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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라 (벧후 3: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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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라 (벧후 3:14-18)


하나님께서 만드신 작품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 마음속에는 언제나 정직과 거짓이 함께 있습니다. 따라서 정직하게 살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거짓을 좇아내는 용기가 정직을 낳습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안중근 의사의 어렸을 때 이야기입니다. 
안중근은 아버지께서 아끼시는 귀한 벼루를 몰래 사용하다가 그만 깨뜨렸습니다. 그 벼루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벼루였습니다. 이것을 본 하인은 어린 안중근이 아버지께 매 맞을 것을 염려하여 자기가 깨뜨렸다고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안중근은 거짓말은 싫다고 했습니다. 그날 저녁, 어린 안중근은 아버지로부터 사정없이 종아리를 맞았습니다. 종아리에서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그러게 뭐라고 했습니까. 제가 대신 매를 맞겠다고 하였지 않았습니까?”하며 하인이 위로를 했습니다. 어린 안중근은 “거짓말은 비겁한 짓이야. 비록 종아리가 아프긴 하지만 마음은 편안해”라고 하면서. 걱정해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습니다. 어린 안중근의 어른스런 태도에 하인은 감탄했습니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정직했던 안중근은 훗날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였습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정직하게 말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려서부터 정직한 사람이 커서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의 잘못을 거짓말로 모면한 일은 없습니까?

아주 혼란한 세상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이나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 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그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너무도 안타까운 모습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초대 교회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하는데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칭송은커녕 욕만 먹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로 이번 정부 들어 고위직에 추천된 사람들이 온갖 비리로 지탄받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것이 오늘 우리 크리스천들의 현실이 아닌가 싶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온 백성에게 칭송받도록 살아가고 있습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가 주님의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는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바라본다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서 그 말씀 가운데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의 말을 통해 또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성도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살도록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묵상을 통해 얻은 큰 유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하나님의 또 다른 말씀이 기억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글을 썼던 당시에는 주님의 재림을 믿지 않는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눈에 보이는 만물이 영원토록 존속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와 같은 어리석음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받아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세상의 창조된 것을 믿으며 또한 세상의 종말을 믿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위로와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약속의 말씀을 믿고 종말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일과 최후의 심판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를 자세히 설명해준 다음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에 요한이 고백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요한의 고백처럼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것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만큼 이들의 믿음은 주님의 재림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올 것 같았던 주님의 재림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빨리 오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신 백성들이 모두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고 주의 재림이 막연히 늦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자들에게는 도적이 오는 것 같이 갑자기 임할 것입니다. 그날이 되면 그야말로 천지의 개벽이 일어나게 되며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날을 바라보고 또한 사모할 뿐만 아니라 숨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보다 먼저는 우리 자신이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써야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도 쉽게 화를 내고 욕하고 비방합니다. 라가라는 말은 남을 비난할 때 사용하는 욕설로서 “어리석은, 바보, 멍청이”란 뜻의 아람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단순한 욕설이 아닌 쌍소리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상대방의 기를 죽이는 말을 흔히 하지는 않습니까? “너는 안 돼”부터 시작해서 “너 같은 게 살아서 뭐하냐?”고 하는 말까지 어쩌면 그렇게 심한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누구나가 평강을 원하지만 우리의 보통 하는 말로써 벌써 평강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바보 같은 놈,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놈” 정도는 애교에 가깝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그런 쌍소리조차 무의식적으로 내뱉을 정도로 우리의 심성이 악으로 물들어있지는 않습니까? 

결국 우리가 상대방을 무시하는 말을 쉽게 하는 이유는 내 마음에 평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과 생각의 평강이 먼저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건지신 주님의 은혜가 날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아야 가능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주님이 대신 치루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 가운데 더럽고 추악한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주님의 은혜가 날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는 하루도 온전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계셔서 우리를 깨우쳐주시고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인도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 가운데 온전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은혜 아래 산다고 하지만 여전히 넘어지고 쓰러지는 나 자신을 생각해본다면 다른 사람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서는 전혀 관용을 베풀지 않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하지만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지를 명백히 알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서로 미워하고 그 얼굴조차 보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여전히 남아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로마서 12장 1절은 말씀합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에 합당한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알거니와 내 안에 여전히 추하고 더러운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남을 비판하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주시는 바울 사도의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이 말씀들을 하나씩 하나씩 곱씹어보면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점도 없이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나를 향해서 오래 참으셨는데 그 주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참지를 못하고 있다면 그 마지막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를 임금이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받은바 구원이 바로 그렇게 값비싼 구원입니다. 주님이 내 대신 죽어주실 정도로 비싼 값을 주고 허락해 주신 구원입니다. 

주님의 목숨과 바꾼 목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받은바 은혜를 함께 나누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작은 것에도 용서와 관용의 손길을 내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그런 상대방이 실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아니 내게 어떤 직접적인 손해가 끼쳐졌다면 더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내게 손해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 대한 실망 때문에 속상한 나머지 외면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될 때 우리 마음이 어떻습니까? 내 마음의 평안이 먼저 사라집니다. 내 마음이 먼저 불편합니다. 

내 마음의 불편은 내 삶의 불편과 육신의 불편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결국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하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짧은 세상입니다. 어차피 잠시 지나다 떠날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무슨 미련이 그렇게도 많습니까? 물론 살아가려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왕이면 풍성하게 누리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할 때 우리 마음이 불편합니다. 하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먼저 족한 줄을 알면 불편할 것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내게 있는 것으로 만족할 줄을 모르고 항상 부족하다고만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부족한 것이 아니라 넘치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예전에는 모든 것이 공동이었습니다. 방 하나를 두고도 온 가족이 다 둘러 앉아 살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즈음은 아닙니다. 가능하면 혼자서만 방을 쓰려고 합니다. 물건도 내 것 네 것을 구분할 정도입니다. 이왕 물건을 써도 명품이어야 하고 비싼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명품들이 가장 많이 팔리는 상점들이 다 한국에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내가 명품을 쓴다고 해서 내가 명품 인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좀 부족해도 좋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걱정하게 하라고 하는 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내일 일까지 오늘 끌어안고 힘들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날의 고통은 그 날로 족하다고 하지를 않습니까? 하나님이 오늘까지 나를 참아주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언제든지 기억하십시오. 나는 온전한 자입니까? 나는 그렇게는 안 한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누구에게나 다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에 온전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흠도 점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나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 같이 상대방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오래 참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향해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도 용서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은혜입니다. 오래 참고 용납하기를 힘쓰고 서로 손을 먼저 내밀어 상대방을 붙들어주는 푸근한 세상, 살맛나는 세상을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도 있고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은 알아야 하는 것은 반드시 알아야 되고 몰라도 좋은 것은 굳이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뜻도 됩니다. 이단이 어떻고 삼단이 어떻고 할 것이 아닙니다. 이단을 잘 분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눅 2:42에는 어릴 적의 예수님에 대해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이처럼 우리 역시 지혜도 자라고 키도 자라야 합니다. 물론 어른이 되신 분들은 더 이상 키는 안 자라겠지만 지혜와 지식에 관해서는 죽는 날까지 더 자라야 됩니다. 한데 우리는 쉽게 포기하려고 합니다. 이 나이에 뭘 하겠느냐고 하십니다. 

하지만 마지막 세상을 떠나는 그 날까지도 배우기를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특히나 우리가 배우고 익히고 알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입니다. 날마다 내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크고 귀한 것인지를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나는 왜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 하나가 아니라 이런 나도 사랑하여 주시고 은혜로 세워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이유부터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은 고대광실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왕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왕으로 오신 이가 보잘 것 없는 외양간에서 나셨습니다. 구유가 침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목숨을 위하여 애굽까지 피난하셔야 했습니다. 애굽에 사시던 그 곳도 보잘 것 없는 깡촌에 토굴과 같은 곳이 주님이 어릴 적 사시던 곳이었습니다. 얼마 후 헤롯이 죽은 다음 다시 돌아온 어린 예수가 자란 곳이 어딥니까? 갈릴리 나사렛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시골 골짜기입니다. 가장 대우받지 못하는 목수의 아들로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왜 그래야만 했습니까? 바로 우리 모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낮고 천한 자라도 주님의 은혜 아래 예외가 없는 이유가 그래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스스로 서로를 이 은혜의 자리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를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가 깊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결코 그 누구도 아니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위의 강도도 주님께서 주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한 마디에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주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없습니다. 

그 은혜가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넘어지고 쓰러질 때마다 다시 손을 내밀어 나를 붙잡아 주시는 주님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내가 넘어졌을 때 누가 손을 내밀어 나를 일으켜주면 얼마나 고마운지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될 때 나도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게 되더란 말입니다. 내가 너무도 힘들 때 나의 위로가 되신 주님을 기억하게 될 때 나도 힘들어 하는 이웃에게 위로의 말 한 마디를 건넬 수 있게 되는 것이요 내가 깊은 수렁의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수렁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은혜의 경험을 전해주며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인도해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자라가라는 것은 날마다 그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요 동시에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깨우쳐주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알면 알수록 그 삶의 모습이 우리들의 삶의 지표가 됩니다. 수없이 자기들만 잘났다고 떠들어대는 제자들 앞에서 서로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올라앉을까를 놓고 다투는 제자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가 섬김을 받고자 하면 먼저 섬기는 자가 되라” 그 예수님은 섬기려 하고 목숨까지 내어주려고 오셨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목숨까지도 내어주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우리가 못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 안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말로는 나 같은 사람이 뭘 하겠느냐고 하지만 나는 정말 자신이 없다고 하지만 그런다고 정말 그 마음이 그렇습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에 그렇지 누구나 다 높여줘서 싫다는 사람 있습디까? 높임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한데 예수님은 먼저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사실 알고 보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는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서 야 대단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1등은 당연한 것입니다. 1등 했다고 해서 더 이상 받을 칭찬도 없어요. 오히려 그가 1등을 못하면 욕을 먹습니다. 아니 어쩌다가 1등을 못했냐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1등을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겠습니까? 그런 그에게 친구인들 제대로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더 올라갈 자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꼴등은 어떻습니까? 더 이상 떨어질 자리가 없습니다. 꼴지만 벗어나도 잘 했다 소리를 듣습니다. 

그렇데 그 사람이 정말 잘 한 것입니까? 당연히 잘 한 것이지요. 그런데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합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다른 사람은 1등도 하고 그러는데 너는 만날 뒤에서만 머무냐?” 그럼 1등은 다 명품 인생입니까? 그럼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한 번이라도 1등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분은 명문 대학을 나오셨습니까? 그래서 명품 인생을 사시고 계십니까? 그래서 은혜 안에서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다 가지고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물론 명품 인생이 되면 좋겠죠. 

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을 희생하면서 이루는 명품이라면 그것이 주님 앞에 서는 날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는 나를 위해서 누구를 희생시키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가 스스로 희생이 되는 것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그 일이 더 쉬워집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에게 힘이 되고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그 자체로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온 세상의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이요 동시에 구세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 안에 새로운 삶의 창조능력이 있어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하신 고후 5:17의 말씀처럼 주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빚어주십니다. 또한 그분이 우리의 치료자가 되십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자가 누구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다 고치신 주님이심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 주님이 영원토록 살아계셔서 우리들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이 오늘도 내 안에 계셔서 나의 능력이 되시고 치료자가 되심을 믿으십시오.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믿는 자가 되게 하셔서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 즉 낫게 되는 표적을 오늘도 보여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을 더욱 힘써 알아가고 느끼고 그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가 동시에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이런 은혜의 손길을 펼쳐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렵게 살던 시절 이웃과 함께 하던 그 끈끈한 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보잘 것 없는 것을 가지고도 함께 나누려고 하던 그 훈훈한 마음들을 우리가 언제부터인가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베드로 사도의 마지막 권면처럼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믿음에서 떨어질까 삼가고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감으로 하늘 영광이 주 안에서 우리 모두에게 넘쳐 임하심으로 우리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는 주님의 은혜가 넘쳐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끈기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알아 우리 역시 오래 참고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듣지 않아야 합니다.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공의 길, 형통의 길인 것입니다. 
교회생활이나 가정생활에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계절 따라 오가는 철새와 같이 돌아다니지 말고 제자리를 잘 지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길이길이 자라가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든지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믿음을 지킬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내 자리를 지킬 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할 때 그 사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때를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지나고 보면 그때가 스스로를 성장시켰음을 알게 됩니다.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고 수 1:8~9은 말씀합니다.
커가는 것. 그것은 바로 제자리를 지킬 때 얻어지는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힘들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피곤하다고 속상하다고 해서 포기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한번도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드디어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깨끗이 씻으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되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오늘도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은혜가 되십니다. 그 주님의 은혜로 오늘을 살아가며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는 귀한 성도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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