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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베소 교회에게 (계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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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 교회에게 (계 2:1-7)

칼 바르트의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 . .세상의 방식과 전혀 다른 새로운 표지, 세상과 충돌하지만 가능성으로 충만한 길을 가리키는 표지를 이 세상에 세우기 위한 존재이다.”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교회의 능력은 세상과 다를 때 드러납니다.
오늘 날 교회의 능력이 사라지고, 신자의 권세가 땅에 떨어진 이유는 세상과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 아닐까요?

몇 달 전 제가 외국에서 돌아오니 교계에 충격적인 뉴스가 있었습니다. 교계의 원로로 바른 소리를 줄 곧 하시던 손봉호 교수님이 "한기총을 해체하라!"는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한기총은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단체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대표할지 몰라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대표하는 단체로서의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단체에 속한 교회와 지도자들이 세상과 똑 같은 가치의 표징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 곳에서 대표가 된다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권력'위 쥐는 것으로 바꿨기 때문입니다.
'섬기기 위해' 세워진 조직이 '군림하기 위해' 존재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손봉호 교수님이 폭탄 발언을 하고 그 주간에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분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내 이야기는 교회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너무나 사랑해서 한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없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보았던 그 환상들은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날카로운 채찍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 교회를 사랑하시고, 회복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초점입니다.
그래서 좀 더 솔직하고 진지하게, 그래서 아프게 우리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7주 동안 교회에 대한 시리즈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음이 참 무겁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소아시아에 있는 7개의 교회에 편지를 보냈을 때는, 당시 대표적인 교회들이었을텐데, 우리가 오늘부터 보는 성지 순례를 통해 이제는 흔적만 남은 지역과 교회를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이 사라져 버린 교회가 저렇게 초라하고 비참할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 한국 교회를 보면서 염려하는 것이 바로 저런 교회의 터를 바라보기 때문이 아닐까요?

소아시아에 보낸 편지는 사도 요한이 밧모라는 섬에 유배를 당한 뒤 그곳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기록을 한 것입니다. 학자들의 추정으로는 A.D 81-96년 사이라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알려진 사실에 의하면 로마 제국의 유명한 10대 박해가 존재 했습니다. A D 64년 네로 황제의 박해로부터 시작되는 데, 계시록이 쓰여진 시기는 도미티안 황제에 의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한 때였습니다.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유배 당하며 편지를 쓰게돈 이유를 계시록 1장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그가 붙잡혔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만이 경배를 받으셔야 할 분이라는 것을 선포하다 섬에 유배되어 고난을 당하던 때, 그리고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위협 가운데 있을 때, 어떻게 신앙을 지켜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은 첫날이기 때문에 서론이 조금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사도요한이 갇혀 있던 '밧모'라는 곳은 거칠고 황량한 바위투성이의 섬으로서 로마를 대적한 정치범들을 잡아서 감옥살이를 시키던 그런 곳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당시 박해 상황으로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거친 바위투성이의 외로운 섬에서 요한은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그에게 주시는 놀라운 세계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비롭게도 그에게 보여주시는 신천지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고난은 개인적인, 교회적인, 혹은 국가적인 차원에서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회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일곱 편지 중 첫 번째 수신자는 에베소 교회입니다. 
지도를 보면 그 이유가 단순히 지리적인 이유였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밧모 섬에서 편지를 소지한 사람이 100킬로미터만 똑바로 항해하면 에베소 항구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자신들을 ‘아시아의 수도’라고 부를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바울이 제 3차 선교 여행 때 곧바로 에베소에 가서 2년 반 정도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는 대중 앞에서 강연했고 사람들 집을 개인적으로 방문하여 복음을 전파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아데미 신전의 은 신상 매출이 하락하자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나타난 사건입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에 복음이 전해짐으로 인해 사회적인 영향력이 상당했던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후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면서 디모데에게 교회를 맡겨, 성장 사역을 감독하고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게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에 처음 투옥됐을 때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내게 되고 디모데에게도 두 통의 편지를 쓰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에 찾아오신 주님

오늘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성령에 감동이 되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환상 중에 보는 이 일들을 기록하여 에베소 교회를 비롯하여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6개 교회에 보내라고 하시는 음성을 듣고 그가 기록하여 보낸 주님의 말씀이 이 계시록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가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자신에게 이 편지를 기록하여 보내라고 말씀하신 분은 "촛대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는 띠를 띄고, 양털 같이 흰 머리털과 불꽃같은 눈을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그 음성은 맑은 물소리와 같고, 그 입에서는 좌우의 날 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은 위엄을 가진 분"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살아 계셔서 교회에게 대하여 말씀을 하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정말 대단한 위엄과 권세를 가지신 분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분이 입으신 "끌리는 옷과 가슴의 띠"는 구약시대에 대 제사장들이 입던 복장인 에봇을 말합니다. 
곧 그분은 우리 죄인들을 위한 영원한 대 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또 "불꽃같은 눈과 맑은 물소리 같은 음성"은 세상의 모든 것을 꽤 뚫어 보시는 정확한 판단력의 눈과 세상 어느 것에도 오염되지 않은 맑고 청아한 음성은 하나님의 위엄과 높으신 권세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분의 모습을 설명함으로 하늘의 모든 것을 가지신 분으로 영광과 존귀를 갖고 계시는 분임을 다시 한 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서는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분"이라고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모습을 말씀을 하시는 것은 세상 모든 교회의 주권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손에 "일곱별을 잡으시고" 라는 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지상에 세워진 모든 교회를 돌보시고 또는 지키신다는 뜻입니다. 또 그 속에서 "다니는 분"이라는 것은 오늘도 살아 계셔서 교회의 모든 것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까지도 다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표현입니다.


먼저 칭찬하십니다!

에베소 교회는 칭찬 받을 만한 교회 였던 것 같습니다. 2절과 3절에 나와 있는데,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도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말씀으로 미루어 보건대, 에베소 교회에는 많은 활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수고”라는 말 속에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을 듯 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많이 봉사했을 것 같습니다. 

“인내”라는 말 속에 그들이 많은 박해를 받았을 것이라는 것도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떠나고, 그가 죽고 난 후에 기독교인들 인해 받은 손해 때문에도 핍박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이 이교의 중심이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신앙을 시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는 것도 생각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바울과 디모데를 통해 잘 훈련받은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그렇게 쉽게 농락당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거짓을 드러낼 정도로 말씀 훈련도 잘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들에게 “분별의 은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거짓 된 것을 그러낼 정도로 말입니다.


칭찬에 도 불구하고 책망과 경고 "첫사랑" VS. "타성"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하나를 찾으라면 '그러나'라고 생각합니다. 2절과 3절에서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신 것은 어쩌면 4절을 책망을 위한 전주곡쯤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혼낼 때 충격을 조금 덜 주기 위해 좋은 점을 먼저 이야기 하고 문제를 지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책망이 무엇입니까?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노라"

요즘 나오는 책 중에 구글과 애플 그리고 삼성의 10년 전쟁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이 전쟁의 관건은 누가 변화에 익숙하게 대응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과거 컴퓨터 업계의 선두 주자였던 IBM 컴퓨터사의 공급업체였던 인텔(Intel)사의 앤디 그로브(Andy Grove) 회장은 IBM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IBM은 지속적으로 컴퓨터 업계에서 선두 고지를 점령해 온 회사이다. IBM 간부들은 이 오랜 세월의 승리에 도취된 채 살아왔다. 시대가 바뀌고 시장이 바뀌었는데도, 그들은 제품 개발과 경쟁력 향상에 있어서 과거에 자신들이 쓰던 것과 똑같은 방식을 고집했다.” 

사실 앤디 그로브의 IBM에 대한 지적은 정확했습니다. IBM 사의 간부들은 자만에 빠져서, 세월이 흘렀는데도 옛날 성공했던 기술과 비즈니스 전략을 수정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디자인의 혁신적인 변화에도 둔감했고, 컴퓨터 안의 하드웨어 프로그램인 오퍼레이션(OS: Operation System)도 옛날 방식을 택했고, PC 판매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도매상과 소매상들에게 아주 교만한 자세를 취함으로 IBM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1986년 "포춘"지 선정 미국 제1위의 그룹이었던 IBM은, 7년만인 1993년에 가서는 206위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처럼 타성은 대단히 무섭습니다. 지금 위기를 맞은 자동차 산업의 선두 주자 GM을 비롯한 미국 최대의 자동차 회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에 안주하는 타성화가 이런 엄청난 위기를 가져 온 것입니다. 작은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단지 기업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 똑같이 해당됩니다. 타성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타성은 야성을 죽입니다. 

IT 업계에서 가장 큰 혁명 중에 하나는 IBM과 Apple과의 전쟁이었죠? 수년째 스티즈 잡스가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이 된 이유는 가장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온 인물이기 때문입니다.신앙에 있어서도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가장 존중받는 교회가 어디일까요?
예수님과의 첫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왜 진부해집니까? 왜 감격이 없어집니까? "변치 않는 사랑"이 무슨 의미입니까? 
역설적으로 들릴 지 모르지면 변치 않는 사랑을 위해 우리가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끊임없이 변하는 이 세상가운데서 끊임없이 대응해야 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님은 과거 가운데 계시는 분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와 함께 미래를 향해 가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이 "타성"입니다.

우리는 에베소 교회를 향한 칭찬을 들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당연한 행위이고, 그것이 크리스천의 가장 큰 덕목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의 모습을 보니 타성이 젖어 있습니다. 습관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사랑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라, 사랑 했기에 일어났던 일들을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 '본질'이 사라져 버리고 껍데기만 남은 것입니다.
모양은 있는데 내용이 없는 위선적인 모습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교회와 계속해서 새로운 사랑의 관계 속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없는 관계와 사랑 없는 수고는 고역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야곱이 한 여자를 얻기 위해 7년 동안 노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 여인에 대한 사랑의 가치가 그만큼 켰기 때문이 아닐까요?

교회는 바로 그 사라의 관계와 사랑에 겨워 나오는 일들이어야 합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박해를 받아야 하는 이유도 사랑 때문이 아니면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인가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 중에 하나가 그런 것 아닌가요? 부모가 결혼을 반대하면 더욱 죽자고 함께 하는 것 말입니다.

사랑은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능력을 상실하는 교회는 가만히 그 중심 깊은 곳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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