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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씻어줌 (히 10: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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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어줌 (히 10:17-25) 
 
 
❚루터의 체험

다음 주일은 종교개혁 494주년 기념주일입니다. 1517년 독일 비텐베르그 성문에 마르틴 루터가 로마가톨릭을 비판하는 ‘95개 조항’을 붙이면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전 유럽과 나아가 전 세계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로 개혁교회, 즉 개신교가 탄생해서 오늘 우리가 개신교에 속한 장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개혁은 우리 개신교회의 생일과도 같은 아주 중요한 사건이기에 해마다 종교개혁주일을 기념하여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위대한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라는 한 사람의 개인적인 고민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루터는 1483년 독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한스 루터(Hans Luther)는 가난한 광부로 일하다가 광산업을 경영하면서 성공한 사람인데 자신의 한을 풀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아들을 법률가로 만드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루터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법대에 입학해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루터의 일생을 좌우할 사건이 터집니다. 1505년 7월 2일, 루터가 집에 갔다가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우르르 쾅’ 소리와 함께 무시무시한 벼락이 자신의 바로 옆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 순간 루터는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고 땅에 엎드리면서 광부들의 수호성인을 불렀습니다. “성 안나여, 저를 살려주십시오. 그러면 성직자의 길을 가겠나이다.”

이 사건 이후 루터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도회에 들어가 가톨릭 사제가 됩니다. 신학박사가 되어 대학에서 강의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제가 되고 신학박사가 되어도 루터는 늘 커다란 ‘죄의식’에 사로잡혀 괴로워했습니다. 사제기 때문에 독신으로 살며 마음속에 일어나는 본능적인 욕구를 이기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사실 본능적인 욕구가 죄는 아닌데도 자기가 더러운 생각을 하는 죄인이라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고해성사를 수도 없이 받고 그때마다 사제에게 사죄선언도 받았지만 마음속에 죄의식과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너무 고해성사를 자주 해서 사제를 귀찮게 하니 “네 죄가 사함 받았다는데 왜 이렇게 자주 찾아오냐?” 소리도 들었습니다. 심지어 로마에서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로마에는 ‘거룩한 계단’(Scala Sancta)이라 불리는 계단이 있는데 예수님이 재판을 받기 위해 빌라도 총독에게 올라갔다고 전해지는 돌계단을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루터는 자신의 죄의식을 해결하기 위해 고행을 하기로 다짐하고 이 돌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는데 문득 이런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이 음성을 듣고 루터는 계단을 기어 올라가다가 벌떡 일어나 도로 내려옵니다. 이 말씀은 그가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발견한 구절인데 바로 로마서 1:17 말씀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 순간 루터는 답답했던 마음이 확 뚫립니다. 이 말씀을 통해 엄청난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고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아닌 ‘은혜’라는 것입니다. 비로소 그는 영혼의 자유를 얻습니다. 그토록 죄의식에 시달리며 고해성사를 하고 고행과 별 짓을 다 해봐도 전혀 해결되지 않던 고민이 이 말씀을 통해 완전히 해방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경험이 그로 하여금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만든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너는 죽을 수밖에 없는 더러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밝혀내고 지적하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하지만 율법은 죄를 밝혀내고 지적하는 일까지는 하지만 결코 죄를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루터는 율법으로 죄를 해결해 보려 한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공로를 쌓아서 말입니다. 그러니 안 된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더러운 죄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인 너를 위해 죽으셨다. 그 은혜로 네 죄가 사함 받았다.” 이게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을 자격도, 그 어떤 공로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깨달은 것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우리 죄 씻기 위해 외아들까지 보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말입니다.

❚제사와 예수 그리스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바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17절을 함께 읽읍시다.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은 “내가 그들의 죄와 불법을 다시 기억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제가 요즘 건망증이 심해져서 자꾸 뭘 깜빡깜빡 잊어버리는데 하나님은 저처럼 건망증이 있어서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은 모든 죄와 불법을 낱낱이 다 기억하십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내가 지은 큰 죄뿐 아니라 사소한 거짓말 한 마디, 남을 미워한 것, 어디 가서 몰래 딴 짓 하는 것까지 하나님이 훤히 다 아시고, 다 기억하신다, 이거 정말 겁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부러 잊어주시고 기억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룩한 건망증’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만약 이 거룩한 건망증이 없으셔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낱낱이 기억하고 추궁하신다면 저나 여러분이나 한 사람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누구도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일부러 잊어주시겠답니다. 바로 ‘은혜’ 때문입니다. 기억하세요. “너 죄 지었지?” “너 나한테 이런 짓 했지?” 이게 율법입니다. 죄를 찾아내고 지적하는 역할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무엇입니까? “내가 다 알지만 잊어줄게.” “생각하면 할수록 괘씸하지만 다 용서할게.”입니다. 

여러분도 좀 하나님처럼 ‘거룩한 건망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한 번 집에 가서 아내와 남편에게, 자녀들에게 지적하고 따져보세요. “너, 이런 짓 했잖아?” “당신 옛날에 한 짓 다 기억하고 있어” 하고 말입니다. 지적하면 변할까요? 천만에요. 오히려 더 악화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옳은 말? 맞는 말로 지적? 아니요. 다 알지만 잊어주세요. 기억나지만 일부러라도 깜빡해 주세요. 따지지 말고, 추궁하지 말고 품어주세요. 그러면 거기에 은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18절입니다.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것들’이란 17절에 나온 죄와 불법입니다. 이 모든 것을 은혜로 용서하셨으니 다시는 죄를 위해 제사 드릴 것이 없답니다. 이것은 구약에 나오는 제사제도를 배경으로 합니다. 요즘 우리가 생명의 삶 큐티 본문으로 레위기를 읽지 않았습니까? 레위기에 보면 5대 제사인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가 나옵니다. 이외에도 구약에 나오는 제사들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소나 양이나 염소 같은 제물을 제사장에게 가지고 가도록 규정합니다. 제사장은 그 제물의 피를 뿌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면 나의 죄가 사함 받습니다. 이런 원리입니다. 진짜 피를 흘려야 할 것은 나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사란 나 대신 죄 없는 짐승을 잡아 제물로 바쳐서 그 피를 뿌림으로 내 죄가 용서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지을 때 이렇게 제사를 드려서 자신의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이 제사의 효과가 1회성이라는 것입니다. 제사는 한 번밖에 효과가 없어서 죄를 또 지으면 다시 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죄 지을 때마다 말입니다. 그런데 18절에 하나님이 뭐라고 선언하셨습니까? “내가 이 모든 죄와 허물을 사했으니 다시는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요? 바로 다음 절인 19절에 답이 나옵니다. 여러분이 답을 찾아보세요. 예, 바로 ‘예수의 피’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제물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외아들께서 아무 죄 없는 어린양이 되셔서 친히 그 피를 뿌려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피로 드린 제사가 구약의 제사와 전혀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피로 드린 제사는 단 한 번으로 영원히 우리의 죄를 사하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유일회성’이라고 합니다. 단 한 번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사해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의 피로 드린 제사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사해주시고, 다시는 기억하지도 않으시고, 그래서 우리는 다시는 제사를 드릴 일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세례를 받은 분들, 이미 성례학교를 통해 다 교육 받아서 알겠지만 세례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우리를 씻어 “이 사람은 이제 죄 없는 사람입니다. 의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고 모든 사람 앞에 선포하는 의식이 바로 세례인 것이지요. 여러분은 이제 의인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본문 22절에는 여러분처럼 세례를 통해 죄 씻음 받은 분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 세례 받은 분들만 읽읍시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그렇습니다. 세례를 통해 맑은 물로 죄 씻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셔야 합니다. 다시는 악한 양심에 휘둘리지 마십시오. 다시는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마십시오. 온 맘 다해 오직 하나님께만 나아가시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씻음 받은 자가 할 일

이제 본문은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 받은 사람들, 즉 죄 씻음 받은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을 말씀합니다. 23~25절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첫째로 23절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흔들리지 말고 소망을 굳게 잡으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어떤 유혹이나 어떤 시험, 환난에도 결코 흔들리지 말고 이 약속을 굳게 믿으십시오(오늘 세례입교 받은 이들에게도 당부). 소망을 굳게 잡으십시오.

둘째로, 24절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 권면합니다. 죄 씻음 받은 사람끼리 서로 돌아보면서 서로 서로 격려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서로 선행을 베풀라고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앞서 소개한 ‘거룩한 건망증’이 꼭 필요합니다. 성도들끼리 서로 돌아보고 챙겨주고, 예수님이 내 죄 씻어주셨으니 나도 남의 허물 씻어주고, 하나님이 내 죄와 약점 잊어주셨으니 나도 남의 죄와 약점 잊어주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격려해주며 힘을 주면 거기 은혜의 역사가 놀랍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꼭 이런 교회 되기 바랍니다.

마지막 셋째로,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더 열심히 모이라”고 권면합니다.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이라고 했는데 ‘그날’은 바로 예수님의 재림 날입니다. 신앙생활 하다보면 점점 게을러 질 때가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교회에 자꾸 가고, 자꾸 모여야 신앙이 크는데 나태해져서 모이기를 게을리 하고, “요즘 성도들 얼마나 바쁜데 뭘 자꾸 모이라고 하냐?”며 모임을 폐하려는 유혹이 생깁니다. 하지만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오히려 더 열심히 모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자꾸 오고, 예배도 자꾸 참석하고, 성도들끼리 열심히 모여 말씀 배우고, 기도하고, 전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도 모이기에 더욱 힘써서 은혜 더 많이 받는 성도 되기 바랍니다.

주님은 친히 자신의 피를 흘려 우리 죄와 허물을 씻어주셨습니다. 큰소리 탕탕 치더니 결국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직접 찾아가 지적하고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위로하고 허물을 씻어주십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죄책감에서 벗어나 위대한 주님의 종이 됩니다(요 21장). 누가복음 7장에는 이런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에게 한 여인이 옵니다. 그 동네의 유명한 창녀입니다. 그녀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더니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습니다. 

그러고 나서 값진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의 발에 붓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런데 이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모인 바리새인과 사람들은 오히려 그 여인을 정죄하고 예수님을 흉봅니다. 더러운 죄인이 저 짓을 하는데 그것도 모른다고요. 그러나 주님은 “너의 죄가 사함 받았다”고 선포하십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이고 예수님은 은혜입니다. 죄를 지적하고 캐내는 율법으로는 아무 역사도 안 일어납니다. 오히려 상처와 아픔만 남습니다. 

하지만 씻어주고 용서하고 잊어주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은 눈물로 다른 사람의 발을 닦아주게 됩니다. 내 가장 귀한 향유도 아낌없이 부어 남을 씻어주게 됩니다. 왜요? 이 여인처럼 예수의 피로 씻음 받은 사람만이 남을 씻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 성도들이 이렇게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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