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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례 요한처럼 (요 3: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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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처럼 (요 3:22-30)


지혜로운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늘 세 가지를 살피며 살아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된 지식은 나를 바로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하나님을 아는 자만이 나를 알 수 있고, 나를 아는 자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나를 알면 겸손해집니다. 또한 나를 알면 열등의식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둘째,“내 나이 몇 살인가?”하는 질문입니다. 자기 나이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 제 나이에 걸맞게 사는 사람이 흔하지 않습니다. 나이를 안다는 것이 뭡니까?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 추구해야 할 것과 포기해야 할 것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나이를 바로 알면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또 과욕과 허욕에 눈멀지도 않습니다. 

셋째,“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질문입니다. 10년 후, 20년 후 나는 무엇을 할 것인지, 인생의 황혼기에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지, 그리고 인생의 종착역은 어디인지, 죽음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는지를 알고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심각한 질문에 대해 분명한 해답을 주는 것이 본문입니다. 본문은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세상에 왔던 세례 요한이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자신의 심정을 밝힌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세례 요한만큼 예수님의 극찬을 받은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1절에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 대해 말씀하시기를“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아주 늙은 부모 사이에서 기적적으로 태어난 외동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삼십 세가 될 때까지 일반 청소년들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선지자로서 대중 앞에 두각을 나타낼 때까지 광야에서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1:80). 그는 포도주를 평생 입에 대지 않았고,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삼십대 초반에 벌써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주목하는 위대한 선지자의 위치에 올랐지만 그 인기도 잠깐이었습니다. 

일 년 남짓한 아주 짧은 기간 동안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초라하게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는 너무도 비참하게 마지막 생을 마쳤습니다. 헤롯왕의 부도덕함을 직설적으로 책망하다가 투옥되었고, 얼마 후 헤롯왕의 간교한 아내인 헤로디아에 의해 목이 잘렸고, 그의 머리가 쟁반에 담겨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마가복음 6:17~29). 이와 같은 그의 비극적인 생을 놓고 예수님께서 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셨는지 얼른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심정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을 때 세례 요한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부근 사람들이 다 그에게 나아가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마태복음 3:5~6).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예루살렘과 유대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파고들었고, 갈릴리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으며,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양심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은“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하는 그의 외침에 양심이 찔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수다한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제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우뚝 섰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등장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눈에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이나 별 다름이 없어 보였습니다. 두 사역이 거의 비슷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도“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세례 요한도 물로 세례를 주었고, 예수님도 그의 제자들이 행한 것이기는 하지만 물로 세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4:2). 

세례 요한에게만 몰렸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등장하면서 유사해 보이는 사역 때문에 두 인물을 놓고 비교하게 되었고, 결국은 어느 한편을 선택하기 시작했습니다. 둘 중에 누가 진짜 메시아인가를 놓고 토론이 벌어지고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게 된 반면 세례 요한의 주변에는 점점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는 홀로 버림받은 것 같은 외로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본문 25절~26절을 보면“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돠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아마 세례 요한의 제자와 유대인 사이에 손 씻는 의식 때문에 논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논쟁을 하는 중에 그 제자의 마음이 몹시 상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다투던 유대인이“너희 선생보다 예수가 훨씬 더 인기가 있다. 봐라. 사람들이 다 그리로 가지 않느냐”라는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마음이 상한 제자들이 돌아와서 세례 요한에게 말한 내용이 본문 26절에“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전부 예수님에게만 몰려가는 것을 보고,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사람은 세례 요한을 존경하고 따랐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상당수의 제자들은 아직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기 선생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크면 클수록 예수님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선생이 하루아침에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것을 보고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동시에 혜성처럼 나타나 백성들의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예수님께 대해서는 은근히 질투를 느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지도자의 입장서는 중대한 위기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월등히 탁월한 사람이 나타나므로 자신의 입지가 약해지면 피해 의식 때문에 파괴적인 경쟁을 일삼다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는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지는 허탈감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은 모든 지혜를 총동원해야 하는 중대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요한이 바로 이런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도자의 입장에서 견디기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는 제자들이 경쟁자를 질투하는 것을 보는 일일 것입니다. 이럴 때 지도자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지도자의 됨됨이를 재어볼 수 있는 잣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보인 세례요한의 처신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마태복음 11:11)라는 예수님의 평가가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一. 세례요한은 자신의 분수를 알았습니다. 

본문 27절에“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 요한에게 와서“랍비여 전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 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요한복음 3:26)라고 했을 때에 답한 세례 요한의 말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선생님 선생님이 증거하던 그 사람이 세례를 주니까 인기가 지금 그쪽으로 다 넘어 갑니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로 인기가 넘어가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지금 시기와 질투심에 속이 상해하는 말입니다. 아직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알지 못하고 한 말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왜 시기와 질투를 했을까요? 비교의식에서 일어난 마음입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님의 인기와 자기들의 스승인 세례 요한의 인기를 비교해볼 때 자기 스승보다 예수님의 인기가 더 높은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가 나보다 앞선 것처럼 보이면 자신을 초라하게 느껴 열등감에 사로잡히거나 아니면 시기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반면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뒤떨어진 것 같을 땐 우월감에 사로잡혀 그를 무시하는 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시기심이 가득한 제자들의 말을 들은 세례 요한은“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본문 27절)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의 권위는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요한 자신의 사명도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으로부터 각각 받은 바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어서 말하기를“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 할 자는 너희니라.”(본문 28절). 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가 평소에 제자들한테 분명히 밝힌 사실이 있었습니다.“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메시아로 오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작은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것은 바로 작은 소리의 역할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귀중한 소명이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셨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은 자기 분수를 넘는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로마서 12장 3절에 말씀하시기를“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하셨습니다. 

당시 세례 요한은 마음을 조금만 잘못 먹으면 자신을 메시아로 착각할 수도 있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를 향해 메시아가 아니냐고 묻는 바리새인들도 더러 있었고, 그를 메시아라고 믿는 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례 요한은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만 주목하도록 힘을 다했습니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명령하신 그 자리에 서있었습니다. 그 자리가 낮고 높은 것, 인기가 있고 없는 것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도 사람을 의식하면 그 사람의 신앙은 진실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의식하면 생색을 내게 되고, 자기를 알아주길 바라고, 자기를 높여주길 바랍니다. 자기를 알아주지 아니하면 섭섭해 합니다. 이것이 과연 올바른 생각이겠습니까? 요즘 교회에서 많이 시용되는 용어가운데 하나가“칭찬”이란 말입니다.“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이 칭찬의 말 가운데에는 무서운 함정은 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잠언 27장 21절에 칭찬에 대해 말씀하시기를“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하셨습니다. 칭찬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내는 시험의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무지한 자는 칭찬을 구할 것이고, 귀가 엷은 사람은 칭찬을 들으면 마음이 부풀어 우쭐할 것이고, 지혜로운 사람은 칭찬에 담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6장 26절에는“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칭찬받길 좋아하는 사람을 타락한 증거로 보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5절~7절 말씀에“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상을 꼬집은 말씀입니다. 그들의 타락상 가운데 하나가 나타내길 좋아하고 칭찬받길 좋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가리켜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 독사의 새끼라 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6장 2절~4절에 말씀하시기를“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하셨습니다. 선한 일을 할지라도 사람들의 칭찬과 박수를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칭찬으로 영광을 받으면, 이미 세상에서 상을 다 받은 것이 되기에 훗날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 받을 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칭찬을 경계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봉사하고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 있어서 세례요한에게 배워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경력을 보아 예수님보다 앞섰습니다. 예수님은 삼십 세가 되도록 먼지를 뒤집어쓰며 대패질을 하며 망치를 두드린 목수였지만, 그는 이십년이 넘도록 광야에서 거룩한 수도생활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매력을 줄 수 있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분수 이상의 것을 욕심 부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잊혀질지라도, 자신의 모습이 작아 보인다 할지라도, 제자들이 자기 곁을 떠날지라도, 그는 섭섭해 하거나 원망하거나 욕심 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매우 큰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자신의 분수를 잘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며 소인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외모가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듯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이나 역할도 각각 다릅니다. 누구든지 받은 것만큼 일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분수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야 말로 지혜 중에 지혜입니다. 이 지혜가 있는 사람은 자기 몸에 맞지 않는 옷을 탐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큰 옷을 입은 사람을 시기하거나 경쟁하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고등학교 사절에 여러 번 낙제를 했다고 합니다. 담임선생님은 그를 평하기를“이 아이는 무엇을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라고 단정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아들을 위로하며“네가 남과 같아지려면 성공할 수 없다 그러나, 남과 다르려고 한다면 크게 될 수 있다.”고 격려 했습니다. 어머니의 말처럼 아인슈타인은 남과 다르게 된 것입니다. 

동생에게 형을 닮으라고 해서는 안 되며, 형에게 동생을 닮으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형과 동생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각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질없이 남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를 즉 재능을 찾아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최선을 다해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며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몇 년 전 어느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부인이 티코차를 운전해 가다가 차가 밀려 서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곁에 있던 당시 최고급차인 그랜저 승용차를 몰고 있던 선글라스를 낀 멋쟁이 부인이 크락션을 울리기기에 창문을 내렸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그 차 얼마 줬어요? 우리 딸 하나 사주려고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이 상한 티코 운전자가 들은 척도 않고 그냥 갔습니다. 조금 가다가 신호등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그 그랜저 운전자가 또 크락션을 울렸습니다. 창문을 열었더니 또 하는 말이 “그 차 얼마 줬어요? 우리 딸 하나 사주려고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이분이 소이 상해 대답하기를 “벤츠를 샀더니 한대 끼워줬어요. 이제 됐어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과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각각 갑절을 남겼습니다. 받은 것과 남긴 것의 차이는 갑절이 넘습니다. 그런데 칭찬하신 말씀은 똑같습니다. 토씨하나 틀리지 않습니다. 달란트는 드라마에 나오는 탈랜트입니다. 드라마는 주연과 조연이 있습니다. 만약 연속극에 주연만 있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주연을 맡아야만 꼭 개런티가 많은 것도 아니랍니다. 평생 주연 한번 못하고 조연만 한 사람이 더 유명한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예, 전원주씨의 경우).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나일뿐입니다. 60억이 넘는 세계 인구 가운데 오직 나와 같은 사람은 한명도 없습니다. 나에게만 주어진 독창적인 재능이 있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二. 세례 요한은 자기가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알았습니다. 

본문 28절 말씀에“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 할 자는 너희니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자 왔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자기가 세상에 온 목적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자 왔다는 것입니다. 목적 없이 사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가끔 중년 여성들 가운데 자기가 왜 사는지 모르겠다며 허무감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것이 심하면 우울증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아이를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에 정신이 없이 살다가, 아이들은 자라서 학교나 직장에 가고, 남편도 이제 사회적으로 자리가 잡혀 자기 일에 분주한데, 텅 빈 집에 혼자 있노라면“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바라고 어렵게 공부를 했던가?”하는 목적 상실증으로 번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마지막 잎 새”의 작가“오 헨리”의 말처럼 길가의 조약돌도 필요 없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의 만물은 모두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존재합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겠습니까? 자기의 사명을 분명히 깨닫고 그 사명을 위해 열심히 살아갈 때 삶의 기쁨과 보람이 있습니다. 

여러 명의 선수들이 함께 뛰는 운동경기를 보면 각자의 선수들이 서 있는 위치가 있습니다. 각자의 위치를 지키면서 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마다 자기의 위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회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의 위치가 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의 할 일을 다 할 때 여기에 보람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공동의 사명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19절 말씀에“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신 하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므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책인 복음증거는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이 허락된 사명이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4장 1절~2절에 말씀하시기를“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하셨습니다.“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거역하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명령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책임을 전가하는 묘한 심리가 있다고 합니다. 

1964년 미국 뉴욕주 퀸스에서 키티 제노비스라는 자매가 30분 동안 강도로부터 공격을 받으면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8명의 목격자 가운데 그 누구도 경찰에 전화로 신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단순한 인간의 비정함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기대하는 책임전가 현상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실험에 의하면 한 사람이 고통을 당할 때 주위에 1명이 있으면 도울 확률이 85%였고, 4명이 있을 때는 31%로 줄었다고 합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것이 사람의 심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비정한 사회를 만들게 합니다. 도덕적인 인간이 모여서 비도덕적 사회를 만들어 가는 진정한 원인은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 때문이라고 합니다. 집단 가운데 있을지라도 개인의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한 영혼을 위하여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전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사명 감당을 미루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 또 한 명의‘제노비스’가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살리지 않는 사람은 죽이는 사람과 다름이 없습니다.

어느 대그룹 화사에 이러한 표어가 있다고 합니다. 
내가 안하면 누가 하랴! 
지금 안하면 언제 하랴! 
여기서 안하면 어디서 하랴!
직장 일도 이러할 진데 지옥을 향해 줄달음질하는 불쌍한 영혼구원이겠습니까? 이 소중한 일을 위해 내가 안하면 누가 하겠습니까? 지금 안하면 언제 하겠습니까? 여기서 안하면 어디서 하겠습니까?

지금 우리나라 산악인 박영석 원정대장이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되어 온 국민들의 마음을 애태우고 있습니다. 그가 구출된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이것이 생명이 주는 기쁨이며 생명의 가치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이와 같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2절~14절 말씀에“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의 핵심은 죽어가는 영혼구원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영혼 구원에 힘쓰는 나라는 언제나 역사의 중심에 섰습니다. 우리들은 예수 믿어 복을 받아 건강하고, 부자 되고, 자식 잘되는 것을 우선 적으로 바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그것이 아니라 영혼구원입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힘쓰는 개인이나 나라에 우리들이 바라는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성경이 마태복음 6장 31절~33절입니다.“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하셨습니다. 영혼 구원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가면 육신의 것을 채워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분수를 알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가 왜 세상에 왔는지를 알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삶을 본받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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