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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경 상고(詳考) (행 1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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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상고(詳考) (행 17:1-15) 
 
 
오늘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의 사역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빌립보를 떠난 바울 일행은 빌립보 남서쪽 약 50km 지점의 “암비볼리”와 그곳으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50Km를 떨어진 “아볼로니아”를 통과한 후, 다시 남서쪽 약 60km 지점에 있는 “데살로니가”(1)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은 로마 원로원의 의원 키케로(Cicero, B.C. 106-43)가 ‘우리 영토의 심장부’라 불렀던 전략적 요충지이며 정치·경제의 중심지였습니다. 많은 매를 맞고 옥에 갇혔던 사람들이 상당한 거리를 이동했음을 보게 되는데,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라는 말씀을 기억나게 합니다. 감옥에서조차 찬미할 만큼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들이었으니 여행의 어려움 정도는 거뜬했던 모양입니다.

데살로니가에 이르자 바울은 “자기의 규례대로”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습니다(2). 강론은 일방적인 선포가 아닌 토론 형태의 가르침입니다. 이 토론은 성경의 “뜻을 풀어”주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여,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귀납적 방식의 성경공부였습니다(3). 구약성경의 내용은 대충 알고 있지만 예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에게, 기독론 중심의 성경공부를 “세 안식일”(2) 동안 했던 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었지요.

그러자 회당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이 확신을 얻고 바울과 실라를 좇았습니다(4). 얼마 후에 바울이 이들에게 데살로니가서를 썼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이 마게도냐와 아가야와 각처에 퍼진 것을 기뻐하면서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 했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을 기억했습니다(살전 1:5,8; 2:13). 이를 보면 구속사적 관점의 성경공부가 대단히 유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단순한 교훈을 찾는 것에 비하면 구속사적인 공부는 “뜻을 풀어” “증명”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랐겠지만, 성령님께서는 능력과 큰 확신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소비자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편리함과 편안함에 익숙해서 가급적이면 쉽고 단순한 것을 선호합니다. 한 눈에 이해할 수 있는 것, 한 마디로 요약해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긴 과정은 무시하고 빨리 결론을 듣기 원하지요. 성경을 대하면서도 당장 삶에 도움이 되는 정보에 귀 기울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현대인들을 바울이 세 안식일 동안 가르쳤던 데살로니가의 회당에 참석시켰다면, ‘과연 3주 동안 의욕적으로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생각해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도자는 청중의 욕구에 맞추어 말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맡은 자는 언제든지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믿고 말씀의 본의를 잘 드러내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강하게 역사하시자 “유대인들은 시기”심이 발동했습니다. 그들은 장터의 건달들인 “괴악한 사람들”을 동원해서 “성을 소동케”하며 “야손의 집”에 쳐들어갔습니다. 그곳에 머물던 바울 일행을 발견치 못하자 대신 야손과 형제를 “읍장”에게 끌고 갔지요(5). 실제로 사람들을 선동한 것은 자기네였지만 전도자들이 “천하를 어지럽게”한다고 고발했고,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다른 왕을 말한다고 모함했습니다(7). 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중에 메시아사상에 근거를 둔 급진 혁명 세력은 로마 당국도 경계했던 때였으므로 무리와 읍장은 이 말을 듣고 불안했습니다. 아마도 단단히 다짐을 받은 후에 보석금을 받고 놓았던 것 같습니다(9).

사도 일행에 대한 고발 내용은 예수님께서 가이사를 대적하는 자라는 모함을 받으시던 상황과 비슷합니다(눅 23:2). 이런 사건들 이면에는 언제나 교회를 훼방하는 사단의 역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여서 성령님의 큰 확신이 있는 곳에는 사단의 큰 훼방도 따라옵니다. 교회는 우리 주님의 재림 때까지 끊임없는 영적 전투의 현장에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따라 바르게 살지라도 모든 사람이 박수쳐 주는 평안 속에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도처럼 우리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도 괴악한 사람들 때문에 가정에 분란이 일어날 수 있고, 직장에서 기존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라고 비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롬 8:17)을 각오해야겠지요.

그분과 함께 고난 받기를 각오했다고 해서 일부러 위험 속으로 뛰어들 필요는 없습니다. 10절을 보면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데살로니가 남서쪽 약 80km 지점에 있는 “베뢰아”로 피신시켰고, 전도자들은 곧장 “유대인의 회당”에 다시 들어갔습니다. 교회는 애써 순교하기를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애써 말씀 전하기를 추구했음이 잘 드러납니다. 베뢰아는 올림푸스 산맥 기슭의 작은 언덕에 있었는데 정치적으로 비중이 큰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흔히 바울이 대도시를 공략하는 선교전략을 사용했다고 하지만 꼭 그렇게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1절의 “암비볼리”도 빌립보 보다 큰 요충지였지만 그냥 통과했었지요. 사도행전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획일적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베뢰아 사람의 특징을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라 소개합니다. ‘마음이 고결하고 도량이 넓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평가는 그들의 말씀 받는 태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11)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아닌 것 같다면 가볍게 배척해버리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무슨 말을 하든 쉽게 받아들여 맹종하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열정을 다하는 태도로 말씀을 받아들였고, 그 후에 정말 그런지를 성경으로 자세히 살펴 곰곰이 검토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무엇을 말하는지 진지하게 귀 기울여 들었고, 신중하게 말씀으로 확인했습니다.

성경은 충분히 들어보기도 전에 까칠하게 뚱기는 태도를 칭찬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아멘’으로 영접하는 태도 역시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런 태도들은 경솔하거나 경박스럽지요. 진리의 말씀에 대해 품위 있는 태도는 겸손하게 말씀을 받는 동시에 신중하게 검토합니다. 열정이 있으나 가볍지 않아 잔잔하게 흐르는 깊은 물 같습니다.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베뢰아는 한적한 시골 입니다. 품위 있는 귀족들은 대도시에 더 많았겠지요. 하지만 하나님 나라 입장에서는 베뢰아 사람들이 더 품위 있다고 평가됩니다. 흔히 크게 되려면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보다 갈릴리 촌 어부들이 더 품위 있는 하나님 백성이었으니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온 열정을 다하는 태도, 그 후에 말씀을 정리하며 의미를 되새기는 태도가 오랫동안 예배당을 출입하면서도 한 번도 없었다면 심각하게 생각할 일입니다. 말씀을 가볍게 듣고 쉽게 잊어버린 후 자기 생각을 따라 생활하는 것이 대다수 신자들의 태도입니다만, 말씀을 통해 능력과 성령의 큰 확신을 맛보기 원하면서도 이러한 자세가 습관화 되어 있다면 마음을 새롭게 해야겠지요. 우리 가운데는 한 때 온 열정을 다해 말씀을 받아들이고, 설교문에 줄을 쳐가며 부지런히 말씀의 본의를 확인하고, 소감문을 쓰면서 그 말씀을 되새기고, 날마다 모여 말씀을 나누는 노력들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마땅히 권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좋은 태도를 가졌던 베뢰아 회당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였습니다(12). 그런데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이 사실을 알고 거기까지 와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13). 지독한 사람들입니다만, 바울 역시 과거에는 이들처럼 열정적으로 믿는 자들을 핍박했었지요. 핍박하는 자는 믿는 자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지만, 믿는 자는 핍박자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하기 때문에 더욱 안타깝고, 그들을 위하여 예수님처럼 기도하게 됩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나 역시 그들과 같았음을 생각하면 핍박 받는 중에 오히려 주님의 은혜가 놀랍게 다가옵니다.

사도가 줄기차게 핍박을 받으면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오히려 찬미하고 오히려 열정적으로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 동역자들을 남겨둔 채 홀로 “아덴”까지(15)에 도피한 후에도 그 도시의 넘쳐나는 죄악에 담대히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이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늘 그의 마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고 고백했었지요. 끊임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성도의 하나님 백성다움을 드러낼 수 있게 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의 사역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성경을 피상적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당시에는 성경을 개인이 가지고 다니는 일이 불가능했기에, 어쩌면 더 마음에 새겨서 담으려고 했었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오늘날은 언제든지 성경을 찾아서 읽을 수 있기에 오히려 말씀을 마음에 새기려 하지 않을 수 있겠지요. 말씀에 대한 피상적인 태도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품위를 잃게 만듭니다. 온 교회가 간절한 마음으로 주일 말씀을 듣고, 그 후에 저녁에 가정 경건회를 통해 가족이 함께 말씀을 상고하고 나눌 수 있는 모임이 되면 좋겠습니다.

말씀에 대한 자세를 점검해보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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