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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십자가 - 고난 (벧전 4: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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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십자가 - 고난 (벧전 4:12-14)
  

엊그제 어떤 분과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갑자기 몸이 이상해서 검진을 받아보니 중병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얼마 전에 정기검진을 받았는데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는지 모르겠다고 의기소침 하였습니다. 또 어떤 분은 젊은 분인데 갑자기 뇌졸중으로 입원을 했습니다. 한참 혼수상태에 있다가 겨우 의식이 회복되어 치료 중에 있습니다. 또 엊그제는 29살 된 젊은이가 심장마비로 손쓸 사이도 없이 갑자기 사망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의 상심이 너무 컸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말에는 40대 집사님이 중국에서 일하다가 심장 마비로 갑자기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도 보지 못한 채 쓸쓸히 혼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런 소식을 접하며 참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엊그제는 이런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유세프 나다르카니라는 이란의 젊은이가 개종하여 목사가 되었다는 이유로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국가에서 이제라도 포기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회유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젊은 목사는 예수님을 포기할 수 없다고 버티고 있어서 지금 사형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온 세계가 나서서 사형을 막으려고 압력을 넣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 교계에서도 탄원하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과연 그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요즘 갑자기 어려운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접하게 되면 두 마음이 들게 됩니다. 하나는 왜 저런 고통이 저들에게 오는가 하는 아픈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저들을 좀 챙겨주시지 않고 왜 놔두시는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늘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물질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싸워야 하고 용서하기 위해서 나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이런 고통의 문제들과 이기기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그렇게 찾아오는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여기지 말라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우리는 삶에 나타나는 고난에 대해서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고난은 사람이 살아있는 한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래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온갖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고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불평하고 생각하면 주어진 고난이 더 무겁게 느껴질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이런 어려움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찾아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 고난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생로병사에 따른 고난이 따라옵니다. 똑같이 병들 수 있고 실패할 수 있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앓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이 지키실 것이다!” 물론 지켜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적으로 지켜주심만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그런 고난이 없다면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고난을 없애기 위해 믿는 것이 될 것입니다. 

고난의 종류

고난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내가 만든 고난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5절을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 받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고난에는 나의 실수로 잘못함으로 부주의로 과욕으로 인한 경우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겪고 있는 대부분의 고난이 이런 고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4장 2-3절에서 “이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라”고 당부하면서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은 대부분 음란, 정욕, 술취함, 방탕, 향락, 무법에 의해서 발생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 건강을 잃고 생활의 무질서를 야기하며 실패와 싸움과 사고 당함이라는 고난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지난날에는 그랬다 하더라도 앞으로는 부주의함으로 고난당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본인이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왜 나에게 이런 시험을 주십니까?” 하고 기도하는 것은 우스운 기도입니다. 그 시험은 하나님이 주신 시험이 아니고 자기가 만든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때는 “내가 이런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어떤 집사님이 새벽마다 나와서 큰 소리로 남편이 나를 핍박한다고 기도했습니다. 하루는 목사님께 찾아와서 본질은 말하지 않고 남편이 핍박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몸에 어울리지도 않는 비싼 밍크코트를 샀으니까 그렇지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이 어떻게 알았느냐며 놀랐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어떻게 알기는요, 기도소리가 너무 커서 나 말고도 새벽기도 나오는 모든 분들이 밍크코트 산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일을 저질러 놓고 “왜 나에게 무거운 시험을 주십니까?” 하고 기도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고난은 내가 잘못해서 주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지해서 주어지는 고난도 있습니다. 평소 몸 관리에 무심하며 살아가는 분이 있습니다. 건강이나 몸 관리에 개념이 없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중병에 걸리게 됩니다. 그것이 무지해서 당하는 고난입니다. 무지해서 술에 취해 알콜중독자가 되고 무지해서 담배를 많이 피우다가 병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또한 남의 일을 참견하다가 주어지는 고난도 있습니다. 무분별하게 남의 보증을 서고 지식도 없으면서 욕심껏 투자했다가 낭패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두 무지 때문에 오는 고난들입니다. 그런 경우에 “나에게 왜 이런 무거운 십자가를 주십니까?”하고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가 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지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이 문제를 잘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고난 중에는 이유 없는 고난도 있습니다. 바로 욥과 같은 경우입니다. 욥은 실수도 잘못도 과욕도 죄를 지은 것도 없는데 심각한 고난이 찾아 왔습니다. 그래서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엊그제 29살 된 젊은이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그의 잘못도 실수도 아닙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더 안타깝고 힘든 것입니다. 이렇게 때때로 우리에게 이유 없는 고난도 찾아옵니다. 그런 경우는 속단하지 말고 시간을 기다려 보아야 합니다. 

고난 중에는 진정한 고난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때문에 오는 고난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그런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는 고난당하는 성도들 즉 1장 1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3:14)”,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때문에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4:16)”라며 격려합니다. 당시는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너무 심각하였습니다. 특히 로마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짐승의 밥으로 맹수우리에 던져지기도 했고 화형이나 십자가형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황제숭배 신앙이라는 큰 고난 때문이었습니다. 당시는 로마 황제를 가리켜서 “쿠리오스”라고 불렀습니다. 이 쿠리오스라는 말은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 모든 사람은 황제를 주님처럼 신으로 섬겨야 했습니다. 그래야 정부의 공무원도 될 수 있고 평안히 살 수도 있었습니다. 만일 황제를 숭배하지 않으면 공무원도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고난도 당하고 순교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목숨을 걸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피해서 땅속으로 무덤 속으로 들어가 숨어 살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고난 속에서도 꿋꿋이 신앙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전했던 것입니다. 고난 중에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오늘도 이런 고난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쓴 논문을 보니까 오늘날 세상에서, 사업하면서,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당하는 어려움이 뭐냐는 질문에 “비리, 부정, 뇌물”이라는 대답이 20%였습니다. 그리고 “무분별한 접대문화”가 18.3%였습니다. 또한 그런 일에서 벗어나려고 하니까 불이익도 당하고 따돌림도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고민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고 물었더니 31.6%의 사람들이 예배와 기도를 통해서 극복해 나간다고 대답했습니다. 아주 지혜로운 대답입니다. 사실 이런 종류의 고난은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느끼지도 못하는 고민입니다. 오히려 즐거워 할 수도 있는 일들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고민은 내가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민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난 극복 방안 

베드로는 그런 고난을 극복하는 방법을 몇 가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근신하라”고 말합니다. 이런 고난이 왜 주어졌는가를 생각해 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5장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주께 맡기라, 대적하라(5:7-9)”고 말씀합니다. 우리들은 대개 예수를 믿으면 다 해결된다고 아주 막연하게 대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믿으면 다 해결된다고 말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극복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겸손하라, 주께 맡기라, 근신하라, 깨어 있으라, 대적하라”고 말입니다. 이 요소들이 신앙을 건강하게 하는 요소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살면서 지혜롭고 때로는 신중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때로 근신하기도 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탄을 향해서는 강하게 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늘 참고 넘어가는 것만이 미덕은 아닙니다. 사탄은 소극적으로 대응하면 더 적극적으로 파고 들어옵니다. 우유부단하거나 불투명하고 염려가 많은 사람에게 무자비하게 덤벼듭니다. 마치 뇌물을 가져오는 사람이 우유부단하고 불투명한 사람에게 자꾸 찾아오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단호하게 대적하는 사람에게는 얼씬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5장 9절에서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둘째로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오늘의 고난을 분석해 보니까 그 고난은 주님 때문에 온 것입니다. 성경은 그 때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4장 14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도바울은 고난을 당하면 더 기고만장했습니다. 매를 맞으면 더 희열을 느꼈고 옥에 갇히면 더 찬송을 불렀고 박해를 받으면 더 강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난 속에 주의 영이 함께 하심을 알았기에 그것을 영광으로 알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오기도 필요한 것입니다. 셋째로 “이기라”고 말씀합니다. 18절에는 “의인이 겨우 구원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인은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인은 타인을 위해서라도 잘 이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주목합니다. 높은 위치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무너지면 세상에 큰 충격을 줍니다. 그래서 사탄은 큰 그리스도인을 무너뜨리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면 작은 그리스도인들은 저절로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이 큽니다. 

초대교회 시대 교부였던 폴리캅은 황제숭배를 끝까지 부정했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폴리캅의 친구를 보내 회유했습니다. “한마디만 하고 이 순간을 모면하게. 그리고 후에 회개하면 목숨은 건지지 않겠나?” 얼마나 그럴듯한 제안입니까? 그런데 폴리캅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당하게 그 제안을 거절했고 결국 화형에 처해져서 순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시험이 된다면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탄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넘어트리기보다 모든 사람들이 의지하는 한 사람을 넘어트리려고 애를 씁니다. 그만큼 충격이 크기 때문입니다.

어떤 암 전문의가 암에 걸렸습니다. 이미 암 세포가 간과 뼈까지 전이된 말기 4기였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자기가 치료하고 있는 암환자들이 받을 충격을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먼저 내 병부터 고쳐보자 다짐하고 마음과 생각과 언어의 습관을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무너지면 자신이 치료하는 많은 암 환자들이 다 무너진다는 절박감이 그를 무장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환자들에게 자신의 병을 그대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암환자들에게 암은 하나님 안에서 얼마든지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암환자에게는 약도 중요하고 요양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통증이 올 때는 찬송 413장을 부르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고통이 줄어드는 평안도 체험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10번의 암 수술과 재발을 이겨내고 암을 극복하여 이겼습니다. 그 후에도 하나님 안에서 얼마든지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전하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너를 위해서도 고난과 싸워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희망과 믿음의 말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면 말한 대로 내 앞에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런 은혜와 창조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평과 험담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서나 집안에서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말은 무섭게 전염됩니다. 이는 나뿐만이 아니라 내 옆의 사람에게 더 나쁜 영향을 줍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불평불만과 험담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삶이 더 무거운 것입니다. 창조적인 말과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자꾸 애급을 말하지 말고 가나안을 말해야 합니다. 남의 교회가 좋다고 말하지 말고 내 교회가 좋다고, 남의 집이 더 좋다고 하지 말고 내 집이 더 좋다고, 남의 남편과 아내가 좋다고 하지 말고 내 남편과 아내가 좋다고 말해야 합니다. 실패만 말하지 말고 승리, 치유, 회복을 말해야 합니다. 그런 말이 있는 곳에 소망이, 희망이, 회복이, 치유가, 평화가 찾아올 것이며 그때 내 주변이 가나안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당시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격려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 받으면 복이 있다(3:14)”, “그리스도인으로 예수 때문에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4:16).”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주께 맡기라 주께서 너희를 돌보시느니라.” “근신하라 깨어 있으라.” “너희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라.” 모두 주님의 은혜로 승리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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