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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대사로 사는 사람들 (고후 5: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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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대사로 사는 사람들 (고후 5:13-21)
   
오늘 본문의 말씀 중에 20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라고 하셨습니다. 새번역에서는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라고 했습니다. NIV 성경에서는 “We are therefore Christ's ambassadors”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들입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신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절, 그리스도의 대사입니다. “사신” “사절”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프레스뷰오”라고 하는데, “보냄을 받는 자”, “무엇을 대표하다”, “메시지를 전달하다”는 뜻입니다. 

우리 평양노회 온누리교회의 김하중장로님이 “하나님의 대사”라는 책을 내었고, 금년에 “하나님의 대사” 제2권을 내었습니다. 김하중장로님은 ‘기도하는 대사’. ‘하나님께 묻는 대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주중대사로 가장 오랫동안 근무하신 분이요, 통일부장관을 지내셨는데, 그는 공직에 있으면서 크고 작은 일을 다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한국정부를 대표하는 대사이기도 하였지만,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파송을 받은 하나님의 대사(Ambassador of God)로 살았습니다. 

그는 주중대사로 6년 반을 근무하면서 한중수교를 진행하였고, 김대중대통령, 노무현대통령 이명박대통령을 보좌하면서 대사로 장관으로 근무하였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중보기도의 대가 중의 한 분입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합니다. “크리스천인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의 대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터와 삶의 자리에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 파송하셨다. 회사원은 자신의 회사에 교사는 자신의 학교에, 공무원은 자신의 부처(部處)에 하나님의 대사로 파송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요즈음 한국교회를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고, 답답하여 눈물로 기도합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탈선하므로 우리 사회에 누를 끼치고 수많은 사람들로 불신에 빠지게 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하였습니다. 한국교회의 대형교회들이 하나 되지 못하고 내분에 휩싸이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바람에 한국교회는 도매금으로 명예는 땅에 떨어지고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에 좋은 교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훌륭한 목사님, 존경받는 목사와 장로님들이 얼마나 많은데, 한 두 사람이 흙탕물을 일으키는 바람에 모든 목회자들이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도가니’라는 영화가 우리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고 있습니다. 공지영 여사의 장편소설을 바탕으로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픽션의 소설이 아니라, 광주인화학교에서 실제로 벌어닌 성폭력 사건을 다룬 사실을 소설이라는 장르에 담아놓은 것뿐입니다. 공지영의 도가니라는 소설을 사서 첫 장을 넘기면서 한 줄도 빼놓지 않고, 자세히 읽는데, 4시간 반을 정독하여 읽었습니다. 

금요기도회를 마치고 당회장실에서 읽기 시작하여 밤2시반에 사택에 들어갔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사실은 도가니라는 제목이 아니라, “광란의 도가니”라고 할 것인데, 충격을 완화하려고 그냥 “도가니”라고 했다고 합니다. 책에는 “광란의 도가니”라는 말이 두 번 나오고 있습니다. 그 책을 읽고는 영화를 보러갈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농아-청각장애자 중학교 학생들을 유린한 교장이나 행정실장, 그리고 교사들이 우리 기독교인이요, 그것도 교장은 장로라는 사실에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아 차마 영화를 볼 수 없습니다. 어린 청각장애에 지적장애를 가진 어린 아이들을 어떻게 쳐다볼 수가 없어 영화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광주 교육청의 장학관으로 있는 여자가 교장과 같은 교회의 권사요, 사건이 보도되고, 재판을 받는 과정에 교장이 장로로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장로가 무사히 석방되고, 무혐의로 빠져나오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모습을 그냥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교장형제는 전관예우의 변호사를 사서 집요하게 혐의를 벗어나고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데, 그런 비인간적인 처사도 울분이 터져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경찰도 시청관계자도 재판과정도 인권유린에 동조하고 있었습니다. 

억울한 농아들의 부모님을 돈을 매수하여 합의서를 쓰면서 교장은 가벼운 실형에 집행유예로 다 풀려나고 학교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우리 사회의 가치기준이라고 생각할 때, 가슴이 답답하여 견딜 수 없었습니다. 아니 기독교계통의 사회복지를 실현하는 이들이 어떻게 타락해도 어쩌면 더럽게 타락하였습니다. 

강단에서 주님께서 해주신 빛이 되라, 소금이 되라고 명령하신 것은 구호에 불과하고 육신의 정욕에 빠져서 어린 아이들 말 못하는 청각장애에 지적장애까지 겹친 불쌍한 여학생들을 유린하였습니다. 

처음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리게 된 피해 여학생의 나이는 12살이었습니다. 이 학생은 학교 행정실장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자신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어린 학생들에게 관계가 끝난 후에 콜라를 주고, 돈 이천 원을 주어서, 그 돈을 받고 펑펑 울었다는 말에 통곡하게 됩니다. 

실제로 성추행이 아닌 성폭행을 당한 학생만 12명이었다고 밝혀졌던 이 사건에서 졸업생들의 피해 사례까지 더하면 얼마나 숨겨진 피해 여성이 있는지는 지금도 모릅니다. 그 당시를 회상하는 여성들은 지금도 얼마나 큰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지 너무 고통스럽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회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모두다 그리스도인이요, 그리스도인의 대표요, 작은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려는 이들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늦었다고 생각하는 이 시점에서라도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신실한 일꾼들이 되어야겠습니다. 


1.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 하는 대사들입니다.(13-16)

그리스도의 대사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14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셨습니다. “강권하다”라는 말은 압박하다, 강요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압박하시고 강요하시면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믿게 된 것은 가히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은 ‘기적’이라는 말로 설명하였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고 하면 우리는 회개할 수도 없었고, 예수가 구세주이심이 믿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강권하시는 사랑은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내가 믿은 것 같은데,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셨기 때문에 믿어졌습니다. 성령의 사랑이 우리를 지배하시고 감동주시고 역사하시므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특권과 책임이 따르고 있습니다. 특권, 권리만 주장하고 책임을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종의 신분이었는데 아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조화를 이루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요일3:1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떠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어떠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사랑, 우리로서든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사랑이었는데, 그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님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의 아버지이셨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사랑하시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같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게 되었고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붙이고 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주시려고 예비하신 하늘의 모든 은총이 우리를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아들 예수님과 함께 후사가 되어 상속받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죄가 없으신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실 때부터 시작되었고, 확정되고,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과 저주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므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미친 듯이 살아가야 합니다. 그만큼 열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3절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특권이 있는가 하면 책임도 있습니다. 특권이 크기 때문에 책임도 큽니다. 우리가 신념이 있고, 정열이 있고, 비전의 사람이 된다면 미칩니다. 

렘20:9에 보면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불이 붙은 것처럼, 골수 -뼈에 사무치고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냥 흘려보내는 인생이 아니라, 다 닳아 없어지도록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에 열정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복음의 감격은 없고 교리만 가진 것이 아닙니까? 미친 사람은 두 가지 생각을 하지 않고, 두 가지 일을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한 가지 일에 혼신을 힘을 다하고 열정을 다합니다. 오로지 복음만이, 예수만이 나의 전부이기에 이 복음사역에 올인하게 됩니다.

15절 말씀에서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이제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 우리 주님을 위하여 살게 하여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2.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대사들입니다. 

16-17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의식구조가 예수님의 사고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육신대로 살지 말고 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이전의 불신의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옛사람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새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새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분명한 가치관을 수립하고 할 것이 있고, 안 할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셨는데, 나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분명한 자각이 있어야겠습니다. 주님의 임재를 확신하고 주님의 임재 속에 사는 사람이라고 하면 새롭게 살아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술취하지 말라.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는 말씀은 저와 여러분들에 주시는 사도바울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이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가시게 하는 능력”으로 이해해도 좋습니다. 성령님은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드러나게 하시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나를 비우고 성령으로 채워야 합니다. 주인 행세하는 자아를 몰아내고 예수님으로 우리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죄에 빠지지 않으려면 자아를 몰아내고 예수님이 왕이 되시게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사시면 새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노력을 내려놓고 내주하시는 주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확신하면 세상을 좇아가지 않고, 주님과 동행하게 됩니다. 

안드류 머레이목사님은 이런 고백을 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만 말하지 말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하라”고 합니다. 온전한 위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 다 맡기고 주님으로 만족해야 하고, 주님이 온전히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그럴 때에 온전한 헌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겸손해져야 합니다. 2010년에 한국교회 신뢰도를 조사한 것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사람들은 17.6%였습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들도 다 신뢰하지 않는다는 수치입니다. 그리고 불신한다는 응답은 48.2%였습니다. 이것은 신자와 불신자를 나누어 보면 불신자들은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사람이 8.2%, 불신한다는 사람들이 무려 55.4%였습니다. 세상을 위한 교회입니까? 그냥 교회를 위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안으로 성도들의 언행일치를 꼽고 있었습니다. 교회와 교인들이 지역사회로부터 도덕적 표준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교회와 교인들이 지역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힌다면 이 사회를 어떻게 구원하고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교회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교회의 변화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제발 대형교회들이 자중하고 교회가 둘로 나뉘어 싸우지 말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무슨 황사모, 강사모, 이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다 예수님 사모하는 사람들이지, 왜 목회자를 사모합니까? 정신이 어떻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지금 한국교회는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한 마음과 한뜻으로 함께 가야지, 담임목사 교인, 부목사교인으로 나뉘어져 대판 싸우다가 갈라서는 것을 보니, 이러고도 사회를 향하여 할 말이 있습니까? 

장신대의 노영상교수는 그의 논문 가운데 “신앙과 삶을 하나로 묶기”라는 글을 내어놓았습니다. 그의 주장을 정리해보면 우리는 신앙과 삶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너무 당연한 주장이요,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잘못된 이유 중의 하나는 무엇을 나누려고 하는 것으로부터 왔다고 말합니다. 신앙과 삶을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기도와 행동, 영과 육을 자꾸만 나누다보니 잘못된 이원론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과 행함으로 이어져야 하는 믿음을 나누려고 하는데서 잘못된 신앙관을 가져왔습니다. 이싱칭의 교리가 기독교의 핵심교리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칭함을 받는다는 구원론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면 그 다음에 행동은 아무래도 되느냐고 묻게 됩니다. 여기에 바울은 대답합니다. 

롬3:31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칼빈선생님은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의하여 값없이 의를 얻는 믿음의 칭의는 회개와 성화의 노력을 부정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약2:26)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인 삶에서 분리된 도덕적인 삶이라는 있을 수 없습니다. 수직적인 영성과 수평적인 영성은 통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말만 많고 행함이 따르지 않는 이중적인 사람이라는 말을 듣지 말고 위선적인 사람이라는 말도 듣지 말고, 언행일치의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사요, 그리스도를 보여줘야 하고, 작은 그리스도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대사들입니다. 


3.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대사들입니다. (18-21)

대사라는 말에는 보냄을 받았다는 뜻인데, 우리도 세상에 보냄을 받은 사도요, 대사들입니다. 18-21의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말씀에서 화목하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 화목하게 하는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화목이라는 말은 우리는 세상을 평화로 채우는 평화의 사절이 되어야 합니다. 화목의 직책, 화목하게 하는 말씀은 사도바울만의 사명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사명입니다. 우리 가정에 들어가면 불화가 떠나가고 화목한 가정이 됩니다. 우리들이 교회에 들어가면 화목한 교회가 됩니다. 우리의 친구들의 모임에 들어가면 불화는 어느 듯 사라지고 화목한 모임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정신,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하게 하시는 말씀으로 우리도 화목의 제물이 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거룩한 성자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목사만 성직자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성직자라는 사명을 가지셔야 합니다. 성직자의 자존심은 순교에 있습니다. 순교적인 정신으로 거룩한 자존심을 지키는 것입니다. 작은 이익 때문에 양심을 속이지 마십시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 하는 대사들입니다. 우리를 보내신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대사들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대사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사로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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