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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러나, 영접하는 자에게 (요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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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접하는 자에게 (요 1:1-12)

저는 1970년대 초에 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제가 처음 도착한 미국의 도시는 유명한 자동차 도시 디트로이트였습니다. 제가 그 도시에서 출석하기 시작한 미국교회에서 어느 주일 그 교회 목사님이 설교 중 들려주신 도시와 관련된 한 이야기를 오래 동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한 자동차 회사의 숙련된 정비사가 어느 추운 겨울 아침 회사로 출근하다가 자동차가 고장 났다고 합니다. 갓 길에 비상 주차를 하고 차 뚜껑을 열고 고장 난 원인을 찾고 있었는데 쉽게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추워 쩔쩔 매고 있는데 한 세단이 옆에 서더니 노신사가 내리더랍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제가 좀 도와 드릴까요?” 속으로 그는 가소롭게 생각해서 도움을 거절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이 도시 일류 정비사인 내가 고치지 못하는 것을 누가 고치겠는가?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없이 자동차로 다가서서 몇 군데를 만지더니 시동을 걸어보라고 하더랍니다. 시동이 걸렸습니다. 그는 감사하다고 말한 후 정중하게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자기 같은 정비사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사는 빙그레 웃으며 명함 한 장을 주고 떠났다고 합니다. 명함에는 “헨리 포드”(Henry Ford)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그 자동차를 만든 분이었습니다. 자동차를 만든 분이 자동차를 고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성경 본문 요한1:1-12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바로 그런 메시지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 우리를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류를 만드신 바로 그분이 이 천년 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류 역사상 예수 사건보다 더 큰 충격과 변화를 준 사건은 없었습니다. 그가 역사속에 오신 것을 기점으로 역사는 BC와 AD로 나뉘었습니다. BC-Before Christ(그리스도 이전)와 AD-Anno Domini(그리스도안에서/그리스도이후)로 말입니다. 

역사는 그리스도가 오시자 그분 이전과 그분 이후의 명백한 분수령을 만든 것입니다. 한 개인의 삶의 역사에도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리스도 이전과 그리스도 이후의 명백한 전기가 만들어집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후 이런 고백을 남깁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그런데 이런 그리스도 예수가 처음 세상에 오셨을 때 그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두 가지 명백한 대조적 반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가지의 대조적 반응은 지금 이 순간도 동일하게 계속되고 있음을 아시나요? 이 대조적인 두 가지 반응-무엇입니까?

첫째는, 예수를 영접치 않는 반응입니다.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여기서 ‘영접’이란 단어는 대중적인 공적인 영접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 거의 대다수가 그렇게 보편적으로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한마디로 그가(예수) 누군지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가 본래 누구였습니까?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그가 창조자라고 증언합니다. 3절을 보실까요? “만물이 그로(말씀이신 예수, 14절 참조)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와 함께 예수를 통해서 만물을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창조한 자기 땅에 오셨는데 그가 만든 자기 백성은 그를 영접하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 마치 내 집에 내가 왔는데 내 집안사람들이 주인된 나를 영접하지 않은 것입니다. 왜요? 내가 주인인 것을 그들이 몰라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10절을 다시 읽어 보실까요.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알지 못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가 세상의 창조자 이신 것을 말입니다. 당신은 아시나요? 예수가 바로 당신을 지으신 창조자이심을 말입니다. 헨리 포드가 자동차를 만든 이임을 알았더면 처음부터 디트로이트의 정비사는 기쁘게 그를 영접하지 않았겠습니까?

또한 오늘의 본문은 예수가 빛이라고 증언합니다. 그가 이 땅에 오신 이유, 이 세상이 어둠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쫓아내고 새로운 세상을 가져오는 것은 오직 빛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처음 교회 나올 때 한 주일 학교 젊은 선생님의 설교에 저는 큰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 어떻게 빛을 이길 수 있습니까? 총을 꽝 꽝 쏘면 빛이 도망갈까요? 아니 빗자루로 막 쓸면 어둠이 없어질까요? 아닙니다. 빛이 들어오면 전기가 들어오면, 아니 한 자루의 촛불만 켜도 어둠은 쏜 살 같이 도망갑니다.” 명 설교가 아닙니까? 세상은 어둠속에 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5절을 보십시오. 빛이 어둠에 비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빛은 바로 예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에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빛을 사람들이 영접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왜요? 다시 5절을 읽겠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가 빛이신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내가 빛을 영접하면 내 어둠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깨닫지 못한 때문입니다. 그들이 안 것은 오직 이 빛 가운데 내 어둠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요3:20은 빛을 영접하지 못하는 이유를 다시 이렇게 증언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라” 빛이 어둠속에 있는 것을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빛을 만나 어둠속에 있는 내 실존을 정직하게 직면하지 못하는 한 내 어둠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합니다. 어둠을 사랑하고 싶어서 사람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영접하지 못하는 숨겨진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를 영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를 영접하는 반응입니다.

그러나 12절에는 첫 반응과 전혀 대조적인 두 번째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11절까지는 예수님이 오셨을 때 당시 대 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러나 12절에는 당시의 대세를 거스린 소수자의 선택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다수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소수의 선택을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좁은 문은 들어가기가 힘들어서 보다 더 중요한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대중들의 선택과 다른 소수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마태7:13-14을 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많고 적음의 차이가 더 강조되지 않았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오늘 날 예수 신앙을 등지고 살고 있기 때문에 당신도 그 신앙을 외면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적은 사람들의 선택이어도 그것이 빛의 선택이요, 생명의 선택이라면 기꺼이 빛이요 생명이신 예수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오늘 성경본문은 무엇보다 예수를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고 약속합니다. 때로 예수를 믿고도 이 세상에서 어렵고 힘든 일도 경험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린다고 증거합니다. 

여러분, 만유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특권이 상상이 되십니까? 잘 상상이 안되신다면 지상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베푸는 특권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에게 베풀고 베풀어도 후회 없는 그 사랑의 이유,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이 내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삶, 한번 누려 볼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마태7:11에서의 예수님 자신의 약속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이제 중요한 것은 예수를 어떻게 영접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내가 예수님을 영접할 마음이 없이 살아왔던 우리에게 그분이 먼저 찾아와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계3:20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리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책임은 내 마음에 그분의 녹크 소리가 들리거든 지체 없이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그분의 영으로 내 마음속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된 놀라운 새 인생이 시작됩니다. 바로 이 성구를 근거로 위대한 메시지를 담은 성화를 그린 분이 있습니다. 

영국 화가 윌리암 홀맨 헌트(1827-1910)의 작품 “세상의 빛”이란 그림이 그것입니다. 지금도 이 성화 원본은 옥스퍼드 케블 대학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자, 여기 한 집의 문을 두드리는 이는 가시 면류관을 쓰신 예수 이십니다. 그러나 그의 머리를 둘러싼 광채는 그가 영광의 왕이심을 뜻합니다. 그는 진리의 말씀을 상징하는 등불을 들고 있습니다. 문 앞에는 잡초가 우거져 있습니다. 이 문은 오래 동안 열리지 않은 문입니다. 이 문에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이 문은 안에서만 스스로 열수 있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이 열리는 순간 이 집에는 빛이 가득할 것입니다. 왕이신 그가 이 집을 빛과 생명으로 채워 질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내 인생의 왕으로 주인으로 영접하는 자를 향한 약속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수많은 사람들이 어둠속에 방황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당신의 창조자이신 예수를 영접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이 설교를 디트로이트 겨울 아침에 정비사가 몰던 자동차를 고친 헨리 포드의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만든이가 고치시는 분이셨습니다. 내 인생이 조금은 고장난 자동차처럼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그럼, 당신에게 다가 오시는 당신의 창조자를 영접하고 그 손길에 인생을 맡겨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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