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죽은 자가 일어나 앉고 (눅 7:11-17)

첨부 1


죽은 자가 일어나 앉고 (눅 7:11-17)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역을 하신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을 만난다. 거기서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예수님은 나인이란 성으로 들어가신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반면 나인은 갈릴리의 성읍으로 나사렛 동남쪽 8Km 정도에 위치해 있다. 예수님이 나인 성문에 접근했을 때 상을 당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이 여인은 남편이 없는 과부였다. 아니 사망의 원수 앞에서 가정의 행복을 빼앗기고 살았다. 그렇지만 아들 하나를 기르게 하셔서 아들로 소망을 삼고 인생을 지내왔다. 그런데 사망의 원수는 아들을 꺾어버렸다. 그것도 자기 할 일을 하고 살 수 있는 청년의 젊음을 시들게 만들었다. 사망의 원수는 과부된 어머니를 절망으로 밀어넣었다. 

사망, 이것이 문제다. 사망은 생의 희망을 찢고 생에 대한 가능성을 짓밟는 영원한 원수다. 사실 사망은 죄의 값으로 주어졌다. 사망은 풍성한 생명을 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사탄의 최고 무기다. 

고전15:55을 보면 사망에 대한 말씀이 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하였다. 사망이 쏘는 것이란 사망의 독이 무엇인가라고 말할 수 있는데 사망이 사용하는 독은 ‘죄’를 가리킨다. 죄라는 독이 죽게 만든다. 죄가 무서운 것이다. 죄를 지어 죄 아래로 떨어지게 만드는 사탄의 방법은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죽는다. 아이도 죽고, 노인도 죽고, 젊은이도 죽는다. 

여기 사망의 쏘는 독에 의해 죽은 자의 어미는 시신을 장례하러 성문 밖으로 나간다. 관을 앞세우고 많은 조문객과 함께 성을 나서는 과부는 예수님의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후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죽은 자 청년이 생명을 되찾아 일어나 앉게 되고 말을 하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다. 예수는 청년을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죽은 자를 산 자로, 관 속에 있는 청년을 어머니 품으로 돌려주었다. 이 사건을 두고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렇게 외쳤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고 하였다.

죽은 자가 일어나 앉는 이 사건으로 무엇을 알게 해 주는가?
  

1. 사람은 죽음에 대한 해답이 못된다. (눅7:12)

눅7: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라고 하였고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사람들이 죽은 청년의 관을 메고 나왔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사람이 사망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죽은 자의 시신을 무덤으로 메어가는 것 뿐이다. 죽음의 집인 무덤으로 데려가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많은 사람들도 죽음의 행렬이 되어 죽은 자가 묻히는 곳까지 따라가는 걸음이 될 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아니 사람들 중에 그의 어머니도, 모든 소망을 걸고 키운 어머니도 사망 앞에 삶을 슬퍼하며 곡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사람은 고위 직무를 막론하고 죽은 자에 대한 해답이 못된다. 죽음을 긍정하고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동의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내 주변에 알고 있는 사람들! 함께 교회에 다녔던 사람들을 보라. 묘지와 화장터로 갈 때마다 사람은 사망을 맞이해야 할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느낀다. 
  

2. 예수님은 죽은 자의 묘지 행렬을 멈추시게 하신다. (눅7:14)

눅7: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멘 자들은 관을 멘 사람들이다. 모든 사람은 이 운구하는 이들을 따라나섰다. 묘지까지 따라나서기를 한 사람들이다. 희망을 접고 울면서 관을 따라가면서 노래를 접고 사망에 대해 거부하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미래를 접고 따라가는 걸음만 옮기는 사람들이다. 

그 행렬이 멈추었다. 더 이상 무덤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님이 손을 들어 관을 만지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손, 구경하는 손, 지나가는 나그네의 손, 죽은 자의 관을 향해 내어 민 평범한 사람의 손 같으나 관이 멈추어 섰다. 멘 자들이 서게 되니 모든 묘지 행렬이 멈추어 섰다. 상여꾼들이 주님의 손에 순종했다. 상여꾼들의 걸음이 멈추어 섰다. 죽음의 행렬을 정지시키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눅7:11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예수와 동행하는 무리들도 성 밖으로 오는 관과 상여꾼을 멈추게 못하였다. 예수님의 손의 권세를 본다. 

우리는 오늘도 사망으로 내려가는 인생이다. 재깍 재깍 거리는 시계 소리와 함께 사망의 공동 묘지를 향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내려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멈추어 서게 한다. 시골에서 목회할 때 병원에서 틀렸다고 내어놓은 자매, 이제는 알약을 주어 먹고 마지막을 기다리라고 하는 자매, 굿을 하고 귀신을 불러 살려 달라고 하다가 예수를 만났다. 예수의 손이 그를 붙잡았다. 그 자매의 죽음으로 가는 사망의 길이 멈추어졌다. 그는 살아있다. 기적적으로 아기를 낳고 어머니가 되었다. 

예수님은 두렵고 무서운 사망의 행렬을 멈추게 한다. 그의 손, 그의 발은 권세가 있다. 계1: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계1: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계1: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다. 어찌 사망을 꾸짖지 못하며, 죽은 자의 묘지 행렬을 마주쳤을 때 어찌 멈추게 하지 못하겠는가? 
  

3. 예수님의 음성은 생명이다. (눅7:14~15)

눅7:14下~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라고 하였다. 죽은 자의 관을 향해 예수는 말씀하셨다. ‘너는 죽었다. 끝이다.’라고 하지 않았다. 누워있는 청년에게 죽음을 꺾는 반어법을 말씀하셨다. “일어나라!”

우리는 외치지 못한다. 사망 앞에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아무 말도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계1:18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이가 예수다. 그 열쇠를 쥔 예수가 외친다. “일어나라!” 사망의 원수가 완전히 꺾어졌다. ‘일어나라’는 외침 앞에 청년을 일어났고 말도 하게 되었다. 예수의 외침은 생명이다.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래서 주님의 음성은 죽은 자를 일으키는 생명이 된다. 주의 말은 영이기에 관에 누워 있어도 생명이 된다. 

나는 일어나라는 묵상을 많이 한다. 티끌 같은 문제로 주저앉아 있는 이들은 일어나야 한다. 연애 무제로 주저앉아 있는 이들, 돈 문제로, 직장 문제로 퇴직을 당하고 누워있는 이들은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주님은 죽은 자에게 일어나라고 하신다. 듣지 못하는 이에게, 들리지 않는 이에게, 호흡이 멈춘 이에게 일어나라고 하신다. 그런데 그렇게 되었다. 주님의 외침은 생명 그 자체다. 나는 의기소침하여 기도하는 자리에 앉았다. 기도가 되지 않는다. 기도가 올라가지도 않는다. 성도들의 기도 소리만 조근 조근 들리는데 갑자기 벼락치는 소리가 들렸다. 전율과 두려움, 놀라움이 밀고 들어오는 소리다. 그것은 분명코 “일어나라”는 소리였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일어나라는 그 음성을 듣고 눈을 감고 있을 수 없었다. 

사60:1의 말씀이 생각났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새벽 아침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 소리가 얼마나 가슴을 떨리게 하는지 떨림의 시간이 되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말씀에서 나 자신이 생각되었다. ‘내가 문제로구나!’ 내가 얼마나 깊은 시름 속에 누워 있으면 내가 관에 누워있는 자처럼 보였을까? 상여 행렬이 뒤따르는 죽은 자의 주인공처럼 보여졌을까? 죽지 않은 나에게 일어나라는 주의 말은 새로운 충격과 도전, 결단으로 이어졌다. 내가 일어나지 않으면 조문객이 뒤따른다. 이것이 아니다. 내가 일어나야 어머니 품으로 돌아간다. 내 어머니는 누구인가? 

갈4:26을 보니 교회가 어머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나를 품어주시고 나를 낳으신 어머니, 나에게 희망을 걸고 있는 어머니, 그 교회가 내 어머니다. 내가 죽어 관에 누워 있으면 어머니 교회가 무너진다. 교회가 병든다. 그러나 내가 일어나면 눈물과 슬픔이 사라진다. 희망과 비전이 시작된다. 생명이 주어지고 생명을 따르는 행렬이 이어진다. 

그렇다. 일어나야 한다. 청년이 일어나 말을 하게 될 때 그 어머니의 삶은 얼마나 행복하게 되었을까? 얼마나 눈물을 거두고 춤을 추게 되었을까? 내가 일어나서 말을 하는 자가 되어야 내 어머니, 우리 어머니인 교회가 행복해진다. 생명의 음성이다. 예수님의 음성이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있다. 주님은 진정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고 나를 위해 대신 죽음으로서 사망의 원수를 꺾어버리셨다. 사탄의 최고 무기인 사망의 원수를 짓밟았다. 이 복음의 주인공이신 주님을 만난 사람, 그 주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은 영생이 있다. 아들이 없는 자는 죽음으로 간다. 그러나 아들이 있는 자는 영생을 약속 받았다.  

일어나라!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은 외치고 계신다.
일어나라! 아무도 외칠 수 없는 생명의 선포를 외치고 계신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