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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냉수 한 그릇 이라도 (마 10: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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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수 한 그릇 이라도 (마 10:40-4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어떻게 맞이하십니까? 아무렇게나 사람을 대접하고 성의 없게 대접하는 사람은 보통 사람이나 친구일 때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주님이 여러분의 집을 방문하신다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주님도 "내 형편 잘 아시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영접하실 것입니까? 

오늘 봉독한 성경을 보면 우리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주님을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지요? 그래서 저는 오늘 봉독한 본문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접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드리므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어떻게 주님을 영접할 수 있을까요?(40절) 

"10: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한마디로 주님이 보낸 사람, 주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영접함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주님이 보낸 사람이고 누가 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일까요? 구약에서는 천사들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아브라함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군대 장관으로 오시기도 하시고 선지자를 보내셔서 찾아오게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던 것이 신약에서는 주님이 세운 직분자들을 보내셔서 영접하게 하십니다. 그중에 하나가 사도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에서 "너희"는 바로 예수님의 12제자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곧 복음을 전하러 나가는 제자들에게 "너희"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나를 영접하는 것은 나 보내신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신약시대는 주님의 제자들인 사도, 전도자, 목사 선교사들이 주님이 보내신 자들이고 그들을 잘 영접하면 그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왕이신 하나님의 명을 받은 사신이기 때문입니다. 한나라를 대표하는 대사를 "Ambassador"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대사는 여러가지 특권을 갖고 있습니다. 함부로 다룰 수가 없습니다. 대사는 곧 그 파송한 나라의 왕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사를 추방하는 일은 곧 국교를 단절하겠다는 것을 의미하고 대사를 모독하는 것은 곧 그 나라를 모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을 아무렇게나 대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정말 하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도 하나님의 종이라면 조심하여야 합니다. 엘리사를 대머리라고 욕보였던 어린아이를 곰이 나타나 찢어 죽인 사건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칩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하나님이 당신의 종들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이고 그러기에 그 권위를 대적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2. 주님을 잘 영접하면 어떤 결과가 오는가? 

성경은 분명하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償이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그 상이 어떤 형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현세의 상인지, 내세의 상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갚아주시는 상이 있다는 것이고 그 상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성경은 주님이 귀하게 여기는 모든 사람들을 왜 小子라고 했을까요? 소자란 세상에서는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하고 연약하여 힘이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소자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 소자들을 통해서 일을 하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가 갖고 있는 이름을 보셔야 합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는 말은 선지자라는 이름 때문에 선지자를 대접하면 선지자가 받을 상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춘향전의 이도령을 아십니까? 과거에 합격하여 암행어사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행색을 초라하기 그지없는 행색을 하고 나타나니 변사또가 무시하지 않습니까? 그 외모를 보고 무시했다가 암행어사 출두할 때 그 앞에서 벌벌 기는 모습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도령이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그를 보낸 왕이 두려워서입니다. 그는 왕을 대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를 알지 못하고 푸대접하고 온갖 악행을 했으니 심판을 받을 수 밖에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은 결코 상을 잃지 아는 행위임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아브라함은 엄청난 약속의 선물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부담을 갖지 말고 영접하셔야 합니다. 상받을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솔직히 성도들이 목회자를 대접할 때 어떤 대접은 부담이 됩니다. 그래서 말리려고 하다가도 하나님이 갚으신다는 생각을 하고 그냥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지요. 그 대접을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놀라운 방법으로 복을 주십니다. 

열왕기상17장에 가뭄이 들어 그릿 시냇가로 피신한 엘리사를 하나님이 시돈 땅 사르밧으로 보내십니다. 그곳도 역시 가뭄으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그 땅으로 보내 그곳 과부를 통해 공궤하게 하시겠답니다. 

엘리사는 그대로 갑니다. 그곳에 도착하자 마지 성밖에서 나뭇가지 줍는 과부를 만납니다. 그에게 자신을 먼저 물 대접을 하라고 명합니다. 그 기근 속에서 물 대접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그럼에도 그 여인은 물을 가져옵니다. 물 가져온 그에게 떡을 달랍니다. 그러자 가루 한 움큼, 기름 조금 남은 것으로 만들어 먹고 죽으려고 한다고 하자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 오라" 합니다. 

말도 안되는 상황이 아닙니까?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그렇게 무리한 요구를 합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이 놀라운 상을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결과를 보세요. 왕상17장 15절 이하를 제가 읽습니다. 

"17:15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할렐루야! 

놀라운 보상이 주어집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 뒤에 보면 그 과부의 아이가 갑자기 숨이 끊어집니다. 그때 그 엘리사가 죽은 아이 살립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상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주님이 받으실 대접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1) 예배 2)주를 위해 드리는 헌금 3)하나님 종들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은 어떤 자세로 해야 할까요? 

A)마음이 담겨진 것으로 대접을 해야 합니다. 

제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예배로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크리스찬들이 예배를 형식적으로 드립니다. 정성이 없습니다. 예배 시간 늦는 것을 가볍게 생각합니다. 예배가 정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면 예배 시간 10분 전에는 나와 앉아 마음을 정돈해야 합니다. 또 예배의 옷 가짐도 정성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시장가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에는 정장을 하며 다니다가도 교회는 편안하게 나옵니다.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몰라서 그랬다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어야 합니다. 적어도 결혼식장에 축하하러 가는 것보다 잘 입어야 합니다. 이 예배에 정성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헌금함을 입구에 비치해 놓고 자유롭게 헌금하는 것이 헌금을 안 드려도 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질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결혼식장에서도 봉투를 사용합니다. 부조도 봉투를 씁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대충 드려지는 것이라면 과연 그것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접대하는 것일까요? 흠 없는 예물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때우는 헌금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성이 담기고 마음이 담긴 것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하나님으로 대접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쓰다 남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려 마세요. 가장 귀한 것으로 드려야 주님도 우리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또 하나 정말 중요한 것인데 주를 섬길 때 기쁨과 감사로 대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절대로 억지로 하지 마세요. 받는 분도 기분이 나쁘십니다. 이왕 하실 것 기쁜 마음과 감사로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B)예의를 갖춘 대접을 해야 합니다. 

어른은 어른답게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는 여러분! 예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아시기를 축원합니다. 

옛날에 학교 다닐 때 일입니다. 수업하다 말고 비상이 걸렸습니다. 선생님들이 갑자기 교무실로 불려갔고 얼마 후 담임들이 들어왔습니다. 청소도구를 들고 대청소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유를 알고 보니 "도 교육감이 뜬다"는 것입니다. 전교생이 수업하다말고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제가 은근히 화가 났습니다. 옆에 계신 선생님께 항의했습니다. "선생님! 왜 이래야 합니까?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 "그래 이해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어른에 대한 예의란다!" "너희 집에 손님이 오신다면 어지러진 상태로 그냥 있으면 되겠니? 잘 보이기 위한 외식일수도 있으나 어른에 대한 예의를 표하는 것이란다." 그 말을 듣고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많은 교훈이 된 순간이었습니다. 

주님을 대접하는 것도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평상시처럼 하면 될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참 경건은 마음과 행동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예의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상대방을 기쁘게 하기 위함도 있으나 깊이 생각하면 나를 위해 예의가 필요합니다. 

베드로를 영접한 백부장을 보세요. 베드로가 집에 들어오자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그 결과 그 가족은 엄청난 은혜를 누립니다. 전하는 자에게 권위를 부여하니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가볍게 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말씀도 가볍습니다. 귀하게 여기고 그렇게 접대하면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도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C)냉수 한 그릇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냉수 한 그릇,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 상황입니다. 중동지방의 냉수 한 그릇은 정말 구하기 힘든 것입니다. 물 자체를 구하기도 힘들고 냉수를 구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냉수를 하찮은 대접이라고 해석하셔도 됩니다. 그런 것이라도 주님의 제자라는 것 만 보고도 베풀면 주님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러나 냉수 한 그릇은 엄청난 성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가를 이런 성의로 대접하여 보았습니까? 

특히 주님을 대신하는 사람을 대접해 보셨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먹을 양식이 없어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선교지의 백성들은 돈 10만원이면 3~40명이 최고의 식사를 대접받을 수 있어 감격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 바램은 그런 돈을 갈비 먹는데, 비싼 음식을 먹는데 쓰는 것보다는 그들과 나누었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싼 음식 먹고 그 나머지를 선교헌금 하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선교현장에서 돈이 없어 울면서 사역하는 그 선교사들을 접대하는 것은 곧 주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개척교회 목사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도 주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D)마지막으로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한번 주신 기회는 다시 찾아오기 어렵습니다. 기회를 잘 활용하는 사람이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향유를 부은 마리아!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께 옥합을 깨트려 대접했습니다. 그 기회를 놓쳤다면 일평생 그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대접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은 이제까지 어떤 대접을 하며 살아왔습니까? 그 대접을 주님이 기억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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