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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국에서 우리가 부를 찬송 (계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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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우리가 부를 찬송 (계 19:1-10)

기독교 신앙의 특징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찬송’ 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찬송하는 존재’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된 순간부터 성도의 삶은 온통 찬양으로 가득차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히 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우리 성도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찬양 드립니다. 구약에서는 애굽에서 구원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찬양 드렸고, 신약에서는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주신 ‘예수로 말미암아’ 찬양 드립니다. 이것이 우리가 찬양 드려야 할 이유입니다. 

그리고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고 했습니다. 찬송은 ‘항상’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배의 3요소인 말씀과 기도, 그리고 찬송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항상 있어야 하는 필수 요소입니다. 물과 공기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듯이, 찬송과 말씀과 기도가 없으면 더 이상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게 아닙니다.

찬양의 삶! 성도는 이 삶을 위하여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 (사 43:21). 성도의 존재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탄생하셨을 때 천사들이 찬송했고(눅 2:13), 목자들도 찬송했으며(눅 2:20), 시므온은 아기를 안고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다(눅 2:28)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찬송이 천국에서도 계속될 것을 보여줍니다. 본장은 가만히 앉아서 읽을 수 없는 놀라운 장입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 하늘의 모든 무리들이 찬송하는 모습, 어린양의 혼인잔치 모습, 그리고 주님께서 심판주로 백마 타고 오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음녀 바벨론의 멸망을 본 후’ 라는 의미입니다.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찬양하는 소리가 들려집니다. 음녀의 멸망이 얼마나 기뻤으면 “허다한 큰 무리”의 찬송이 들려졌겠습니까?

이것은 그만큼 참된 교회를 향한 ‘음녀’의 박해가 극심했음을 암시합니다. 종말 시대 대환란 기간동안 참 교회들이 받을 어려움이 어떠함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교회의 핍박자들이 “성도들의 피와 예수 증인의 피에 취할 정도”(계17:6) 였으니 그 피해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런 환란을 견디고 나온 성도들이 천국에서 부를 찬송이므로 “허다한 큰 무리의 찬송”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어린양의 보좌 앞에서 큰 무리가 되어 주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노래하게 될 것입니까? 본문을 통하여 ‘장차 천국에서 저와 여러분이 부르게 될 찬송의 내용’을 함께 생각하며, 남은 평생 찬양의 삶에 매진하는 계기가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하나님께 있는 구원과 영광과 능력을 찬송함(1절)

1절=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하늘에 허다한 무리’는 일차적으로 셀 수 없는 천사들의 수를 가리킵니다. 이들이 계속하여 노래하기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라고 합창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들의 찬송 내용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Who God is) 하는 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찬송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용서를 주시며 영원한 생명을 공급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자들입니까? 우리는 본래 죄 가운데 빠져 죽었던 자들이고, 지옥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잃어버린 자들’(the lost ones)이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의 팔을 펴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가능케 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주님 주시는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므로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찬송은 우리를 은혜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감사 찬송이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그들의 부끄러운 자리에서 들어올려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같이 죄로 인해 명예롭지 못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주십니다. 주님은 전혀 영광스럽지 못한 죄인들에게 주님의 영광을 나누어 주십니다. 주님은 타락한 죄인들을 영광스런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세워주십니다.

빌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할렐루야! 영광의 주님을 찬송합시다.

우리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의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좋아하는 찬송은 주로 어떤 내용의 찬송입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과 능력을 노래하는 찬송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장차 천국에서 우리 모두 부를 그 노래를 지금부터 열심히 부르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음녀 심판을 노래함(2-5절)

2절=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천사들의 찬송은 이제 음녀를 심판하신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주요 사역 중 하나인 음녀 심판을 노래할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에서 울려 퍼지는 찬송은 ‘하나님께서 순교자들의 피를 갚아주시는 분’ 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찬송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 지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참되고 의롭습니다. 주님의 성품 자체가 옳고 공평하고 의롭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은 옳고 공평하고 의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찬송 내용이 ‘주님은 의로우시다’라고 되어 있는 것은 언제나 옳습니다. 

여러분,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들은 모두 참되고 의로운 것들이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할 뿐 아니라 심판의 하나님도 찬송해야 합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동산을 화염검으로 지키시게 한 것은 의로운 일입니다.

노아 시대에 세상에 범람한 악을 홍수로 멸절시켜서 세상을 정화시키신 일은 공평한 일이었다고 성도는 인정해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의 포악과 음란과 동성연애의 더러움들을 유황불로 멸하신 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었다고 우리는 노래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핍박하던 애굽 위에 열가지 재앙으로 응징하시던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이스라엘을 뒤쫓아 오던 애굽의 철병거를 홍해에 수장하신 사건은 의로운 일이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을 인도하던 모세에게 대들던 고라 무리들을 땅 속에 파묻으신 하나님의 행동은 정당하고 공평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가던 북왕국 이스라엘을 앗수르에 팔아버린 일과, 부패하고 타락한 남왕국 유다를 바벨론에 붙이신 일들은 모두 참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우리는 찬송해야 합니다.

특히 마지막 시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무기력해진 종말 교회에 침투해 들어올 음녀, 곧 종교다원주의의 세력을 일거에 멸하시고 순교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실 하나님의 심판은 참으로 의로운 일입니다. 우리의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음녀는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할 혼합주의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음행으로 땅을 더럽히는 큰 음녀의 실체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최대 대적인 배도하는 음녀가 지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음녀와 타협하는 것은 신앙의 배교를 의미합니다.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지체하지 않습니다.

2절=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우리의 지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하신 모든 일에 대하여는 믿음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이를 노래해야 할 것입니다. 장차 구원받은 우리 모두는 보좌를 향하여 엎드려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4절= “또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여기 이십사 장로는 구원받은 성도의 대표를 의미하고, 네 생물은 하늘의 천사들의 대표를 의미합니다. 이 모든 자들이 “아멘 할렐루야”로 화답과 찬양을 하는 엄청난 광경을 상상만 해도 즐겁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가 받을 심판을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이미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감사의 찬송만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의 위대한 사역을 인하여 더욱 찬송생활에 힘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를 찬양함(6절)

6절=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이 표현은 피조물을 총망라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주의 교향악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주 만물 전체, 나무들과 바다의 물고기들, 산과 산위의 돌들이 모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숨막히는 광경입니다. 

이들이 무엇을 노래합니까?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즉, 장차 천국에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를 찬양할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단순히 강조를 위한 표현이라고 일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보아야 합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서문에 감동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은 작품에 자신을 나타내셨다. 노래하는 작은 새는 하나님을 노래하며 짐승은 하나님께 소리 지른다. 세상 만물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산들은 그의 이름을 메아리친다. 파도와 샘들은 그분에게 반짝거리며 풀과 꽃들은 그분에게 웃음 짓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공해로 찌든 낙동강물이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까? 황폐해진 산, 사나운 짐승이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까? 사자는 약한 동물만 보면 잡아먹으려고 쫓아다니지 않습니까? 땅과 바다도 인간들의 욕심으로 공해 바다, 쓰레기 더미로 되어가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한단 말입니까?

⟹ 답은 이사야 65장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가 시작됩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예수께서 오시므로 만물이 새롭게 되고 우주가 잃어버렸던 찬양을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까? 찬양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고, 예수를 통하여 만물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눈에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 보여야 정상적인 성도의 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주만물은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를 지금도 노래하고 있습니다. 환상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교회로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것이 곧 천국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중세 교황권은 찬송을 포함한 세 가지를 박탈했습니다. 기도를 박탈하고 말씀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성경도 라틴어 성경만을 고집하여 보통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해 놓았습니다. 신부와 성도의 벽을 벌려놓은 것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에게 찬송 부르는 길을 막았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을 악용한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16세기 초반 개혁자 마틴 루터의 시대까지 찬송이 죽어 있었습니다. 루터가 1529년에 작사 작곡한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이 우리 기독교 역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어떠함을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로마 카톨릭의 찬송 금지 때문에 생긴 것이 저 유명한 ‘파리 나무 십자가’, ‘빈 소년 어린이 합창단’ 같은 것입니다. 남자 아이들로만 구성하고 여자 아이들은 아예 참여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여성의 목소리가 필요하니까 남자들의 성(性)을 제거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카스트라토 제도입니다. 변성기 전에 남자의 성을 제거하여 여성소리가 나게 했고, 사람들은 남자가 내는 여성스런 목소리에 쉽게 매료되었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잘못하므로 얼마나 하나님을 슬프게 했는지! 이태리에서는 일년에 4,000명씩 거세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교회가 범죄했습니까? 교회가 타락하면 이런 무시무시한 범죄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배후에서 마귀가 찬송을 부르지 못하게 하려고 교묘하게 책략을 부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마음껏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주님의 영원한 통치의 약속을 믿음으로 노래해야 할 것입니다.


4. 어린 양의 혼인잔치(:7-10절)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유배를 당했던 어느 주일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천상의 신비로운 세계를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영적 세계를 보게 된 것인데, 그 내용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였습니다. 결혼예식은 예수그리스도와 성도가 연합하게 되는 것의 영적모형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의 육신의 결혼을 귀히 여겨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그리스도와의 혼인예식은 더욱 귀중히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혼인예식은 곧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태어나 가장 기쁜 일은 결혼이며, 혼인예식은 신성하고 경건한 가운데 치루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결혼예식의 절차를 통해 그 의식이 주는 영적 교훈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특히 결혼 초야, 즉 첫날 밤 순결이 주는 영적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나아가 부정한 신부가 신랑의 희생으로 순결의 표를 얻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혼인잔치에 주님의 신부로서 예비함이 있기 바랍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과 기도와 찬송 만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 오실 때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찬송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종말에 이를수록 찬송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십시오. 마태복음에서 유다서에 이르기까지 찬송이 그다지 비중 있게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에 이르러 찬송은 대폭발이라 할 만큼 엄청나게 증폭되고 있습니다. 본서 4,5,7장, 그리고 19장, 재림하시기 직전에 우주적인 찬송이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찬송은 구원과 영광과 능력을 주실 하나님께로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주님의 구속 사역과 장차 이루어질 구원의 완성을 노래하고 또 노래해야 합니다.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하나님을 더욱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에서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이 찬송의 깊은 세계에 사로잡히게 하십시오.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오직 찬송하는 자들로 보좌 앞에 있을 것입니다. 그날이 오기까지 매일 매시간 주님을 찬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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