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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가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 (수 22:32-34, 눅 20: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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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가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 (수 22:32-34, 눅 20:37-38)

로버트 라이트는 ‘신의 진화’라는 책에서 신은 인간이 만든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신이란 존재는 실재가 아니라 인간의 환영(幻影)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에 의해 발명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하나님이라는 개념으로 발명했다고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든 것은 관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사람이 하나님을 만든 이유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는 개념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개념보다 훨씬 더 합리적입니다. 자기를 만드신 분에게 내가 당신을 만들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넉넉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우주를 관측한 결과 우주 탄생에는 신이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라고 하였습니다. 자연발생설 등으로 우주의 생성을 해석한다는 것은 얼마나 부족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과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언제나 온전하지 못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도 얻어맞지 않고 사는 것은 하나님이 인자하시고 관용하시다는 증거입니다. 
  
로마서 1:20에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모든 것 가운데서 하나님을 알 만한 것들을 많이 주셔서 분명히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확실히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만물에 보여 분명히 알게 하셨지만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보고 알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5:42에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알지 못한 중에 예수님을 외면하고 박대하며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섬길 수 있는 길은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 예수님을 섬길만한 일들을  너무나 많이 주셨는데 무지하여 알지 못하고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신론증’이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무신론증이 더 어렵습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완벽하게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명이 없다는 증명보다 훨씬 더 쉽습니다. 
  
스탠 코피는 ‘하나님 알아가기’라는 책에서 피조물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우리의 눈을 감고 보면 하나님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하나님을 보고 듣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창세기 28:13에는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라고 야곱에게 말씀합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므로 하나님을 확실히 알고 집을 떠나 삼존의 집으로 가고 있었지만 두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증거는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믿는 야훼가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믿고 이 믿음을 전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증거가 무엇입니까?
  
첫째, 이스라엘 온 백성이 하나가 되므로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것을 증거했습니다.  

여호수아 22:33에는 “그 일이 이스라엘 자손을 즐겁게 한지라”고 합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가 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땅을 기업으로 나눌 때에 대부분의 지파들이 요단강 서쪽 땅을 분할 받았습니다. 그러나 두 지파 반이 요단강 동쪽의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르우벤지파와 갓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 동쪽에 땅을 분할 받아 거기에 단을 쌓았습니다. 
  
요단강 서쪽에 있던 나머지 아홉 지파 반이 반발하였습니다. 혹시 그들과 다른 제단을 쌓은 것이 아닌지 하여 염려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에 아간 한 사람이 전리품을 훔쳐서 숨겨놓은 때문에 온 백성에게 하나님의 재앙이 내린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단을 쌓은 것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재앙이 내리지나 않을까 하여 염려한 것입니다. 
  
이 때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와 지도자들이 가서 두 지파 반의 지도자들을 만났습니다. 두 지파 반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제단을 쌓은 목적을 설명하였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아홉 지파 반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자손들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제단을 쌓은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신앙을 보존하고, 지파간의 연대의식을 키우고, 올바른 자녀교육을 하기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요단강 동편의 두 지파 반이 하나님을 거역하기는커녕 자신들 못지않게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고, 요단강 서쪽의 아홉 지파 반과 같은 동족애를 가지고 있고, 요단강 서쪽의 지파나 동쪽의 지파나 온 백성이 하나가 되므로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하나가 됨을 인하여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민족이 하나 되게 하심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 됨은 하나님이 계심을 확인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들에게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확실하게 증거한 것입니다.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과 동쪽으로 나누어져 있으므로 지파 간의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므낫세 지파는 지파가 반으로 나누어져서 반 지파는 서쪽에 반 지파는 동쪽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지역적으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지역적 분리는 인간적인 갈등을 일으킬 수 있고 인간의 마음의 분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 되게 하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한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 되게 하시는 영입니다. 하나님은 살리는 영이십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하나 되게 하시는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 모두가 형제자매입니다. 예수님은 둘이 하나가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에베소서 2:14에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합니다.  
  
반면에 사단을 보세요. 사단은 분열 되게 하는 존재입니다. 갈라디아서 5:20에는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누가 합니까? 사단이 합니다. 사단은 사람으로 하여금 시험하고, 속이고, 상하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광포하게 하고, 우울하게 합니다. 다툼이 어디서 옵니까? 사단에게서 옵니다. 시기가 어디서 옵니까? 사단에게서 옵니다. 사람의 마음이 찢기고 갈라지게 하는 것이 어디서 옵니까? 사단에게서 옵니다. 사단은 나뉘고 분열되고 찢기게 하는 선수입니다. 
  
초대교회가 일곱 집사를 세웁니다. 왜 일곱 사람을 세웠지요?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갈등 때문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과부가 매일의 구제에 빠진다고 원망하였기 때문입니다. 두 파가 왜 나뉘어졌을까요? 지역이 나뉘므로 자연히 문화적 차이가 생긴 것입니다. 이 때 사도들은 성령으로 감동된 일곱 사람을 세우게 했습니다. 일곱 집사의 자격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세운 일곱 사람이 모두 헬라파 유대인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므로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를 완전히 해소하였습니다. 문자 그대로 초대교회는 성령의 집단이었습니다. 
  
최근에 미국식 자본주의가 도마에 올랐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자본주의는 사단의 놀이감에 불과합니다. 금융가의 몇몇 CEO들의 탐욕은 결국 나홀로 부자의 환상입니다. 다른 사람이야 죽던 말든 나만 잘 살겠다는 것이 극단적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의 뿌리는 ‘다윈주의’(Darwinism)입니다. 소위 ‘약육강식’의 법칙에서 힘이 있는 것은 잡아먹고 힘이 없는 것은 잡아먹히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마치 정글의 동물들이 사는 것 같은 ‘정글법칙’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본주의의 행태는 세계를 완전히 분열시켰습니다. 있는 자와 없는 자, 두 종류의 사람이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부익부빈익빈’의 원리는 점점 더 심화될 것이 분명합니다. 
  
최근 미국에서 시작된 반 월가(Wall Street) 시위는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뉴욕시민 3분의 2가 시위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월가는 1%의 부자를 위한 거리라는 것입니다. 몇몇 부자들의 탐욕에 반대하는 시위입니다. 일전에는 세계 80 개국에서 동시다발적인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월(Wall)이 무엇입니까? 담입니다. 월가가 바른 금융질서를 잡지 못하고 경제윤리가 없기 때문에 결국 월가는 담을 쌓은 곳이 되었습니다. 담을 쌓아서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갈라놓은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가 분노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9에서 바울은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라고 합니다. 정말 다른 사람의 약점을 강한 사람이 담당하고 서로 애타는 마음으로 도와주게 될 때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나 혼자 가지고는 부자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다 죽고 나 혼자 사는 법은 자연계에 없습니다. 
  
강 건너 사람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바다 건너 사람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담 넘어 사람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휴전선 넘어 사람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진정한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팔 안에서 모두가 하나가 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쌓으므로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것을 증거했습니다. 

여호수아 22:33에는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제단을 엣이라 불렀으니 우리 사이에 이 제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으면 여호와의 제단은 없습니다. “그 제단을 엣이라 불렀으니”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바로 섬기고 있었음을 이 제단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제단을 쌓았다는 말을 제사를 드린다는 말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예배를 드린다는 말입니다. 예배는 구원받은 자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제사하게 하기 위하여 출애굽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하게 하기 위하여 구원하셨습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축제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최대의 행위입니다. 
  
노아는 큰 홍수가 끝나고 정결한 짐승을 제물로 제단에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그 곳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드리라고 했을 때에 모리아에서 이삭을 드리려고 제단을 쌓았습니다. 

성경에는 이삭도, 야곱도 제단을 쌓은 기록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야곱은 벧엘에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모세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에 제단을 쌓고 제단의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불렀습니다. 그 외에 사울도, 다윗도, 솔로몬도 제단을 쌓았습니다. 성경에 제단을 쌓은 기록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제단을 쌓는다는 것은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면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제단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불상 앞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까? 무당의 제단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까? 이슬람의 모스크 제단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제단에 제물을 드리는 것은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란 증거입니다. 
  
오래 전에 멕시코를 여행하는 중에 마야문명의 한 유적지를 가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돌로 만든 큰 제단이 하나 있었습니다. 고대 마야인들은 볼 게임을 했는데 두 편으로 나누어 이긴 편의 주장의 심장을 파서 제물로 드렸다고 합니다. 사람의 심장에서 흐르는 피가 동과 서로 흐르게 홈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자신의 심장이 파지고 죽지만 그러나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다시 세상에 태어날 때는 반신반인으로 태어난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이방신의 제단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단은 하나님께 제사하기에 합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제단과 이방신의 제단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경에 보면 불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제단에는 불이 있습니다. 이방신의 제단에는 불이 없습니다. 엘리야는 그 이름의 뜻이 ‘야훼가 하나님이시다’입니다. 그의 삶은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것을 증명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는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 450명과 갈멜산에서 대결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 같은 제단에 송아지를 잡아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에게 “불은 붙이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너희 신을 부르라”고 합니다. 불이 내려와서 제단의 제물을 태워야 참 신입니다. 그러나 바알의 제단에는 불이 없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자기들의 몸을 창으로 찌르면서 바알을 불렀지만 불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바알은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바알은 자신에게 바친 제물도 태우지 못합니다. 엘리야는 제단을 쌓고, 송아지를 잡아 올려놓고, 제단 주위에 도랑을 파고 물을 채우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다 태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말끔히 태웠는지 불이 내려와 “도랑물을 핥은지라”(왕상18:38)라고 합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응답하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옵소서”(18:38)라고 하였습니다. 불이 내려와 제단을 태우는 것 보고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18:39)라고 합니다. 불이 내려와 제단의 모든 제물을 태우는 것을 보고 백성들이 여호와를 하나님을 인정하였습니다. 엘리야의 하나님과 바알이 무엇이 다릅니까? 불로 응답하는 것이 다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어떻게 불로 응답하실 수 있습니까? 불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알은 불이 없습니다. 여호와의 불 외에 다른 불은 없습니다. 
  
에스라 1:2에는 바사 왕 고레스가 그의 입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고 고백합니다. 다니엘이 예루살렘을 향한 기도의 제단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바사의 왕 외에 어떤 것에도 기도하지 못하게 한 법을 어기고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불 풀무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가 함께 하셔서 그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타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나라의 법을 어기고 매일 세 차례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문을 열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일로 사자 굴에 집어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자의 입을 봉하여 사자가 다니엘을 해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다니엘 6:26에는 다리오 왕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의 사람들의 기도의 제단 때문에 하나님은 이방 왕의 입을 통하여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옛날 서대문 영천시장에는 콩나물 장사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한 부인은 새벽마다 콩나물 통을 이고 시장에 나가는 길에 교회에 가서 기도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자신의 자식들이 믿음으로 성장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 부인의 아들이 훗날 큰 제약회사를 설립하여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서 기도하던 것을 연상하며 새벽 종소리를 기억하여 회사의 심벌을 종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회사가 종근당이란 제약회사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하나님 인정하는 백성에게, 그리고 제단 쌓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 땅에서도 잘 되게 하십니다. 

누가복음 20:38에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 영혼이 살이 있어서 제단 쌓기를 즐겨하는 산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결론 

미국은 청교도가 남긴 유산입니다. 1776년 영국 식민지의 개척자들이 잉글랜드를 몰아냈을 때 이들 중 75%가 청교도였습니다. 청교도들은 탁월함과 교육, 윤리, 정직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나, 의회에서나, 정부에서나 매일 기도로 일을 시작하고 기도로 마쳤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에 들어와서 공교육에서 기도를 폐지하고, 학교에서의 윤리교육을 폐지하고 가정에서 하게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미국은 몰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흔히 베이비붐 세대는 학교에서 기도나 윤리 교육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신들이 배우지 않을 것을 가르칠 수 없다는 고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제단이 무너지면 하나님의 자리가 빼앗깁니다. 하나님의 제단이 무너지면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몰락합니다.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 삶의 근거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고, 하나님의 제단이 살아 있는 우리 가정, 교회, 국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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