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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광스런 소망 (롬 8:18-25)

첨부 1


영광스런 소망

(롬8:18-25)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 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1. 한국 동란을 취재해서 미국에서 퓰리처 상을 받은 바 있는 라이트 허긴스 기자가 압록강변에서 겪은 이야기입니다. 영하 42도의 추운 날씨에 포탄맞은 군용 트럭 옆에 기대서서 깡통 통조림을 먹고 있는 해병대 용사들, 참호용 칼로 통조림 콩을 찍어 먹고 있는 그들의 옷은 대나무처럼 얼어 붙어서 빳빳해지고, 얼굴과 수염은 흙으로 범벅이었습니다. 

이렇듯 참담한 모습을 목격한 허긴스 기자는 생각하기를, 세계에서 제일 잘 산다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어쩌다가 이 전쟁에 불려 와서 이 모양이 되었는가! 너무나 괴로워 신음하다가 병사들의 손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내가 만일 당신들이 바라는 것이면 무엇이든 줄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당신들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겠는가?” 그들은 한참 생각했다가 이구동성으로 “우리에게 내일을 주십시오.” 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죽음의 위협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들려 줄 수 있는 복음이 무엇일까? “내일”을 주는 것입니다. “내일”이라는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내일”이 있을 때 인간은 어떤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게 되며 살아야 할 이유와 가치를 갖게 됩니다. 그러면 인류가 사는 지구에는 “내일”이 있는가? 

인류는 오랫동안 ‘유토피아’, ‘이상향’(Utopia,理想鄕)를 소망해왔습니다. 그런데 원래 ‘유토피아’(Utopia)라는 단어는 토마스 모어가 그리스어의 ‘없는’(ou, ‘not’)과 ‘장소’(topos, ‘place’)라는 두 말을 결합하여 만든 용어인데, 현실적으로는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nowhere) 이상의 나라, 이상향(理想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상향’을 그리면서 인간은 진보를 통한 모든 사회적 평등, 자유, 그리고 번영을 꿈꾸고 있지만 점점 사라져 가는 꿈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핵발전소, 핵무기, 인구 폭발, 기아, 에너지 자원의 고갈, 대기와 식량과 물의 오염, 지진, 화산폭발, 홍수과 가뭄, 그리고 범죄의 증가, 종족 내지는 민족적 갈등과 분쟁 등은 언제라도 세계를 파멸로 몰아갈 기세로 인류에게 절망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현대 과학과 기술을 평화적, 건설적으로 사용하므로 생겨났었던 소망은 그것들의 잠재적인 파괴력과 파괴적인 사용으로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해도 틀림이 없습니다. 

성경은 역사 이래 끊이지 않는 각종 자연재해(즉 지진, 화산폭발, 홍수, 가뭄, 등)는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자연이 탄식하며 고통하는 것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홍수’는 자연이 흘리는 ‘통곡의 눈물’입니다. ‘지진’은 자연의 ‘찢어지는 고통’입니다. ‘화산폭발’은 자연의 ‘분노폭발’입니다. ‘가뭄’은 ‘타들어가는 자연의 마음’입니다. 로마서8:20-22을 보겠습니다. 

(롬8:20-22)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현대 과학 기술로 무장한 소위 계몽된 백성들에 의해 우리 시대에 저질러진 극악무도한 죄악들은 인류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인류의 죄악으로 인한 이러한 자연재해들은 인류에게 그 탄식과 고통을 되갚아주고 있습니다. 

스위스의 세계적인 신학자 에밀 부르너(Emil Brunner)는 인간의 발달을 예리하게 해석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킨 현대인들은 무신론자가 되었으며,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파괴자, 생명의 파괴자,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자신을 파괴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최근 수 십년 동안에, 낙천적인 진보에 대한 소망이 허무에 불과하다는 무서운 생각 속에서 배워야만 했던 교훈입니다. 자연을 정복하는 과학적 도구의 무서운 증가는 전 세계적인 자살의 위험스런 가능성을 드러내왔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현대 과학 기술의 발달로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려하지만 인류와 지구에 대한 소망은 여지없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사는 하늘과 땅이 심판하시는 불로 녹아 없어지고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만이 인류의 영원한 소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3:10-13을 보겠습니다.

(벧후3:10-13)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한 개인이나 세상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참된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인류는 이 세상과 인간 존재의 한계를 초월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이 필요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오직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생명의 나라입니다. 인류가 오랫동안 소망해왔던 유토피아, 이상적인 세계는, 거액이 적혀 있지만 은행에 잔고가 없는 계정에서 발행했기 때문에 결코 현금으로 바꿀 수 없는 한 장의 부도수표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인류가 죽음을 극복하지 못한 가운데 가지는 소망은 결국 절망으로 끝이 나버립니다. 유토피아라는 백지 수표를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죽음으로 끝나버린다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을 극복하는 소망을 가지려면 속죄함을 받아야만 합니다. 현대 과학 기술이나 철학 등으로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소망은 죄를 극복하기는커녕 더 많은 죄악을 양산(量産)할 뿐입니다. 죄의 문화가 죄 의식없이 확산되어가고 있습니다. 

죄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인류가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영원한 소망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인간의 죄를 씻어내신 분은 오직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14:1-4을 보겠습니다.

(요14:1-4)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인간의 속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인류가 영원히 거처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 위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참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에 기초(基礎)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소망, 역사의 소망은 바로 예수뿐입니다. 예수에게서만 인류는 참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스런 소망’은 예수를 믿는 데 있습니다. 인류의 길과 생명과 진리가 되시는 예수에 대한 소망, 믿음이 항상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2:12입니다.

(엡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는 것은 참된 소망인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기 위한 속죄함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는 것은 선택된 백성에 대한 약속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는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상숭배하던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모로 보나 소망이 없던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밖이 아니라 예수 안에 거하는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 되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받은 아브라함의 자손, 믿음의 자손이 되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을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65:17-25입니다. 

(사65:17-25)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에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의 건축한 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재배한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서 “피조물의 고대 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타락이 자기 자신만 허무한 데로 이끈 것이 아니라, 그의 지배 아래 있던 다른 모든 피조물, 동식물을 비롯한 자연세계까지 허무하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피조물은 스스로 허무한데 굴복하지 않았고 인간의 타락에도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저주하는 가운데 피조물도 인간과 함께 허무한 데 굴복하도록 명하셨던 것입니다. 창세기 3:17-18을 보겠습니다.

(창3:17-18)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만물의 지배자이며 대표자인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당하는 허무를 그 인간의 지배 아래 있는 피조물도 함께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인류 최고의 지혜자이며 온갖 부귀영화를 누려본 솔로몬이, 모든 피조물들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전도서1:1-11입니다.

(전1:1-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 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하나님이 없는 인간사의 모든 삶과 만물의 존재 자체가 헛되고 헛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피조물들이 비록 이 세상에서 덧없이 사라지고 부패해 갈지라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전히 회복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궁극적으로 이 땅에 도래하기를 바라는 소망에서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그때에,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들도 썩지 않는 영광을 함께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솔로몬은 자신의 삶을 통해 오직 하나님만을 인정하고 그 분 안에서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것만이 참된 행복임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전도서2:11-24,12:13입니다.

(전2:11-24)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의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꼬. 행한지 오랜 일일 뿐이리라. 내가 보건대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두움보다 뛰어남 같도다.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내가 해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자에게 끼치게 됨이라.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서 내 지혜를 나타내어 수고한 모든 결과를 저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도리어 마음으로 실망케 하였도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라. 큰 해로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전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3.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은 본래 허무하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피조물 각각의 영광을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전서 15:40-41을 보겠습니다. 

(고전15:40-41)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이와 같이 각 피조물이 각기 다른 영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인생들과 함께 그 영광들이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어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조물들이 인간과 대립된 관계에 놓이게 되어 소위 ‘자연 재해’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허무하고 썩어질 것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지위를 다시 회복하게 될 때 전 우주는 본래의 질서를 회복하게 될 것이며 피조물들도 각기 자기의 영광된 위치를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1절, “(롬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는 말씀대로 인생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아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면, 각 피조물들이 각각 자기의 영광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피조물 스스로가 회복되어 에덴 동산에서의 피조물들로 복원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 그 영광을 회복하게 될 때, 비로소 각 피조물들도 그 영광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완성될 때 이사야 11:6-9의 예언이 성취될 것입니다. 

(사11:6-9)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를 고린도 후서5:17에서 이렇게 간단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 때에”,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대로 다시 오실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게 될 때,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홀연히 변하여 영광스러운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입니다. 혈과 육에 속한 옛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 계시록 21:5에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계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그가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이 각각의 영광을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미움도, 갈등도, 다툼도 없는 조화의 세계이며, 푸르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동산에서 이리와 표범, 곰, 사자 등의 맹수들이 어린 양과 염소, 송아지 등과 어울려 놀 수도 있는 곳입니다. 

‘모든 짐승들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세계는 또한 동물들이 인간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질서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현존하는 세계처럼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비정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는’ 장면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을 보여주는 절정입니다. 그날에는 독사조차도 해롭지 않습니다. 태초의 세계에서 함께 누렸던 인간과 동물, 자연계의 친화, 평화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최상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광의 회복은 영원히 썩지 아니할 영광으로 모든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바입니다. 


4. 그런데 이러한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있습니다. 본문 18절입니다.  
(롬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여기서 ‘영광’은 ‘하나님의 후사’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후사’, 곧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이렇습니다. 고린도 전서15:43-44입니다.
(고전15:43-44)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첫째 아담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이었지만 예수 믿음으로 입게 될 영광스러운 몸은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입니다. 고린도 전서15:49입니다.

(고전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흙에 속한 자의 형상’, 즉 혈과 육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후사,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마지막 순간에 홀연히 다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아도 되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15:50-53입니다. 

(고전15:50-53)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영광스러운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계21:1-5)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영광스러운 소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소망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후사가 되도록 날마다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광스러운 그 날을 바라보며 믿음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행하신대로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 누리시는 가장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고전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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