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우리와 같았던 예수 (히 2:14-18)

첨부 1


우리와 같았던 예수 (히 2:14-18)

제가 삼십일 년 전 대학에 진학할 때 저는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다고 대단한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었고 그렇기 때문에 재학 중에 뭔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학에 들어가서 상당히 실망한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는 캠퍼스에 가득한 반종교적 반기독교적 분위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모의 간섭을 떠나서 학생들만의 세상에 도착했기 때문에 이제는 종교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껏 놀아야 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습니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한술 더 떠서 종교는 주관적인 것이고 나의 가치관을 남에게 주입하는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신앙을 배척해야 된다는 생각, 기존의 종교 가르침에 대해서 저항적이고 비우호적인 분위기, 이러한 분위기는 예수님을 믿는 저의 숨통을 막아버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실망한 이유는 소위 명문 대학의 명성 있는 교수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어느 교수가 수업 중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적어도 기독교를 비판하지는 말아야 될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수업 중에 대놓고 기독교를 비웃는 교수들이 있고 그보다 더 언짢은 것은 그럴 때에 학생들이 환호하면서 맞장구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속상한 것은 유대교에 대해서는 대놓고 비판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자칫하면 반유대주의자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또 가톨릭교회에 대해서도 대놓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복음주의 기독교에 대해서는 이건 완전히 동네북이었습니다. 복음주의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마치 배타적인 사람이고 뒤진 사람이고 이상한 사람이고 지적이지 못한 사람인 것 같은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소위 지성인들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사실은 저를 분개하게 만들었고 저의 신앙에 전투적이고 투쟁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건 제가 오랜 세월동안에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적인 틀에서 신앙을 고수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경험은 저로 하여금 영적으로 강인하게 만들어 주었고 스스로 서는 법을 터득하게 해 주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저의 신앙을 지키고 신앙을 변증하기 위하여 누구를 의존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가정의 분위기를 의존하지 않고 친구의 도움을 의존하지 않고 심지어 교회의 도움마저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이냐면 가족이 주일이면 같이 교회에 가는 것이기 때문에 따라가는 식의 교회 출석이 아닌 스스로 교회를 찾아가서 예배드리는 법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행 중이라도, 해외에 언어연수를 갔을 때에도, 유학중에도 어디를 가든 주일이 오면 제가 스스로 예배당을 찾아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한번은 프랑스 파리에 가서 대사관에 가서 한인교회가 어디 있는지 수소문해서 주일예배를 찾아간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발견한 것은 이와 같은 사람들이 흔치 않다는 사실이에요. 

교회를 의존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제가 이제껏 많은 교회를 다녀보니까 교회가 다 똑같지가 않습니다.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이것이 맞으면 저것이 맞지 않고, 저것이 맞으면 이것이 맞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모임이다보니까 저의 모든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교회에요.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어느 교회를 나가든지 간에 최선을 다하는 법을 배웠어요. 교회 일에 협조하고, 목사님을 존경하고, 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적극적으로 찾고, 십일조를 드리고, 교회를 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장로교회든 감리교회든 미국인교회든 한인교회든 교포교회든 어느 교회든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교회에서 제가 무엇을 얻으려고 하기 전에 제가 교회에 무엇을 기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저는 그것을 밑천으로 해서 성경의 진리와 성경의 말씀을 변증하는 법을 배우려고 했습니다. 제가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한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철학의 논리를 이용해서 오히려 성경의 진리를 변증하는 법을 터득하고자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의구심을 갖는 이유는 그들이 많이 알기 때문이 아니고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좀 더 충분히 알았더라면 오히려 믿음에 이를 수 있었을 텐데, 섣불리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오히려 성경을 의심하게 만들고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예컨대 대다수의 사람들은 신이 죽었다는 말을 처음 한 사람이 니체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이 말을 처음 한 사람은 니체가 아니고 마틴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입니다. 카타리나가 남편 마틴 루터가 너무 낙심한 모양을 보고는 ‘내 믿음의 남편 마틴 루터가 이렇게 낙심하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돌아가신 모양입니다.’ 이 말을 한 것이 하나님이 죽었다는 말이 시조가 됐어요.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루터는 다시 용기를 내서 종교개혁 작업에 성공하고 하나님이 돌아가신 게 아니고 살아 계시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신이 죽었다는 말을 한 사람은 오히려 자기 신앙이 재기하고 승리를 거두었는데 섣불리 그 말을 주워들은 사람은 정말로 하나님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영혼의 절망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어떤 대형사고가 났을 때 생존하는 사람이 있고 죽는 사람이 있지요. 죽는 사람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똑같은 대형 사고에서 왜 누구는 살고 왜 누구는 죽는가, 때로는 신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도 대형영적사고가 났는데 결과로 신앙을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신앙을 얻고 회복하는 사람도 세상에는 있습니다. 똑같은 환경인데 누구는 신앙을 잃어버리고 누구는 오히려 신앙을 지킵니다.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고자 하는 사람 중에 허먼 케인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흑인이라는 사실이에요. 미국의 대부분의 흑인은 민주당 성향인데 이 사람은 흑인인데 공화당이고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려고 합니다. 

몇 년 전에 허먼 케인이 간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주치의의 이름이 로드였고 그의 간호사의 이름이 그레이스였고 그리고 배를 쨀 때 J자 모양으로 쨌다고 합니다. 이 모든 사건에서 허먼 케인은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주치의의 이름이 주님이라는 뜻인 Lord이고 간호사의 이름이 은혜라는 뜻의 Grace이고 그리고 배의 짼 흔적이 예수님의 Jesus의 첫 글자인 J라는 사실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를 본인이 느꼈다고 말했고 그 수술 이후에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는 대통령 후보가 되려는 꿈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유치하다, 이건 아전인수 격인 해석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마는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왜 똑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어떤 사람은 믿을만한 이유를 발견하는데 어떤 사람은 의심할만한 이유만 눈에 보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자신의 선택과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한 강도는 예수님을 저주했고 한 강도는 예수님을 신뢰했습니다. 똑같은 여건에서 똑같이 십자가에 달려 죽지만 한 사람은 예수님을 저주했고 한 사람은 예수님을 신뢰했습니다. 저주한 사람이 왜 저주했느냐를 알 필요도 있지만 신뢰한 사람은 어떤 이유를 예수님을 신뢰했느냐, 이것을 알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멸망할 때 대부분의 사람이 죽었지만 롯은 거기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다 유황불에 죽었는데 롯은 살아남을 수가 있었느냐, 이것을 성경에서 발견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 가나안 사람들은 우물을 팔 줄 몰랐는데 이삭은 어디를 가든지 우물을 팔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남은 우물을 팔 줄 모르는 환경에서 이삭은 어디를 가든지 우물물을 팔 수 있었느냐, 이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또 애굽에 칠 년의 흉년이 있어서 온 나라가 멸망하게 될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는데 요셉만이 그것을 미리 예언하고 나라를 구원하고 자기 집안을 구원할 수 있었느냐, 이것을 성경에서 터득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 본문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얼마든지 상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힘들어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와 다른 점을 부각시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적 ․ 예수님의 신성 ․ 예수님의 거룩함 이런 것만을 강조하는 것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자아내기 보다는 예수님을 신화로 여기고 미신으로 여기고 성경의 기록을 신뢰하지 못하는 그런 결과를 낳는 경우도 있습니다. 과잉신앙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아는 데에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신학의 옷을 입으신 예수님은 과장된 부분이 있습니다. 실제 예수님과 거리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과잉신앙은 오히려 예수님에 대하여 더 많은 질문을 낳고 믿음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화장실에 가지 않으셨을까? 무슨 그런 무식한 소리를 합니까. 화장실을 가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셨을까? 그런 무지한 소리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이 전능하시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죽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전능하시다면 어떻게 손에 못을 박을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옆구리에 창을 찌를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전능하시다면 예수님이 왜 목이 마르고 주리고 피곤하고 때로는 고민하십니까. 또 예수님이 전지하셨다면 혈루병 걸렸던 여인이 예수님의 손에 옷을 댔을 때 뭣 하러 예수님이 누가 나를 만졌느냐 라고 물어보셨겠습니까. 나사로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왜 물어보시겠습니까. 그 날과 그 시는 아들도 모른다고 뭣 하러 말씀하셨겠습니까. 

예수께서 전지전능하셨다면 뭣 하러 성령의 은사가 필요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역사를 행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의 은사에 힘입었기 때문이지 당신이 전능하셨기 때문은 아니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은 삼십세가 되실 때까지 공생애를 시작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불경스러운 말이 아니고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하나님이라는 주장은 무엇을 뜻하느냐? 그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그 모든 특권을 버리고 오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했습니다.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 오늘 본문과 일치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에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들과 같이 되셨기 때문에 그것을 위대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는 하나님으로서의 특권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고 우리와 같이 되어서 오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이 무엇이냐.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첫째는 이것은 인간됨에 대한 긍정입니다. 사람의 인간됨은 죄가 아닙니다. 사람의 인간됨은 부끄러운 게 아니고 모자란 게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은 인간되기를 멈춘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은 여성으로 하여금 자기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느끼게 할 때가 있고, 또 가난한 사람이 자기가 가난하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게 할 때가 있고, 몸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 그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게 만들 때가 있는 것처럼 무지한 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인간됨을 죄스럽게 생각하고 부끄럽게 생각하게 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됨에 대한 놀라운 긍정입니다. 사람이 의인이 되기 위하여 사람 이상이 될 필요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사람은 귀중한 존재요, 아름다운 존재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비록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인간을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되셨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사셨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을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와 똑같이 되셔서 예수님도 믿음으로 사셔야 했고 예수님도 기도하셔야 했고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셔야 했고 예수님도 참고 인내하셔야 했고 예수님도 마음이 언짢을 때가 있고 섭섭할 때가 있고 고독할 때가 있고 배고플 때가 있고 목마를 때가 있고 우리가 겪는 모든 시험을 예수님도 당하셨습니다. 그게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어떤 특권을 누린 게 아닙니다. 시험이라든가 죄의 유혹에 대해서 예수님이 특별한 보호를 받으셨던 것이 아니고 우리와 똑같은 시험에 노출되셨으나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아,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넘어갈 수 없는 이유는 우리와 똑같이 되셔서 우리와 범사에 똑같이 되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되셨다면 우리도 예수님 같이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되셨다는 말은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인류를 대표하실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대제사장은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대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와 같이 되셨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표하실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신하실 수가 있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속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네 번째로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되셨다는 말은 우리를 능히 도우신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중에 ‘능히 도우시느니라’ 예수님 얘기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되셔서 범사에 형제와 같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를 체휼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능히 도우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제도 도우셨고 오늘도 도우시고 앞으로도 도우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