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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마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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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마 5:1-6)

저항시인으로 유명한 김지하 시인은 1982년에 <타는 목마름으로>란 시를 출판했습니다. 
그 앞부분은 이렇습니다. 

신새벽 뒷골목에 /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 
오직 한가닥 있어 /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한 때 우리에게는 민주주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평화로운 정권 교체에 대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벌써 몇 차례나 선거에 의한 평화로운 정권교체를 해왔습니다. 과거에 비하여 인권, 정치 토론의 자유가 거의 무제한으로 보장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요즘에는 너무 지나쳐서 사회적 무질서로 흐르는 것을 염려해야 할 지경입니다.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자유에 목말라하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두 가지를 다 주셨습니다. 가장 빠른 기간에 경제 발전과 정치 발전을 모두 이룬 세계 유일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할 줄 믿습니다. 

굶주림과 목마름은 인생사에 일반적인 것입니다. 전 세계적인 굶주림을 아시지요? 2009년 기준으로 10억 2천여만 명이 기아선상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6억 4천여만 명, 사하라 사막 남쪽 아프리카에 2억 6천여만 명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또 목마름은 어떻습니까? 홍수가 나면 물은 많아도 마실 물은 없습니다. 아프리카 등지에는 식수가 없어 흙탕물을 그대로 먹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난 번 영어예배팀에서 방글라데시에 갔을 때 마을 공동 우물을 파는 일을 돕고 돌아왔습니다. 밥 한 숟갈, 물 한 모금에 대해서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어느 민족보다 굶주림과 목마름을 적나라하게 경험한 민족입니다. 노예의 땅 애굽에서 나온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사십 년을 살았습니다. 광야는 굶주림과 목마름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와 메추라기가 없었다면, 반석에서 솟는 물이 없었다면, 쓴 물을 단 물로 바꿔주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죽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굶주림과 목마름에 대한 말씀이 많습니다. 

굶주림과 목마름은 육체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 목마름, 영적 굶주림도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것이 육체적 목마름과 굶주림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복 중 네 번째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의>란 무엇일까요? 의란 <옳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의 관점에서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옳은 것을 말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란 <하나님의 의를 찾고 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현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를 볼 수 없어서 괴로워하고 탄식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 삶은 무엇을 구하는가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추구하는 것에 따라 사람을 네 가지 종류로 분류했습니다.  

첫째는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육신이 원하는 욕망과 쾌락을 좇아서 동물처럼 삽니다.  

둘째는 <필요를 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당장 필요한 물질적 환경을 추구합니다. 그는 더 맛있는 것을 먹고, 더 편하게, 더 좋은 곳에 사는 데 마음을 둡니다. 

셋째는 <의미를 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성적 지식과 판단에 따라 바른 길, 가치 있는 일, 보람 있는 것을 추구하며 삽니다. 매우 교양있고, 철학적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결과적으로 자기 절대화, 자기 독선, 자기 교만이란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하나님의 의를 구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삽니다. 그는 하나님의 의를 위해 자기 생각을 버립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맞춥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현하기 위해 희생하기도 합니다. 

그는 때때로 많은 고난을 겪지만, 그 결과가 아름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찾아 헤매는 삶,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은 여러 종류의 삶 중에서 최고의 삶입니다. 

성경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살았던 인물을 찾는다면 <모세>를 들 수 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궁궐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살았습니다.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궁궐을 뛰쳐나왔습니다. 애굽의 왕자 신분을 포기했습니다. 그것은 심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한 개인적 목적으로 왕좌를 버린 에드워드 8세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모세는 개인적 목표 때문에 궁궐을 뛰쳐나온 게 아닙니다. 

그는눈앞에 벌어지는 현실 앞에서 탄식했습니다. 선량한 백성들이 노예가 되어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고된 일을 하는 것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낳은 아기를 무조건 강에 던져 죽게 하는 것은 너무도 잔혹한 일이었습니다. 그 생명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는 세상의 포악함과 잔인함에 대해 깊이 탄식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 이게 모세의 굶주림이요, 목마름이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위해 결단하고 행동했습니다. 모세의 이러한 결단에 대해 히브리서 11장 24절 이하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던 남 왕국 유다 사회를 개탄했습니다. 하박국서 1장 1절 이하를 보면 이렇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유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강포, 죄악, 패역, 겁탈, 변론과 분쟁, 땅에 떨어진 율법, 부정의,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고 득세하는 것에 대해 탄식했습니다. 

바로 이런 안타까움과 고통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모습입니다. 이런 이들의 눈물은 자신을 위한 게 아닙니다. 이들은 남을 위해 웁니다. 어떻게 하면 세상의 악을 줄이고,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만한 곳이 되게 할까를 생각하면서 밤을 새웁니다. 세상을 좀 더 섬기지 못하는 것 때문에 웁니다. 

유럽의 보장된 삶을 포기하고 아프리카로 들어간 슈바이처나, 하버드 대학 박사학위와 보장된 자리를 뒤로 하고 몽골로 들어간 이용규 선교사님의 이야기, 안정된 직장과 수입을 뒤로 하고 미국의 저택을 팔아 처분하고 아이들까지 모두 데리고 위험천만한 아프카니스탄으로 들어간 제 대학 동기 이야기, 중국집 배달원으로 한 달에 버는 70만원으로 다섯 명의 학생을 지원하고 자신의 사망보험금도 어려운 이들이 받도록 해 놓고 시신마저 기증한 김우수씨의 이야기, 연합고사 전국 수석과 서울대학교 법학과 졸업이란 화려한 이력을 내려놓고 배우지 못한 공단 근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헌신했던 한 여학생의 이야기 등은 세상의 많은 이들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으로 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굶주림과 목마름은 예수님께 먼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존재하는 불의와 이로 인해 인생들이 겪는 비극에 대해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의 수많은 죄는 은폐하고 의인인 척 하면서 간음하던 여인에게는 돌을 던지려 하는 사람들의 위선에 분노하셨습니다. 앞을 보지 못해 길거리에서 구걸해야 하는 비참한 사람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칠 때, 그를 예수님께로 데려오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 사람들의 무정함을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헤롯의 폭정에 시달리는 백성들, 성전 제사장들에게 멸시당하는 백성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무식하다고 무시당하는 백성들의 고통에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 같은 당시 백성들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 34절을 보면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고 했습니다. 이 무리들에게는 본래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목자란 정치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일반 백성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이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버려두고 지나가는 제사장과 레위인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이는 당시 사회 현실에 대한 예수님의 탄식의 반영이라고 하겠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을 당연히 돌보아야 할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지나간다면, 강도만난 사람을 돌봐줄 <뜻밖의 의인>이 나타나야 했습니다. 그 뜻밖의 의인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은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이 오히려 강도만난 사람을 돌봐 주었다는 이야기를 통해서 믿었던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과 함께,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역할을 기대하는 마음을 동시에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신께서도 <뜻밖의 구원자>가 되어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의 그 누구도 어려움에 빠진 백성을 돌보려 하지 않을 때, 모두가 외면할 때,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사람을 돌봐줄 것을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실 줄은 그 누구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의인, 선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면서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후 갈증에 괴로워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만, 제게는 이 세상의 <주리고 목마른 인생들을 대변하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쉬울까요? 저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열매를 따먹은 사단에게 속아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으로 존재하는 것이 행복하기만 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습니다. 이 세상 죄악과 인생들의 신음소리를 보고 들으시려면 하루도 편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고통을 혼자 짊어지신 분, 가장 큰 고통과 탄식을 겪는 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예수님의 탄식을 이어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편안히 살기를 포기한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세상의 여러 가지 악을 보아도, 어려운 이들을 보아도 그냥 그렇겠거니 했습니다. 때로는 그 불의에 동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는 그 모든 것에 대해 아픔을 느낍니다. 고통을 받습니다. 이게 예수님의 제자의 삶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불의와 부정의, 비극과 슬픔들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탄식은 기도로 변하여 하나님께 올려 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래 전 부산에서 사역하다가 귀국하신 한 독일 선교사님의 기사가 생각납니다. 제가 부산에 오기 전인지 후인지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 분은 수십 년의 한국 사역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내용은 그 분이 수십 년 동안을 매일 밤 부산을 위해 축복의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창문가에 서서 두 손을 창밖으로 내밀어 매일 밤 부산을 축복하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엊그제 동네 분 몇 사람이 홀리조이센터 앞을 지나가면서 손가락으로 기도손을 가리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중의 한 분이 말했습니다. <저기 봐. ‘주님, 부산을 축복하소서.’라고 새겨져 있잖아! 여기 드나드는 사람들이 부산을 위해 기도한다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산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부산에 그리스도인이 적음에 대하여, 부산에 조직폭력배가 많은 것에 대하여, 교통신호를 다반사로 위반하는 사람들의 습관에 대하여, 부산의 교계를 위하여, 한국 교회를 위하여, 여당과 야당, 한진중공업 사태와 희망버스로 대변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노사 문제, 더 크게는 우리 민족 전체의 분단과 이로 인한 비극 등, 우리가 탄식하고 안타까워야 해야 할 문제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탄식과 기도야말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의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이 악하고 하나님의 의가 구현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서 괴로워해야 할뿐 아니라, 우리라도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과 다르게 살았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사울은 권력을 위해 다윗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국가의 공신, 가깝게는 사위인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것이 사울이 살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과 달랐습니다.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만약 다윗이 기회를 얻어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면 권력 앞에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것과 다를 바 없고, 사울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전 다르게 살겠습니다. 세상이 다 악해져도 저는 선하게 살겠습니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 세상의 비극에 동조자가 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제게 힘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궁극적으로는 인간성에 대해 탄식합니다. 이 세상에 여러 가지 아픔은 결국 죄성에 깊이 물든 인간성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그 죄성이 자기 자신에게도 있음을 압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저지르는 악에 대해서만 가슴아파하는 게 아니라, 그 이전에 자신의 영혼에 깃든 죄성 때문에 탄식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자기 자신의 한계에 대해 탄식했습니다. 로마서 7장 18절 이하에서 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게 바울의 주리고 목마른 모습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과 다릅니다. 누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면 <너나 잘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습니다. 저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저도 마음아파하고 있습니다.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 우리 함께 잘 해 봅시다.>라고 겸손하게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다툼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다툼이란 <자신은 잘 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만 잘못하는 것처럼 말할 때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두를 끌어안고 함께 잘 해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궁극적으로 십자가 앞에 나가 엎드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깊이 스며있는 죄성을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의지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편 63편 1절의 말씀입니다. 또 시편 84편 2절을 보면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라고도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부르짖으시길 바랍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받는 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배부름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굶주림과 거룩한 목마름을 보고만 있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배부르게 하시고, 마시게 하십니다. 다윗은 이 은혜를 시편 23편 5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할렐루야! 

이 세상의 불의와 자신의 죄성 때문에 탄식하며, 하나님의 의에 굶주리고 목말라한 사람들에게는 궁극적으로 천국의 만찬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 곳에는 더 이상 굶주림도 없고, 목마름도 없을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의로 넘쳐흘러 양식이 되고 음료가 되는 나라입니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계시록 22장 1-2절의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 모두 거룩한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살길 원합니다. 그 의를 추구하며 살길 원합니다. 그 의에 목말라하고, 배고파하면서 살길 원합니다. 이를 위해 엎드려 기도하길 원합니다. 하늘의 양식을 먹고, 하늘의 음료를 마시는 그 날까지, 의의 백성으로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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