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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야곱의 종교개혁 (창 3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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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종교개혁 (창 35:1-15)


I. 존재의 목적

어느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 쓴 시가 있습니다. 

엄마가 있어서 참 좋다
나를 돌봐 주니깐
냉장고가 있어서 참 좋다
음식을 보관해 주니깐
강아지가 있어서 참 좋다
나랑 놀아 주니깐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자기중심적 철없는 아이의 글이지요.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가족을 위해 새벽부터 저녁까지 땀 흘려 일한 아버지이지만 적어도 이 아이에겐 아버지는 왜 있는지 모르는 존재였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하나님께서 너는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말씀하시면 그것으로 끝장입니다. 

-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 여러분의 직장, 일터도 마찬가지입니다. 
- 정당도 마찬가지입니다. 
-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왜 있는지 모르겠다고 
  세상이 말한다면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10월 30일 오늘은 494번째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당 게시판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고,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외쳤습니다. 그 당시 가톨릭교회는 성경의 진리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떠난 교회, 복음에서 떠난 교리, 말씀에서 벗어난 예배, 말씀에서 떠난 종교행위 등으로 인해, 교회의 존재 목적 자체가 사라질 위험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누군가 오늘 한국교회야 말로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가장 개혁이 필요한 교회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타락한 종교 앞에서 마틴 루터는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a Deo Gloria)’을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으로 세웠습니다. 

개혁자들은 예배의 개혁, 교리의 개혁, 신앙생활의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루터는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이 다시 본래의 목적을 회복해야 함을 끝없이 외쳤습니다. 루터가 외쳤던 교회의 개혁은 일회성의 개혁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된 교회는 날마다 새롭게 개혁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종교개혁은 교회당의 모양을 바꾸고 교회 조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에 바로 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II. 야곱의 생애

오늘 본문에서 종교개혁의 의미가 야곱의 생애에서 재미있게 드러납니다. 
창세기를 보면 야곱은 하나님과 3번의 만남을 가집니다. 

첫 번째 만남은 에서의 장자권을 가로채고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던 중, 광야에서 잠을 자다가 환상을 본 사건입니다(창28장). 
두 번째 만남은 형 에서와 만나기 전날 밤 얍복강 나루에서 천사와 씨름을 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남은 오늘 본문에 기록된 벧엘에서 다시 재단을 쌓고 그 곳 이름을 ‘엘벧엘’이라 부른 사건입니다. 그리고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성경은 이 사건이후에 곧 야곱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점은 야곱이 그의 인생을 마감하기 전에, 그가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로 다시 올라갔다는 사실입니다. 왜 야곱은 자신의 삶을 마감하기 전에 벧엘로 다시 올라가야만 했을까요? 그리고 무엇 때문에 벧엘의 이름을 다시 새롭게 ‘엘벧엘’이라 불러야 했을까요? 

“엘벧엘”이란 뜻은 “벧엘의 하나님”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 기어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신다는 고백입니다. 

야곱은 오늘 본문이 시작되기 전 이미 하나님과 2번의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34장까지 기록된 야곱의 모습을 보면,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았던 사건, 즉 남을 속이는 본성자체를 계속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야곱의 모습을 보면서 숭실대학교 김회권 교수는 야곱을
‘그는 언제나 변화의 도상에 있는 존재’였다고 평가합니다. 
“변화의 도상에 있는 존재”- 이것이 그리스도인이요 이것이 교회요 
이것이 종교라는 것입니다. 

III. 야곱과 에서의 화해 (창33:1-20)

창세기 33장 야곱의 하나님 만남 사건을 먼저 살펴보십시다.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자신의 귀향을 알리기 위해 풍성한 예물을 먼저 보냈습니다. 에서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에서는 400명의 남자들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창32:6절에 기록된 “만나려고”라는 히브리어 동사 ‘카라’는 많은 경우에 적대적인 목적을 가지고 마주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결국 야곱이 얍복강 나루를 건너지 못하도록 밤새도록 그를 붙잡고 있었던 불안과 공포의 정체는 자기를 죽이기 위해 달려오는 에서와 그가 거느리고 있는 400명의 무장세력 이었습니다. 

야곱은 이러한 두려움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며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을 했습니다. 밝아오는 아침 햇살 같은 평안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가슴엔 에서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기적이고 꾀많은 야곱은 이미 자기 살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야곱은 두 여종과 그들의 자식들을 1진, 레아와 그의 자녀들을 2진, 라헬과 요셉을 3진으로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제 4진으로 홀로 뒤에 숨습니다. 이렇게 진을 세 부분으로 나눈 것은 소위 갱단의 도마뱀 꼬리 자르기 작전이란 겁니다. 제1진이 공격을 당하는 동안 2진 3진이 도망을 가고 제2진이 붙잡히는 동안 제3진 그리고 자기 자신은 도망가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천사와 씨름을 마친 야곱은 두려움 속에서도 당당히 에서를 만나러 갑니다. 창33:3절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일곱 번 절하며 예의를 갖추는 동생 야곱을 보며, 에서는 달려와서 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때 야곱은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
(창33:10)라고 고백합니다. 

야곱의 이 고백은 얍복 강 나루터에서 보낸 그 고독하고 무서운 밤의 씨름이 에서를 만날 준비를 시킨 하나님의 배려였음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야곱이 지난 20년 동안 장자권 사건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죄책감과 번뇌를 안고 살아왔는지를 잘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형의 얼굴을 뵌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뵌 것과 동일한 속죄 효력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죽지 않고 살아난 것처럼, 복수심에 분노가 가득 차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던 에서를 보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입니다. 

에서와 야곱의 화해사건 이후 에서는 다시 세일산으로 돌아가고, 야곱은 짐승떼를 키우기에 적당한 장소를 발견하고 우릿간을 짓고, 그 지역을 숙곳이라고 불렀습니다. 짐승떼에 쏟는 야곱의 과도한 관심은 그가 밧단아람에서 이룬 물질적 성취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곱은 짐승의 생존과 건강을 위하여 기꺼이 세겜 지역과 근접한 곳에서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은혜를 경험하고서도 금방 현실적 평안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연약성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저주받아 죽을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면 신앙만을 위해 신앙적 가치로만 살 것 같은데 사는 것을 보면 여전히 세상적이더란 말입니다. 

가까운 곳에 야곱이 20년 전에 하나님께 서원을 드렸던 벧엘이 있었지만 그의 눈에 벧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계시는 브엘세바도 그의 목적지가 아니고 형 에서가 정착한 세일산도 그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오직 야곱의 두 눈은 숙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인간이 철저히 신앙중심, 영적인 존재로 산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사실 종교개혁은 생명을 거는 진정성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종교개혁은 제스츄어가 아닙니다. 선전이 아닙니다. 

야곱은 20년 전 벧엘에서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해 준다면, 이 벧엘을 제단삼아 자신의 모든 소유에서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도착했습니다(창33:18). 자신의 십일조 봉헌 약속을 어떻게 실천했다는 성경상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벧엘 약속은 잊어버리고 눈앞의 찬란한 문화도시 세겜에 장막을 치고, 세겜과 하몰 족속으로부터 토지를 사들입니다.  

‘어디에서 살 것인가?’ 이 문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야곱은 이미 잘 발전되어 있는 세겜의 도시 문화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공존하며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적당히 신앙생활하고 세상적으로도 멋지게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아니 신앙은 악세사리 정도로 두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란 듯이 성공을 하고 싶었습니다. 물량주의, 성공주의, 세속주의를 몰아내는 생활의 개혁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줍니다. 

IV. 야곱의 종교개혁

하지만 이러한 야곱의 바램은 자신의 딸 디나가 세겜 성의 추장 세겜에게 성폭행을 당하게 되면서 산산조각 나버립니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디나의 사건에 대해 ‘이스라엘’안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고 한탄하고 슬퍼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하몰-세겜의 전격적인 통혼 제안에 대해서 기습적인 역제안으로 맞섭니다. 

‘우리와 결혼할 세겜의 모든 남자는 할례를 행하라’ 

결국 세겜의 남자들은 할례를 행하였고, 모든 세겜의 남자들이 고통의 절정에 도달했을 때 시므온과 레위는 이들을 급습하여 모든 남자를 학살하고 디나를 찾아 옵니다. 뿐만 아니라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사람들의 재산과 짐승을 약탈하고 남자들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포로로 잡아 옵니다. 

결국 야곱의 세겜정착은 그에게 많은 아픔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세겜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딸 디나는 인생의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또한 야곱의 아들 시므온과 레위는 대량학살범이 되었습니다. 세겜 땅의 토착민들과 편하게 지내려 했던 야곱의 계획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패륜아,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벧엘의 언약을 버리고 살았던 댓가였습니다. 

연세가 지긋이 드신 한 노인이 어느 결혼식에 갔을 때, 봉투에 '축 결혼'이라고만 쓰고 자기 이름을 빼놓은 것이 후회가 됐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름 석자를 분명히 적어 안주머니에 집어넣고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그리고 "공군 회관으로 갑시다."라고 택시 기사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노인이 한참 가다가 자기가 어디로 가자고 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 앞에 있는 기사에게 물었습니다. "기사 양반, 내가 좀 전에 어디로 가자고 했죠?" 그랬더니 이 기사 양반 뒤돌아보며 대답하는 말이 걸작입니다. "아니 손님, 언제 타셨죠?" 

건망증 증세가 피장파장 이었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잊어야 할 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상관없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야곱은 자신의 생각과 계획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간 후에 그제서야, 자신이 벧엘에서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잊어버리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가 저지른 끔찍한 세겜 부족 대학살 사건을 접하고 어찌할지 모르고 망연자실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본문 1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벧엘로 올라가라! 본질로 돌아가라! 

하나님 곁으로 돌아오라!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야곱은 거칠고 혹독한 환난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영적인 지각력을 다시 회복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화려하고 편리해 보이는 세겜 땅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께 서원을 드린 곳, 바로 벧엘이 그의 인생의 목적지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은 야곱이 20년 전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다시 상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깨끗하게 살지 못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이 말입니다. 

벧엘은 세겜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벧엘로 가려면 올라가야 합니다.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면서 자신의 영적 고도를 높여야 합니다. 야곱은 세겜에서 겪은 큰 환난을 통해서 지금 자신의 삶이 어떤 곳에 있는지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롯이 소돔과 고모라 땅에 자신의 마음을 빼앗겨버린 것처럼, 야곱은 자신의 가축과 짐승떼의 생존과 안전에 과도하게 집착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야곱의 심장을 찌르며 다가왔습니다. 여기 “올라간다”는 말은 단순히 지리적으로 올라가라는 말만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윤리적으로 올라가라는 말입니다. 결국 세겜에서 야곱이 경험했던 파괴적인 환난은 야곱의 종교개혁으로 이어집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위기는 한국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영적 신앙의 고도를 높이라는 하나님의 부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야곱은 철처하게 자신의 모습을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드디어 야곱은 자신의 가족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사람들에게 명령합니다.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2절)

야곱은 지금 자신의 삶이 정결하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이방신상을 품고 살았음을 인정합니다. 
또한 자신의 공동체가 세겜 세력에 얼마나 동화되었는가를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야곱 공동체는 세겜에 대하여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 
세겜의 ‘문화적 어둠’에 휘둘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더 이상 세겜의 유혹에 흔들리기를 거부합니다. 
세겜 사람들처럼 살기를 거부합니다.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3절)
‘바른 예배만이 내가 사는 길이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합니다. 
새로운 종교의 제단을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세겜 사건을 통하여 또 다시 환난 날에 자신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특히 “내게 응답하시며”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인생길에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통하여, 세겜 족속의 보복공격과 추격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결국 야곱 공동체는 모든 이방신상과 금귀고리 등을 세겜 땅에 묻고 벧엘로 올라갑니다. 이 때 하나님은 야곱 공동체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키시고 보호 하셔서 그 누구도 야곱의 아들을 추격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이끌어 가셨습니다(5절). 교회안에, 가정안에, 그리스도인 심장 욕망속에 자리잡고 있는 우상을 버리는 것! 이것이 진정한 종교개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면 교회가 바로 서고 나라가 바로 서는 것 -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V. 날마다 개혁

마침내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고 그 제단을 ‘엘벧엘’이라고 새롭게 이름을 붙입니다. 하나님은 벧엘에서 다시 한 번 야곱을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야곱의 이름을 또 다시 ‘이스라엘’으로 고쳐 주십니다. 

얍복강 나루터에서 천사와 벌였던 하룻밤의 씨름이 야곱의 변화를 단번에 완성시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회성의 사건으로 모든 것을 단 번에 변혁시키는 분이 아니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긴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우리의 삶을 훈련시키십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삶 속에서 일어난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다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다시 기억하게 하셔서 성도들의 삶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   

개혁된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 가야 합니다. 
회개한 교인은 날마다 회개를 통해 자신을 죽이고 신앙의 불을 살려가야 합니다. 
신앙의 위기는 하나님 없는 종교생활입니다. 
성도의 두려움은 하나님을 떠난 삶입니다. 

지금 세계의 기독교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교회들은 크고 아름답지만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나마도 참석자의 대부분이 노인들입니다. 더 이상 교회 유지가 어려워 팔려고 내놓은 교회당들도 늘어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현제 세계의 기독교인은 약 16억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이름만 기독교인으로 등록하고 실제로는 교회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명목상의 기독교인이 7억여 명으로 전체의 절반에 이른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종말론 사상에 의하면 마지막 때 세상은 더 큰 혼란과 위기가 있을 것이고 진정한 신자 외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 것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인의 수가 줄어들 것이란 겁니다. 

중동을 중심으로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기독교 선교를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선교가 벽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미 형성된 기독교 문화권은 쇠퇴의 길에 들어서 있는 반면, 
비기독교 국가들에서의 기독교는 박해를 받거나 아니면 정체상태 놓여 있는 실정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심한 기독교 신앙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독립운동에 목숨 바쳐 앞장서고 학교와 병원을 세워 어리석은 국민을 깨우치고 대한민국 국가건설에 앞장섰던 한국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피 흘리며 세워온 교회를 우리가 깨끗하게 지키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겜의 풍요에 눈이 어두워져 종교와 교회와 신앙을 세속화 시켰습니다. 

목사들이 진리에 설탕을 발라 설교를 하다 보니 진리는 사라졌고 강단에 설탕만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제 복음종교 구원종교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켜야 합니다. 교회를 거룩하고 깨끗하게 지켜야 합니다. 

VI. 존귀한 종교 기독교 

야곱은 세겜에서 큰 아픔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드시고 의도하신 원래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단지 많은 짐승떼를 키우고 풍족한 삶을 즐기기 위한 존재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계승자가 그 정도 삶의 수준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보십시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창35:11-12) 

한 백성이 야곱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대변하는 이스라엘 국가가 야곱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야곱에게 단지 눈 앞에 보이는 현실과 여러 가지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믿음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와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 분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야 눈을 들어 벧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벧엘을 향해 다시 올라 갑니다. 벧엘이 새롭게‘엘벧엘’이 되었을 때 야곱은 드디어 영적인 갱신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옥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의 전부는 아닙니다. 
영원히 살 천국을 내곁에서 이루고 나누며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내 삶의 문제, 아픔, 어려움, 불안, 염려,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고, 교회의 목적이 아닙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세상을 바꾸는 자리까지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 땅에서 이루실 사명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내 삶을 통해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이 비춰질 소망을 품고, 그것이 오직 우리 인생의 최대의 목적임을 깨닫고, 그 목적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홍명보 감독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 일본팀에서 20억원에 스카웃을 제의해 왔습니다. 그때 홍명보 선수는 거절하며 말합니다. 
“한국 축구가 일본에 팔려가는 것 같다. 내가 정상에 있는 동안만큼은 한국을 지키겠다.”

이제 우리 함께 기독교 진리의 능력을 믿읍시다.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을 지키며 사십시다. 
지금의 고난은 반드시 개혁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진리는 승리합니다. 반드시 바로 섭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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