳐 행복했던 우리네들 가정이 큰 소용돌이 속에 잠길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 때 어느 누가 근심하지 않을 자 있을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 성도는 그때에도 믿음으로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것을 믿으시길 축원합니다. 그러기에 환난과 재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2. 세상 근심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1)영적 질병에 걸리게 합니다. 

근심이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생애에 넘치는 활기는 간 곳 없습니다. 웃음도 없고 수심에 가득한 찬 얼굴입니다. 아무리 웃으려 해도 웃을 수가 없습니다. 유머도 안통하고 농담도 안 통합니다. 이런 사람은 개그 콘서트를 봐도 웃지 못합니다. 

그래서 잠 15:13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했습니다. ‘심령을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질병이 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2) 육신의 건강을 잃게 합니다. 

잠17:22절을 보세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근심은 마음의 고통이 극심한 상태를 말합니다. 근심에 빠져서 의욕을 상실하고 좌절감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세요. 그 사람은 얼마 못가 병상에 눕게 됩니다. 왜요? 근심이 뼈를 바르게 합니다. 

결국 뼈가 마른다는 것은 골수가 윤택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피가 골수에서 만들어지는데 그게 좋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 종류의 질병에 걸리게 됩니다. 화병도 걸리고 관절염도 걸리고 소화기 장애 혈관장애등 각종 질병이 심령에 근심 걱정 많은 사람에게서 찾아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이 근심을 없애야 합니다.  


3. 세상 근심을 어떻게 물리쳐야 할까요? 

이런 근심은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이겨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1)주님이 주신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근심에 잠긴 제자들에게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평안이 아닙니다. 세상이 알지도 못하는 평안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그 어떤 근심도, 어떤 환난도, 어떤 고통도 이길 수 있는 평안입니다. 그 평안이 여러분 속에 임하시면 근심걱정 염려는 떠나갈 줄 믿습니다.  

2) 주님께 맡기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염려와 근심을 맡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자기에게 맡기면 당신이 해결사가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권고하신다”는 말은 돌보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맡겨 버리시길 축원합니다. 질병도 맡기세요. 자녀 문제도 맡기세요. 옆에 사람에게 말하세요. “주님께 맡겨 버립시다.” 아멘!  


3) 주님의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문제를 우리 눈으로 보면 골치 아프고 근심 걱정거리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시각으로 보면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시각으로만 문제를 볼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시각으로 봐야 합니다.  

마11:28~30절을 보세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자세히 보시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배우면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뭘까요? 주님의 자세를 가지면 문제를 보는 시각을 달라집니다. 그러면 그 문제가 고통과 근심꺼리가 아니라 축복과 기쁨꺼리인 것을 알게 됩니다. 내 시각에서 보면 환난이고 재난이지만 하나님 시각에서 보면 기회요 축복일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노예로 끌려가는 것은 고난이고 고통이지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총리로 만들기 위한 과정입니다. 
 

B.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근심에서는 벗어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짊어져야 할 좋은 근심이 있습니다. 

이 근심을 오늘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근심이 육신적인 근심이라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영적 근심을 의미합니다.

세상 근심이 우리에게 사망을 주는 것이라면 이 영적인 근심은 우리로 회개케 하고 생명을 준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 근심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침체시키고 하나님을 떠나는 생활을 이루게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우리의 생명에 활기와 생명력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1.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 성도는 무엇을 근심해야 할까요? 

1) 성숙치 못한 신앙을 근심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가 부끄러운 모습을 갖고 있기에 바울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성숙하지 못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우리 모습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왜 나는 이렇게 믿음이 작은 것일까?” 
“왜 나는 이렇게 욕심이 많은 것일까? 
“이러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을 것일까?” 
“내가 하나님 앞에 가서 무슨 상을 받을 수 있을까?” 

이런 근심은 우리 성도가 반드시 해야 하는 근심입니다. 

자신의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늘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근심해야 합니다. 성숙, 성장하여 주님 일에 힘써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 안타깝게 생각하고 근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근심이 전혀 없다면 그의 신앙이 성장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크게 근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대책이 나오는 것입니다. 
 

2) 헌신을 못하는 것을 근심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많은 문제가 있었는데 특별히 예배를 온전히 드리지 못하는 것, 우상 숭배하는 것, 그리고 온전한 헌신을 못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즘 우리 성도들도 주일 성수 개념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일 예배를 시간 여유 있으면 드리는 것으로 여깁니다. 적지 않은 성도들이 주일예배를 여가 생활로 여깁니다. 시간되면 드리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단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회사는 죽어도 안 빠집니다. 자식이 학교를 안가면 난리가 날 텐데 교회 예배 빠지는 것은 너무 쉽게 포기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주일성수에 대해 대가를 치러 보셨나요? 왜 주일을 제대로 지키는 생활을 못하는 것일까? 대가지불을 안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현대 사회가 그러니 어쩔 수 없어” 하고 포기합니다. 그러면 마귀는 평생 우리를 가지고 놀 것입니다. 

대가 지불을 하셔야 합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먹고 살 것이 걱정되더라도 대가를 치르시길 바랍니다. 주일을 지키는 일에 실패한다면 우리 하나님이 그의 신앙생활에서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하실 수 있을까요? 


3)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을 근심해야 합니다. 

복음은 생명입니다. 이 생명의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전하지 못한다면 우리 신앙생활은 허수아비일 것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명령이 뭡니까? 가라는 것입니다. 전하라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전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주변에 믿지 않는 사람을 보는데도 복음을 소개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복음의 결과에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근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 책임에 대해 근심해야 합니다. 내 주변의 불신자들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기에 불신자를 내 옆에 두고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죄악에 대한 금심, 이것이 없다면 진짜 성도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기에 크게 근심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핑계하지 마세요.  


2.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어떤 유익이 있는 것일까요? 

1)회개를 이루게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룬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마음은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값진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피로써 회개한 우리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회개는 저절로 우리의 마음에서 솟아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고나서 경험한 근심이 있습니다. 
좀 더 기도를 해야 하는데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해 주세요.” 부탁을 받았을 때 네 하고 대답은 하는데 잊고 못하는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목사라 할까 근심할 때가 많습니다. 

선교사님들을 만나면 “목사님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시는데 솔직히 기도 못했습니다. 그러니 “기도 안 했는데요.” 할 수 없잖아요. 그냥 네.. 하고 대답하니 양심에 찔립니다. ‘네 기도하겠습니다.’ 약속해 놓고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회개 할 수밖에 없습니다.  


2)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만듭니다. 

우리들 가정에 갑자기 예기치 아니했던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 이 일은 내가 지난날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생활을 해 왔더니 하나님께서 나로 깨닫게 하시는 것이구나, 마음에 근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근심은 곧 하나님께 대한 회개로 연장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욱 의뢰하게 되며 순종하는 생활로 하나님을 더 가까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이나 자녀들의 몸에 예상치 아니한 병이 생겼습니까? 어쩌다가 생긴 것으로 단정하지 마시고 자신의 신앙생활과 결부시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런 자세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할 수 있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더 근신하게 되고 더 기도하게 되고 더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3) 구원을 더욱 견고하게 해줍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이라면 작은 것에도 민감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많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근심은 결국 우리에게 후회치 않는 구원을 이루게 해줍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한다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실까요? 우리가 연약하여 감당키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령님은 우리 속에 내주하셔서 우리를 깨어 있게 하시고 늘 주님께 가까이 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더욱 단단하게 해 줍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유익을 줍니다. 
11절을 다같이 보세요.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 은혜를 간절하게 사모하게 합니다. 
2) 복음을 열심히 전하게 합니다. 
3) 죄악을 분하게 여기게 합니다. 
4)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합니다. 

이밖에도 
5) 복을 사모하게 합니다. 
6) 열심 있게 합니다. 
7) 벌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기에 영적 근심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빌립보서 4:6-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 했습니다. 

세상 근심 걱정은 우리를 하나님과 거리가 멀게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영적 근심 걱정은 우리를 더욱 새롭게 합니다. 세상 근심 걱정은 사망을 가져다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영적 근심 걱정은 우리에게 거룩한 은혜를 가져다줍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생긴다면 소망이 있습니다. 
그 근심으로 회개하는 생활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결국 우리로 하나님의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근심이 무엇인가를 유심히 보시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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