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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으로 주를 기쁘시게 할까?(1) (엡 5: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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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 주를 기쁘시게 할까?(1) (엡 5:8-12)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에 40대 중반의 한 남자가 화장품과 건강보조식품을 생산하는 회사를 세웠습니다. 그가 회사를 세울 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8번이나 사업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가 화장품과 건강보조식품을 생산하는 회사를 만든 것은 기업의 이익도 중요하지만, 사람에게 유익한 제품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화장품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성들에게 도움을 준다면, 건강보조식품은 사람들의 건강을 지켜 준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가 8번의 사업 실패를 통해 처절하게 깨달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마태복음 6:33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붙잡고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반드시 사업도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또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기업을 만들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는 사업장에서 매일 아침 예배를 드리면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월요일마다 기도회를 통해 영적인 에너지를 공급받았습니다. 창업 때부터 매출액의 일정 부분을 선교사업에 내놓았습니다. 옥토선교회를 조직해 자체 선교사를 파송하는가 하면, ‘예맥’이라는 선교극단을 후원하고,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수많은 섬김의 사역을 감당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1994년에 자본금 1억 원으로 시작된 그의 회사는 IMF 위기 때에도 승승장구해서 회사를 만든 지 6년 만인 2000년에 1천억 원이 넘는 매출액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 10년 만에 전국에 700여개의 지사를 두었고, 연간 매출액은 3천억 원이 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1천 개가 넘는 지사를 둔 큰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주)알로에마임의 회장인 인천주안장로교회의 유영섭 장로님입니다. 그는 사업을 하는 최고의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자 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사업에 복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최고 목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보다 더 귀한 가치가 우리에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주)알로에마임의 회장님처럼 커다란 사업을 통해서 큰일을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은 없다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삶 역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겠다는 마음이 우리 삶의 동기가 되어야 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최고의 목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생각도 그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8: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우리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셨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님과 함께 하셨고,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당신의 사역을 온전히 감당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죽으셔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잘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지 않고 묵묵히 순종하셨던 것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모든 믿음의 선배들은 한결 같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자신의 생을 투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의 승리자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면 그는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던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면 주님처럼 죽음도 각오하겠다는 것이 그의 고백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다니엘도 그랬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그는  ‘그 어떤 신에게도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어명이 내려졌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루에 3번씩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사자 굴에 던져져 사자의 밥이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까? 직장에서나 친구를 만날 때에나 가정에서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지 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시험하여 보라”하는 말씀은 실험을 통해서 증명해 보이라는 뜻입니다. 철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망치로 두드려 보기도 하고 뜨거운 불에 넣어도 보는 것처럼,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를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서 찾아내 증명해 보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시는 것이라면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빛의 열매를 맺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본래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두움에 속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감나무가 사과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어둠에 속한 사람들은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참 빛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고, 참 빛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은 어두움의 권세에서 벗어나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복음 8:12)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더 이상 어둠에 속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어둠에 다니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빛의 자녀가 된 우리는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9절에 의하면 빛의 열매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입니다. 

착함은 관대하고 온유한 마음을 뜻합니다. 넓은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마음입니다. 상대방을 이해해주는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은 용서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 가까이 하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멀리하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고, 나에게 서운하게 한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은 용서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병 고침을 받으러 오는 사람에게까지도 “네 죄 사함을 받았다”(마가복음 2:5)고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한복음 8:11)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누가복음 23:34)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제자 베드로도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 가버린 제자들도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이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고 평범한 우리는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스데반은 집사입니다.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도 자신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에게 특별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에 예수의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격이 훌륭하기 때문에 남을 용서하고 이해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면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우리도 용서할 수 있고 용납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 기억하십시다. 우리의 인격으로 용서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마음으로 이해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영으로 용서하고 용납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남을 용서하고 용납하며 사는 사람을 보실 때 하나님께 너무너무 기뻐하십니다. 남을 이해해주며 사는 사람을 보실 때 하나님의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십니다. 

빛의 두 번째 열매는 의로움입니다. 의로움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뚤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거짓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의 관계가 뒤틀린 존재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 인간은 끊임없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로마서 1:28절에서 선언합니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생각해야 자기들 마음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해야 죄를 지어도 죄책감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범죄한 이후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눈을 감은 채 살아왔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친히 오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언제나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에 모시고 살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마음에 모신 사람은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바른 관계가 회복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심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드리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주인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찬송하기를 기뻐합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바로 찬송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기도하는 시간이 기쁨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셨기에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나아가 내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도우심을 바라며 기도합니다. 평안할 때에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힘들고 어려우면 도우심을 바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좀 더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어 내 삶에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가 무엇인지를 늘 물으며 살아갑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과 관계가 얼마나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만나는 것이 기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예배드림이 기쁨이 됩니까? 그러면 지금 하나님과 좋은 관계 속에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복되고 기쁘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자주 말씀드립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큰일을 하는 것보다 늘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우리가 헌금을 많이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 같은 존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에녹은 참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입니다. 에녹에 대한 기록은 아주 간단합니다.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습니다. 에녹이 솔로몬과 같이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지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일천번제를 드렸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노아와 같이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자식을 번제물로 드렸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에녹의 이야기에서 에녹이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는 아무것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늘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들림 받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또는 교회를 위해서 뭔가 큰일을 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사람들 앞에 내세울만한 어떤 큰 업적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보다 더 귀하게 보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늘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친구처럼, 하나님과 허물없는 관계로 지내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남겨두고 싶은 업적들은 사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별로 가치 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많습니다. 우리는 성공을 좋아합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성공에는 별로 관심 없으십니다. 그것을 우리 인생 마지막이 되면 깨닫게 됩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내가 큰 업적을 남겼다고 자랑스러워하며 ‘내가 내 인생을 참 잘 살았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지난 주 미국에서 오신 한미노회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을 모시고 여행하던 중에 진주국립박물관에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재미있는 기록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주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6/37-1598)는 16세기에 일본통일의 대업을 완성한 사람입니다. 해외정복이라는 커다란 꿈을 갖고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죽을 때까지 ‘다이코’(太閤)라는 최고위직을 지낸 사람입니다. 일본 역사에서 어마어마한 일을 이룬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인생의 말년에 지었다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이슬과 함께 내리고 이슬과 함께 사라지는 내 몸인가? 오사카의 일도 꿈속의 또 꿈이런가?”
  
‘오사카의 일’이라는 것은 오사카 성을 건축했던 것을 말합니다. 400년이 지난 지금도 관광명소로 유명할 만큼 어마어마한 성을 건축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모든 것이 꿈속의 꿈이었고, 그 엄청난 일을 일구어낸 자신이 이슬처럼 사라지고 만다고 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지내고 보면 다 이슬 같을 뿐입니다. 한 여름 밤의 꿈과 같을 뿐입니다. 권력도 그렇고, 성공도 그렇고, 대업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게 우리 인생에서 결코 중요한 것일 수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일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어떤 큰일을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떤 관계로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빛의 세 번째 열매는 진실함입니다. 진실함이란 순수하고 정직한 것을 말합니다. 말과 행동에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 빛은 거짓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거짓은 어둠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거짓은 마귀의 속성입니다. 마귀는 늘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때로는 적당하게 거짓말을 해도 괜찮아! 적당하게 거짓에 눈감고 살아도 돼! 어떻게 사람이 거짓됨이 없이 살 수 있어? 필요에 따라 적당하게 거짓말을 할 줄도 알아야 출세할 수 있어! 한두 번쯤이야 거짓말을 해도 누가 뭐라 하는 사람 없어!’
  
여러분, 이런 속삭임에 넘어가지 마십시다. 거짓은 마약과 같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이익을 줄 수 있습니다. 쾌감과 기쁨을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뭔가 엄청난 것을 곧 듬뿍 안겨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에는 우리의 인생을 파멸로 몰고 갑니다. 그 거짓 때문에 출세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할 수 있는 기회에 덫이 되고 맙니다. 거짓은 우리에게 일시적인 쾌락은 줄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기쁨을 주지는 못합니다. 

신앙인은 거짓과 동무가 될 수 없습니다. 어둠과 빛이 함께 공존할 수 없듯이, 신앙과 거짓은 같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거짓은 우리의 인생을 파멸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서 천국을 빼앗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요한계시록 21:8) 
  
신앙인은 진실해야 합니다. 세상이 온통 거짓투성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세상에서 진실되이 살아야 합니다. 신앙인이 거짓된 세상에 물들어 거짓된 모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거짓된 세상에 참됨이 무엇이며 진실함이 무엇인지를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상은 갈수록 거짓이 진리처럼 추앙받고 있습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거짓을 도구로 사용해도 되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그런 세상에 진실만이 승리라는 것을 우리의 신앙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이 온통 거짓으로 살지라도 우리만은 진실되이 사십시다. 진실하게 사는 것이 손해를 본다 할지라도 진실하십시다.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할지라도 진실하십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손을 붙잡고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 주실 것이고, 그 길 끝에서 우리의 손을 높이 들어 승리를 노래하게 하실 것입니다. 손해 본다 하더라도 진실하게 살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세상에서는 성공하지 못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진실하게 사는 우리가 진정한 승리자라고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줄기를 통해서 뿌리로부터 공급되는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빛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꼭 붙어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이나 능력으로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우리는 부끄럽고 죄된 모습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로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가지가 아무리 노력해도 뿌리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으로부터 주어지는 능력을 공급받을 때에만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능력과 은혜를 공급받아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계절을 사십시다. 조금만 더 넓은 마음으로 살아 착함의 열매를 맺읍시다. 하나님을 조금 더 가까이 하여 의로움의 열매를 맺읍시다. 손해 본다 하더라도 조금만 더 진실하게 사십시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의 모습을 분명 기뻐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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