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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를 두려워하고 피하고 싸우라! (삼하 1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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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두려워하고 피하고 싸우라!  (삼하 11:1-27)
 

1. 지울 수만 있다면 …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생애에서 지울 수만 있다면 지우고 싶은 일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부끄러웠던 일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생애에서 가장 큰 오점으로 남을 만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회복이 불가능한 어려움이나 아픔이나 손실을 당한 것은 무엇입니까?

지난 해, 이스라엘 영화 <부채(The Debt)>를 리메이크하여 만든 미국 영화 <언피니시드(The Debt)>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과거의 잘못이 어디까지 그 사람을 따라다니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영화는 두 사건을 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첫 사건은 1966년에 일어났습니다. 세계 최고의 첩보기관인 이스라엘의 ‘모사드’의 최정예 요원 세 사람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끔찍한 의학 실험으로 유태인 수천 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한 나치전범 ‘보겔’ 박사를 납치해 이스라엘 법정에 세우라는 임무를 받고 통일 전 동독으로 떠납니다. 

그들은 동베를린에 잠입했으나 보겔을 산 채로 납치해서 귀국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귀국한 그들은 “돌발 상황이 발생해서 현지에서 사살해버렸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30년이 흐른 1997년, 두 번째 사건이 터집니다. 당시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로 구성된 모사드 요원 중 부부가 된 레이첼과 스테판 사이에 태어난 딸 ‘레이첼’은 부모의 ‘영웅담’을 책으로 써내 출판기념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두 요원의 동지였던 데이빗이 그 자리에 참석해서는 돌연 자살을 해버립니다. 

게다가 그 자리에 자신을 ‘보겔 박사’라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나타납니다. 도대체 30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젊은 모사드 요원들이 30년 전 동베를린에 묻어두고 왔던 ‘감춰진 진실’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러한 내용의 이 영화는 “지우고 싶은 과거일수록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다 ”는 메시지를 아주 강력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도 잊고 싶고 지울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지우고 싶은 과거는 없습니까? 

2. 다윗의 생애에서 가장 부끄러운 일

오늘 본문은 다윗이 지우고 싶어 했던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오점이 되고, 치명적인 약점이 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 사건이 무엇인지 그 사건의 내막 속으로 한 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1) 간음 죄(1~5)

1절을 보십시오. “그 해가 돌아와!” 새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유대력으로는 3월이 정월이기 때문에 NIV 영어 성경은 이 부분을 “봄에(In the spring)”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봄은 물론 계절적으로도 봄을 말합니다만,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다윗 개인의 생애에서도 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 나라가 안정되고, 예루살렘을 새 도읍지로 정한 후 거기에 아름다운 백향목 궁전을 건축했으며,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와서 성전 건축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블레셋을 비롯한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여 太平聖代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봄은 한편으로 유혹의 계절입니다. 봄바람이 살랑 살랑 불 때 마음에도 바람이 들어 사고를 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1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팔레스타인 지역은 雨期와 乾期가 뚜렷하게 구분이 되지 않습니까? 우기는 대략 10월에서 3월까지 인데, 나라의 중요한 행사는 주로 비가 그치는 봄에 치러졌습니다. 전쟁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본문에서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라는 말은 비가 그쳐서 다시 전투를 재개하게 된 때라는 말이며,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는 말씀으로 볼 때, 암몬과의 전투가 그동안 우기로 인하여 소강상태에 있다가 비가 그치자 다시 본격적으로 재개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전투는 다윗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여 선두에 서서 전투를 지휘했었는데, 오늘 본문에 와서 다윗은 전쟁에 나가지 않았으며, 군사들이 한참 전투를 벌일 시간에 침상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잤고, 저녁에 일어나서는 왕궁 지붕 위로 올라가 이러 저리 거닐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본 것이 무엇입니까? 한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여러분, 어쩌다가, 뜻하지 않게 그런 장면을 보았다면 어쩌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당시 중동 지역에서는 집안에 우물이 있는 경우가 있었고, 그래서 대부분 집안에서 목욕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목욕하는 것을 옆집에서나 길에서는 엿볼 수 없었습니다. 담이나 다른 건물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붕에서 보면 그것이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禁忌事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목욕하는 장면을 본 이유는 그가 있던 왕궁이 일반 주택에 비해 높은 탓도 있고, 무엇보다 왕궁이 시온산, 즉 높은 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주변 집들이 거의 다 낮아서 보려고 마음만 먹으면 쉽게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윗이 보기에 그녀가 “심히 아름다워 보였다”는 것입니다(2). 사실 얼핏 보면 잘 모릅니다. 그렇지요? 따라서 “심히 아름답게 보였다”는 말은 실제로 밧세바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는 말도 되지만, 다윗이 목욕하는 밧세바를 자세히 보았다는 말이고,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마음에 욕심을 품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욕심은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사람을 보내어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했습니다. 

그녀는 “밧세바”라는 여인으로, 유부녀요 더군다나 국가에 충성하는 군인인 “우리아”의 부인이었습니다. 당시 우리아는 암몬 자손과의 전투에 나가 나라와 민족, 좁게는 왕인 자신을 위하여 목숨 걸고 싸우는 중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편을 전쟁터에 보낸 여인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마음의 유혹을 누르고 죄를 범하고 싶어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정욕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한 다윗은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고, 밧세바를 데려와서 동침했습니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녀를 돌려보냈습니다. 

이 일에 대해 혹자는 밧세바에게 잘못이 있다고 말합니다. ‘밧세바가 왕을 유혹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목욕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밧세바가 다윗의 청을 거절하지 않은 행동도 밧세바에게 잘못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비가 오지 않는 건조한 날씨에 하루를 보낸 후 자기 집에서 목욕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萬人之上의 權勢를 가진 왕의 명령을 거절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다윗은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무리 다윗이 은밀하게 죄를 즐기고 아무도 모르게 거기서 빠져 나오려고 해도 그것이 쉽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둘째 치고, 사단이 천신만고 끝에 잡은 기회를 놓치겠습니까? 사탄이 죄악의 덫, 파멸의 그물에 걸려든 다윗을 그대로 놓아줄 리가 없습니다. 죄를 범하면 그 죄는 씨가 되어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윗의 이 범죄로 말미암아 밧세바는 임신하였고, 그 사실이 다윗에게 전해졌습니다(5). 큰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에 따르면 여자가 간음하여 범죄한 사실이 드러나면 그 여자만 아니라 간음한 남자까지 돌로 쳐 죽이는데, 남편에 전선에 나가 있는 동안 아기를 가져 점점 배가 불러오는 상황이니 밧세바나, 그리고 밧세바를 임신케 한 다윗까지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윗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입니까? 그는 어릴 때부터 역사하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입술의 신앙이 아니라 행동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극심한 고난 중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게다가 수많은 시와 찬미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런 다윗이 범죄했습니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야 언약을 받은 사람이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백성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준수하는 사람이었고, 사람에 대한 신의를 끝까지 지키는 인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범죄했습니다. 통일 이스라엘의 첫 왕이 되어, 예루살렘을 왕도로 정했으며, 남쪽으로 블레셋과 아말렉을 치고, 동쪽으로 암몬과 모압과 에돔을 치고, 북쪽으로 아람을 치므로 외교적인 안정을 이루었습니다. 거기다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신 사건과 성전을 건축하려는 의지를 강력하게 나타내 보이면서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확실한 인정까지 받았습니다. 바로 이런 성공과 인정과 평안함이 그를 범죄케 했습니다. 다시 1절을 보십시오. 군대를 위험한 전쟁터에 보내 놓고 자신은 낮잠을 잤습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일이 잘 될 때 조심해야 하고, 평안할 때 조심해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꽃 피고 새우는 인생의 봄날을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도 항상 깨어 근신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영웅 다윗이 이렇게 죄 가운데로 쉬 떨어졌다면 나 자신은 어떨까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 될 때, 평안할 때, 바로 그 때가 바쁘고 힘들게 살므로 잠재워져 있던 욕망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한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속에는 아담과 하와에게 있었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저와 여러분을 향해 바로 이것을 조심하라고 경고(요일2:16)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로 늘 깨어 있으며, 나태해지지 않고 주어진 일에 한결같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죄를 은폐하기 위해 또 죄를 짓고(6~13) 

다윗은 밧세바가 임신한 사실을 알자, 그것을 감추기 위해 戰場에 나가 있는 우리아를 급하게 소환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아가 자기 부인과 함께 시간을 가짐으로서 밧세바가 임신한 아이가 우리아의 아이인 것처럼 꾸미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전선에서 돌아온 우리아는 먼저 왕에게 문안했습니다. 다윗은 그에게 총사령관 요압과 군사들의 안부와 현 전선의 상황을 물은 후, 빨리 집에 가서 “발을 씻으라” 했습니다(8). 여기서 “발을 씻으라”는 말은 ‘휴식하라’는 히브리식 표현입니다. ‘집에 가서 푹 쉬라’는 말입니다. 그러고는 “왕의 음식물” 곧 전쟁 영웅을 대접하는 선물을 함께 보냈습니다. 우리아에게 特別 休暇와 더불어 特別 褒賞까지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우리아는 자기 집으로 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그의 주의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잤습니다(9).” “왕궁 문”이란 궁성 문을 지키던 시위병들이 거처하던 숙소(왕상 14:27,28)를 의미합니다. 

즉 우리아는 다윗 왕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왕궁의 시위병들과 함께 밤을 지새웠습니다. 우리아가 이렇게 행동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11절,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에서 불 수 있는 대로 첫째 이유는, 전우들이 전방에서 적들과 싸우느라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자기 혼자서만 집에서 편히 쉬는 것을 차마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언약궤”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이 곧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이라는 의미에서 언약궤를 갖고서 전쟁에 나갔습니다(민10:35, 36;14:44;수 3:6). 따라서 “언약궤가 … 바깥들에 진 치고 있다”는 우리아의 말은 ‘하나님께서도 전쟁터에서 싸우고 계신데 어찌 내가 편히 쉴 수 있겠습니까’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우리아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정말 좋은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戰友愛가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다윗과 대조됩니다. 

그렇지요? 자신과 生死苦樂을 같이 했던 戰友들이 전쟁터에서 목숨 걸고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그 순간에 낮잠이나 자고 바람이나 피고 있었으니 말이죠. 어쨌든 평상시의 다윗 같으면 우리아의 이러한 충직한 모습에 감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한 다윗은 그 지각과 분별력이 둔하여져서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기 죄를 숨기고 가리기에 급급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죄는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아를 통해서 깨닫지 못한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짓고 있습니다. 우리아가 자신의 죄를 알게 될 경우 율법에 고소하여 밧세바가 돌에 맞아 죽게 될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자신의 수치가 드러나 왕권이 위태롭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이튿날, 다윗이 그를 불러서 그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여 저녁때에” 그를 다시 자기 집으로 가게끔 만들려고 했습니다(13). 

그러나 우리아는 취한 가운데서도 조금도 흐트러트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날 밤도 집으로 가지 않고 그 주의 신하들과 더불어 군인 막사에서 잤습니다. 우리아는 무의식중에서도 군인 정신이 충만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왕에 대한 충성심과 동료들에 대한 의리가 있는 훌륭한 군인이었습니다. 이런 우리아의 감동적인 모습은 도리어 다윗으로 하여금 그를 더 미워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처음 죄 짓기는 어렵지만, 한 번 범죄하고 나면 그 다음은 더 깊어지고 커지고 심해질 수 있습니다. 지금 다윗이 보여주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는 자신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우리아를 앞에 두고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전투 중인 군인을 억지로 부르고, 한사코 피하는 그를 억지로 자기 부인 곁으로 보내려 하고, 심지어 술을 마시게 하여 인사불성으로 만들어 그를 자신의 죄악을 가리는 데 이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죄는 늪과도 같습니다. 한 번 빠지면 점점 깊이 빠져가는 것이죠. 그리고 죄는 마약과도 같습니다. 한 번 빠져들면 거기서 헤어 나오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3) 죄를 가리지 못하자 죽이고(14~25)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이용하여 자신의 죄를 가리려고 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다윗은 더 악랄하게 우리아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깁니다. 우리아를 다시 전투 현장으로 보내면서 요압에게 전달할 편지를 그 손에 들려 보냈습니다. 편지 내용은 지휘관인 요압에게 ‘우리아를 치열한 전투의 선두에 세워 적군에게 죽게 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15). 요압은 그 명령을 따라 암몬 족속의 랍바 성을 두루 살핀 후 적군의 용사가 있는 곳을 알아 두었다가 우리아를 그곳으로 배치시켰습니다. 그러자 암몬 정예 용사들이 우리아 부대를 공격했고, 우리아 부대는 잠시 들로 후퇴했다가 다른 부대의 지원을 받아 다시 랍바 성문까지 진격했습니다. 그런데 성문에 너무 가까이 접근했다가 성 위에서 쏘는 살에 맞아 우리아를 포함하여 몇 명의 군사가 戰死하고 말았습니다. 

군사 작전 면에서 볼 때, 적이 있는 성 가까이 가면 죽기 십상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도 요압은 우리아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고, 그 명령에 복종하여 성 밑까지 “돌격 앞으로” 하는 것이 마치 죽을 자리 찾아가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아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대단한 군인정신이죠! 이스라엘은 최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에 납치돼 5년간 붙잡혀 있던 ‘길라드 샬리트(24)’ 병장을 구하기 위해 1,027명의 팔레스타인 포로들을 돌려보내기로 했습니다. 포로 중에는 테러범 등 악질 살인자들이 상당수 섞여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 뿐 입니까? 미국은 아직도 6·25한국전쟁 때 사망한 미군 유해를 발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가족 만 아니라 국가와 국민 모두에게 소중합니다. 설사 그가 죽었다 할지라도 국가는 최선을 다하여 그를 예우하려고 합니다. 한 병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가나안 원주민인 헷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야말로 전쟁 영웅이지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음모였다면, 누군가 그를 죽이기 위하여 일부러 꾸민 일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아와 몇 충성스러운 군인들을 죽게 만든 것은 바로 다윗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다윗의 모습을 통해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 죄가 당사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죽게 하는 時限爆彈과도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깨어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하면서 거룩하고 신령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4) 자신이 죽게 한 자의 아내를 빼앗고(26~27)

다윗은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확실한 신앙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순간의 욕망을 이기지 못해 남의 아내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감추기 위해 거짓되고 비열하고 잔인하게 행동했습니다. 그것이 실패하자 그녀의 남편을 죽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아가 죽은 후에 뻔뻔스럽게도 그 사람의 아내 밧세바를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자신이 죽인 그녀의 남편 무덤의 흙이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다윗은 간음죄, 탐심의 죄, 우리아를 죽이는 살인죄까지 범했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여 계획적으로 저지른 일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그 소행이 악한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어떻겠습니까? 

그는 죄를 은폐하고자 계속해서 악을 행함으로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으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죽고, 집안에서 강간과 죽임과 배신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고, 국가적으로는 끊임없는 환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부패한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 결과로 그가 잃은 것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1편이 말하는 대로 죄의 길을 “따르지” 않는 것이 좋으며, 설사 본의 아니게 그 길을 갔을지라도 거기 멈추어 “서지” 않아야 하며, 더더우기 죄의 길에 주저 “앉지” 않아야 합니다(시1:1). 그렇게 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죄가 얼마나 빨리 번지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그 죄는 점점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다룰 수 없는 무서운 힘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고 말씀하셨습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끌려 다닐 뿐이지 않습니까? 

죄에 빠지면 죄가 이끄는 대로 이러 저리 끌려 다니면서 몸과 마음과 영혼과 삶이, 그리고 가정이, 즉 한 사람의 전부가 엉망으로 파괴되고, 결국에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멸합니다. 마치 도미노 게임처럼 자신도, 가정도, 그리고 주변 사람들까지 와르르 무너지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두려워하고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죄와 싸워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미국에서 수많은 부흥회를 인도했던 빌리 선데이가 죄에 대해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나는 죄와 싸우겠다. 머리를 갖고 있는 한 죄를 받아 버리겠고, 이를 가지고 있는 한 죄를 물어뜯겠다. 

내가 늙어서 주먹도, 발도, 이도, 힘도 없다면 영광의 집에 들어가기까지 잇몸으로라도 죄와 싸우겠다.” 부흥회를 인도했던 그가 이렇게 죄에 대해서 강력한 의지를 가지면서 원색적으로 표현한 것은 그 만큼 죄의 파괴력이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도 죄를 무시하지 마시고, 죄를 그대로 버려두지도 마시고, 죄와 싸워 이기시를 바랍니다.

3. 죄와 싸워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무엘하 11장은 다윗의 치명적인 범죄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의 부끄러운 범죄 사실을 이렇게 낱낱이 기록되어 오고 오는 성도들이 열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얼마나 지우고 싶은 실패 기록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사무엘하는 총 24장인데, 거의 중간에 해당하는 11장, 12장에서 다윗이 치명적인 죄를 범하면서 상승곡선을 타던 그의 인생이 하강곡선을 그리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다윗은 왕이 되기까지 사울의 미움을 받아 죽음 일보직전까지 오가며 10여 년에 이르는 도피생활을 했습니다. 가히 상상하기 힘든 고통을 겪었지요. 그러나 그의 그 고난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었으며, 더 깊은 영성과 예술성으로 수많은 시와 노래를 짓게 했으며, 인격의 깊이를 더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내외적으로 태평성대를 누리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상승곡선의 정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범죄로 인하여 그의 삶은 내리막길로 치닫습니다. 범죄한 다윗의 내리막은 바라보기가 너무나 처량할 정도입니다. 먼저, 밧세바가 임신한 아이가 병들어 죽습니다. 아들 암논이 누이동생인인 다말을 성폭행합니다. 다말은 처량한 신세가 되고, 가장 아끼는 아들 압살롬은 자기 형 암논을 살해합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외국으로 도피합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사면을 받아 고국으로 돌아온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킵니다. 다윗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던 도피생활을 다시 하게 됩니다. 심지어 신발도 신지 않고 머리 묶을 틈도 없이 급하게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윗의 조카인 요압이 압살롬을 살해합니다. 가장 아끼던 아들이 자기 사촌의 창에 찔려 죽은 것이죠. 다윗의 비극은 그것으로도 끝이 아니었습니다. 세바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세바의 반란이 해결되자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로 말미암은 흉년에 대한 해결을 호소합니다. 블레셋이 다시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24장에 이르러 다윗의 어리석은 인구조사로 말미암아 재앙이 이스라엘에 임하여 온역으로 7만 명의 백성이 죽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기록이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주려는 사무엘서를 기록한 분의 의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썩어져가는 욕심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피하면서 죄를 멀리 하고 하나님께만 더 가까이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안팎에 있는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 반드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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