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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엡 4: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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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엡 4:13-15)

오늘 같은 세상에 우리들이 하루하루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기적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참 무서운 병도 많고 희귀한 병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프로제리아(Progeria)>라는 병을 들어보셨습니까? 아마<조로 증>그러면 쉽게 아실 것입니다. 말 그대로 노화가 빨리 오는 병입니다. 이 병은 주로 아이들에게 걸리는 병인데 출생하여 자라다가 2개월쯤부터 3년 사이의 아이들에게 많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 병이 오면 어느 날부터 성장이 멈추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세포가 정상인보다 10배나 더 빨리 늙어갑니다. 그래서 체구가 왜소해지고 탈모증세가 나타나고 어린 아이인데도 피부주름이 노인처럼 되고 어른처럼 동맥경화증에 걸리고 노쇠현상이 급격이 나타나 나이는 분명 어린아이인데도 생김새는 노인과 같아진다고 합니다. 그렇게 대부분 10년 안에 생물학적인 노화과정을 다 거친 후 죽는다고 합니다. 이 병은 불치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태어나서 일정시간이 흐르면서 발병이 되고 발병이 된 나이에서 신체적으로 더 이상 노화가 되지 않는 희귀질병도 있습니다. <하이랜더 증후군(Highlander syndrome)>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더 이상 늙지 않으면 굉장히 오래 살 것 같지만 이 병은 10살 미만 아이들에게 발병되어서 유감스럽게도 평균적으로 30세를 넘기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사람이 태어나서 정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너무 빨리 성장해도 문제고, 너무 느리게 성장해도 문제인 것입니다. 자기 나이에 맞게 성장해 가는 아이들이 얼마나 건강한 것입니까? 네 살이면 네 살에 맞게, 일곱 살이면 일곱 살에 맞게 말하고 행동하면서 자라는 것이 정상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교회 개척초기에 한참 설교를 하고 있는데 저희 작은 녀석 딸아이 의진이가 네 살 때인 것 같습니다. 어느 주일에 유아실에서 잘 놀고 있다가 갑자기 예배당 뒷문을 열고 들어오더니“아빠! 좀 조용히 해! 시끄러워서 못 놀잖아!” 그러고는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립니다. 예배드리는 모두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비슷한 일들이 우리교회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가끔씩 예배 중에 예배당 뒷문이 열리고 온 성도들의 관심을 받으며 다섯 살짜리가 아이가 막 뛰어 들어와서 앞문으로 훅 지나가버립니다. 그런가하면 세 살짜리 녀석이 찬양대에 앉아 있는 엄마한테 무작정 돌진하기도 하고,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리고 있는 할머니를 힘차게 부르면서 뛰어 들어오는 녀석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이 아이들을 나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한 번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정상적인 행동들을 억압하거나 지나치게 나무라면 부작용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그럽니다. “왜 예배당에 들어오는 아이들을 나무라지 않느냐”고....그런데 여러분,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이 아이들은 자기 나이에 맞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아주 건강하게 자라는 증거입니다. 굳이 나무라려면 미리 통제시키지 못한 엄마를 나무라야지 아이들은 제 나이에 맞고 제 기분에 맞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문제는 이 아이들의 정상적인 성장에 맞물려 일어나는 행동들을 통제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눈 깜빡 할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거든요. 그래서 차츰 나이를 먹으면 그 나이에 맞게 엄마가 가르쳐 가는 것입니다. 마땅히 가르쳐야 합니다. 안 가르치면 그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지금 중3인 의진이가 네 살 때처럼 예배당 뒷문을 열고 들어와서 똑같이“아빠! 좀 조용히 해요! 시끄러워서 못살겠어요!”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문제가 있지요. 열여섯 살이 되어서 네 살 때의 행동을 한다면 올바른 성장을 이루지 못한 경우입니다. 지금은 열여섯 살답게 잘 성장해 줘서 고마운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나이에 맞게 올바른 성장을 이루어 가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상식 중에 상식이 식물은 심으면 자라야 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충실해 거쳐야 하는 것이 식물의 사명입니다. 동물도 태어나면 자라서 새끼를 낳아야 합니다. 하물며 인간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그 누가 태어나면서부터 육 척 장군이 있을 수 있으며, 박사학위를 들고 태어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대략 남자는 3.4kg, 여자는 3.29kg의 몸무게로, 신장은 남자 50.12cm 여자 49.35cm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 정상적인 성장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유아기, 유년기, 소년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거쳐 장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얼마나 균형적인 성장이 이루어지느냐가 문제입니다. 몸과 정신이 함께 균형을 이루며 성장해야지 몸은 자라는데 정신이 함께 자라나지 못하거나, 정신은 정상적인 성장을 이루어 가는데 몸이 자라주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장을 안 하고 도중에 멈춘다거나 너무 빨리 성장해 버린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생명은 자라야하고 생명은 성장해야 정상입니다. 그것이 순리입니다. 한 생명이 정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성장이라는 과정을 거쳐 완전에 이르게 됩니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듯 하는 씨앗도 땅속에 묻혀 성장이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푸르른 잎사귀도 낼 수 있고 달콤한 열매도 맺을 수가 있습니다. 그 과정이란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아픔을 필수적으로 동반하지만 그 성장과정이 없으면 한 생명체의 완전이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겨울이 지난 후 봄을 맞이하면서 3월이 되면 이상하게도 강한 바람이 불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나무 가지가 마구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기에 상당히 애처롭습니다. ‘저 바람에 나무가 견딜까?’싶기도 하고 여간 걱정이 아닙니다. 그런데 식물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 강한 바람은 나무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초봄의 강한 바람에 가지가 흔들리고 나무가 흔들림으로서 새잎을 내는데 필요한 영양이 위로 잘 올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뿌리로부터의 영양공급이 겨우내 활동을 하지 못한 나무줄기를 통하여 새싹 부분까지 원활히 잘 올라가자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운동 작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숙에 이르는 필수적인 성장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어디 식물들 만이겠습니까?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새는 어떻습니까? 그 새들이 날개를 활짝 펴기까지는 그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껍질도 채 깨치기 전에 다른 짐승들의 밥이 되기도 하고, 무지막지한 들짐승들의 발아래 무참히 사라지기도 합니다. 얼마동안 껍질 속에 숨어 있다가 나오면서 바로 날개 짓을 마음껏 하며 날아오를 수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렇지 못합니다. 숱한 상처를 남기는 날개 짓의 훈련과정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자기 의지대로 하늘을 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모든 종류의 동물들도 성장의 과정을 거쳐서 성숙에 이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것보다 더욱 중요한 성장이 있습니다. 이것은 곧 영적 성장입니다. 하나님 앞에 얼마나 신앙인답게 살아가느냐는 믿음이 성장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보면 “자랄지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신앙이 성장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어갈수록 믿음도 자라가야 정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잘 보면 뚜렷한 신앙성장의 목표가 있습니다. 그 목표가 어디입니까? 15절을 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주목해야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그랬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그는 곧 그리스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즉, 신앙에서 영적생활의 목표는 예수에게까지 자라가는 일입니다.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그 단계에 머물러 있지 말고 “자라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에게 유익한 것이 주어지면 유혹도 쉽게 뿌리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이들한테는 “사탕 줄게”하는 말이 가장 쉬운 유혹의 말로 통합니다. 그 유혹되는 모양을 14절에 말씀하면서 당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것”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인 일이 사탕 하나만큼의 가치에 머물러서야 되겠습니까?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과 잘못된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어린아이와 같이 이리 저리 흔들려서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면 “성장장애”라는 중증에 걸린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영적 미숙아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신앙은 자라야 합니다. 믿음은 성장해야 합니다. 몸도 자라야하고, 정신도 성장해야 하듯이 영적으로 신앙도 성숙해야만 합니다. 

태도와 자세는 사실과 사건보다 더 중요합니다. 좋은 생각은 좋은 인생을 낳고, 성장 형 태도는 성장 형 인품을 낳습니다. 성장하는 자는 승리하는 인생을 살고, 퇴보하는 자는 패배자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시인이 승자와 패자에 대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승자는 구름 위의 태양을 보지만 / 패자는 구름 속의 비를 본다. 
승자는 눈은 밟아 길을 만들지만 / 패자는 눈이 녹기만을 기다린다. 
승자의 주머니 속에는 꿈이 있지만 / 패자의 주머니 속에는 욕심이 있다. 
승자가 즐겨 쓰는 말은 “다시 한 번 해보자” 이지만 / 
패자가 자주 쓰는 말은 “해 봐야 별 수 없다” 이다. 
승자는 꼴찌를 해도 의미를 찾지만 / 패자는 일등을 했을 때만 의미를 느낀다. 
승자는 달리는 도중에 이미 행복해 하지만 / 패자는 경주가 끝나봐야 행복이 결정된다. 
승자는 모든 문제에서 해답을 보지만 / 패자는 모든 해결에서도 문제를 찾는다. 
승자는 죽을 때까지 성장하지만 / 패자는 죽기 전에 이미 성장을 포기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성장하는 승자입니까? 퇴보하는 패자이기를 원합니까? 정신이 건강하고, 믿음이 자라고, 영적으로 성장을 이루되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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