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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화되었습니까? (행 9: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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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되었습니까? (행 9:22-31)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관해서 아직 모르는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을까요? 
머리에 있습니까? 가슴에 있습니까? 

의학적으로는 머리에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철학적으로는 가슴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의 상관 관계는 다소 어려운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몸을 통해 우리 마음을 어느 정도 나타내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몸은 마음의 거울이 되어서 우리가 그 사람의 얼굴만 보아도 그 마음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근심스런 얼굴을 보면 ‘혹시 무슨 걱정이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 마음이 얼굴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더라도 남녀가 서로 사랑하게 되면 그 몸이 달라집니다. 
옷차림, 화장법이 달라지고 말도 달라집니다. 얼굴표정도 달라집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마음의 상태가 그 모습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은 믿음으로 받았지만 구원받은 자라면 당연히 구원 받은 자로서의 변화된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말 구원받고 정말 거듭난 체험이 있다면 우리의 몸과 삶에 어떤 변화가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사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구원 받은 것에 대해 ‘너희 영이 죽어 있었는데 살아났다고’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죽은 자와 같았다면 구원받은 이후에는 살아난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이 살아났다고 한다면 어떻게 그것이 우리의 몸을 통해, 생활을 통해 나타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구원의 사건은 우리 내면의 너무나 큰 충격의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으로 직결되어서 구원 받았다면 그 변화를 누구나 알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은 바울은 예전에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있을 때에 그가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데 앞장 선 사람이었지만 구원받은 후 놀라운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바울의 변화된 모습처럼 정말 내가 구원받았는지 다시 한 번 점검하고 내가 받은 구원이 분명하다면 구원이 신분적인 구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너희가 정말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받은 자에게 첫 번째로 나타나는 변화는 ‘체험적 변화’ 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구원은 체험적인 사건으로 단순한 생각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예수를 믿긴 믿는데 지식적으로 생각으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후 하늘에 계시다가 다시 오실 것이다’ 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으로 믿을 뿐입니다. 가슴에 와 닿는 것도 없고, 자신의 마음에 어떠한 변화도 없습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가정에서, 일터에서, 사회에서도 예전과 변화가 없습니다. 
교회생활은 수십년을 하였어도 늘 그 모양 그대로입니다. 
왜이겠습니까? 바로 이들에게는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런 사람의 예로 니고데모라는 사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종교생활을 해 왔으며 부모님은 유대인으로 구약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고민이 생겼습니다.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없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지 확신이 없어서 그 밤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예수님, 다른 사람이 다 뭐라고 해도 제가 보기에 당신은 굉장히 훌륭한 선지자이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니고데모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그 뜻을 알 수 없어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생각으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두 번째 태어나는 것으로 체험이고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니고데모는 충격을 받고 예수님께 다시 묻습니다. “아니, 예수님 제가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나이 많아 늙었는데 다시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까?”

그 때에 예수님의 대답이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라고 하심으로 그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니고데모에게 바람의 비유를 하시면서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처럼 영으로 태어나는 것은 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즉 내가 육체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으로 거듭남은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사건이며 생각이나 사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나오고 생각으로는 복음을 알지만 이러한 거듭남의 체험 없이 교회를 다니는지 모릅니다. 

바울은 처음엔 예수님을 반대하고 믿는 자들을 핍박하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눈이 멀어지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를 보내서 바울에게 복음을 전해주자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사도 바울이 직접 체험한 일입니다.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와 같은 체험이 있게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단순히 교회 나오는 것 이상으로, 단순히 신앙생활 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영이 두 번째 태어나는 사건과 체험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여러분 바울은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체험입니다. 사상과 철학이 아닙니다. 
바울은 십자가 위의 주님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이제 내 안에 사는 것은 주님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바울은 자신의 인생에 주인은 예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러한 체험이 있기를 원합니다.
십자가 앞에 내 자신을 못 박고, 이제 내 모든 삶을 그리스도에게로 양도한 그러한 체험이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을 통해 가르쳐 주는 것은 ‘이성적인 변화’ 입니다.
구원받은 자에게는 체험적 변화뿐 아니라 ‘이성적 변화’ 가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교회에 나오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분위기가 또 어떤 분들은 사람들 때문에 또 어떤 분들은 찬양이 좋아서 일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마지 못해서 끌려 나온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분들은 모태 신앙이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그냥 나옵니다. 

또 어떤분들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나옵니다. 어쩌면 여기 게신 분들 가운데 그런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내에게 밥이라도 얻어 먹으려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자포자기 하는 마음으로 그냥 한시간만 참고 앉아 있자’

이런 분들은 사실 교회를 수년 다녀도 성경이 무엇인지 모르고 말씀을 들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졸리거나 딴 생각만 들어옵니다.

이성적인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은 진지하게 구원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에 나와도 하나님 말씀인 이 성경 말씀의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에게 한 번도 설명해 본적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자신이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을 받으면 이성적인 변화가 반드시 따라온다고 말씀하십니다. 

20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사울은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22절을 보면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이와 같은 이성적인 변화, 지식의 변화가 생겨야 합니다. 

특별히 어떤 지식의 변화가 생겨야 하는가에 대해 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지식의 변화’ 가 생겨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에 관한 이성적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옛날에는 그저 예수님을 성인이나 좋은 사람 가운데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공자도 좋고 석가도 좋고 소크라테스도 좋고 예수님도 좋고 다 좋습니다. 

불신자들이 왜 꼭 예수만이라고 하느냐는 불평의 말에 동조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고 나면 예수님에 대한 이성적 변화가 생깁니다. 
예수님을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성경을 읽어도 ‘단순히 문학서나 윤리서나 교훈서 정도로만 여기고 성경을 보았지만 구원을 받고 이성의 변화가 생기면 창1장부터 계시록 마지막 장까지 이곳에서 붉은 십자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고 말씀을 읽을 때마다 모든 것이 바로 나를 향한 말씀으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원하기는 이러한 이성의 변화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세 번째로는 ‘사회적 변화’ 입니다.

23-24절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신기하지 않습니까? 옛날에 유대인의 우상이 누구였습니까? 사울이었어요. 사울과 유대인은 너무너무 가까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관계가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울도 유대인을 죽이려 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사울은 여전히 유대인을 사랑하였고 자기 민족이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를 미워하는 관계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바로 사회적 변화입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어딘가에 소속되어 살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구원은 과거에 소속되어 있던 것에서 벗어나 다른 소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옛날에 친구들과 다닐 때는 이 친구들이 없으면 죽을 것 같습니다.
음주가무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같이 술 마시던 친구들이 없으면 세상을 무슨 재미로 살까 싶지 않습니까?

그러나 구원받으면 그들은 나와 가치관과 인생의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그러한 일에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세상죄를 짓는 관계를 멀리하고 새로운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친구를 찾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에 반드시 따라오는 변화이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늘 세상 친구를 그대로 두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세상의 친구를 다 끊어버리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셔서 구원받았다고 가서 친구들에게 “나, 이제 너희들하고 절교다. 이런 마귀 사탄의 자식들” 하면서 다 끊어 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러면 인격이 잘못된 것이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옛날 친구와 사귀어야 됩니다. 관계를 유지해야 됩니다. 그러나 무슨 말씀입니까? 

그들과 같이 어울리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들은 정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재미있던 세상의 일들이 더 이상 여러분에게 재미있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하는 재미는 시간가는 줄 모르면서 예배의 한시간이 너무 길다고 불평한다면 이 사람은 신분적인 구원은 받았을지 모르지만 전혀 성장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구원받게 되면 반드시 변화가 있으며 사회적으로 변화가 생깁니다.’

친구관계에서 변화가 생기고, 부부간에 변화가 생기고, 부모와 자식간에 변화가 생깁니다. 어제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예전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원하기는 이러한 변화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는 변화는 ‘가치관의 변화’ 입니다. 

29절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바울은 헬라파 유대인으로 헬라 말에 능통하였으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의 두 부류가 있었는데 사도 바울은 헬라파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가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 을 변론하며 증거 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처럼 구원받고 나면 가치관이 바뀌게 됩니다.
옛날에는 돈이 최고였으며 세상의 권력과 명예가 제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 안에서 거듭나면 그 가치관이 바뀌게 됩니다. 
여러분 불교인들도 이 세상이 얼마나 허무한 곳인지를 잘 알고 보다 신앙이 깊은 사람들은 세상의 것을 다 포기하고 산으로 들어가 바람같이 물같이 살아갑니다. 

불교인들도 이것을 알고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성경은 썩어질 것을 위해 살지 말라고 합니다. 대신 영원한 것을 위해 살라고 합니다.
돈도 명예도 권려고 한 순간의 것입니다. 
그보다 엄청난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을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예비된 그 엄청난 세계를 위해 살아야 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의복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 그것은 이방인들 즉 구원받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 이라고 하셨지만 우리들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너무나 의식주를 위해 염려합니다. 삶의 목표가 얼마나 더 많이 벌고, 어디에 살고, 무엇을 타느냐 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인생의 대부분을 허비하며 살아갑니다.

정작 자녀를 위해, 아내를 위해, 남편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왜입니까? 세상의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의 삶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면 우리는 이 땅을 위해 살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가치관으로 바뀌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고 나면 자신의 안위가 아닌 주님의 일과 교회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저 영혼을 구원할 수 있을까, 잃어버린 영혼들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이 생깁니다. 

때로는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도 합니다. 왜요? 자신은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 땅에는 그저 먹을 것, 입을 것만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어떻게 모을까를 고민하였지만 이제는 어떻게 쓸까를 고민합니다. 
과거에는 어떻게 더 누릴까를 고민했지만 이제는 어떻게 더 섬길까를 고민합니다.
과거에는 어떻게 더 즐길까를 고민했지만 이제는 어떻게 내 몸을 불태워 주를 위해 일할까를 고민합니다. 
이것이 구원 받고 참된 가치관이 변화된 사람의 삶이며 모습일 것입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변화가 있습니까?  

여러분 수년간 아니 수십년을 교회를 다니고 직분을 받았지만 과연 내 삶에는 오늘 말씀드린 변화가 가운데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혹 아무런 변화도 없는 분들은 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제라도 늦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제 정말 변화된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변화를 위해 힘써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며 내가 영원한 생명을 약속 받았다는 분명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원하기는 이러한 변화된 삶으로 더욱 성숙함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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