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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요시야 왕의 개혁 (왕하 23:1-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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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야 왕의 개혁 (왕하 23:1 -3, 21-30) 

10월 31일이 종교개혁일입니다. 올해는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494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마틴 루터가 타락과 부패로 얼룩진 중세교회를 향하여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채 교회 예배당 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게재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문을 열었습니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종교개혁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당시 천주교회 내의 면죄부와 관련한 몇 가지 문제가 고쳐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한 것인데,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안에서 권력화 된 중세교회에 경종을 울리는 종교개혁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세상의 학문을 공부하던 루터가 폭풍이 몰아치던 어느 날 언덕 위에 서 있다가 번개를 극적으로 피하고 살아남았습니다. 그 길로 수도원에 들어간 루터는 로마서를 읽다가 그동안 숙제였던 구원론에 눈을 뜨게 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이 구절을 읽으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을 확신합니다. 계속 로마서를 읽어 내려가다 3장 28절에 이르러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에서 그동안 그가 가져왔던 의문이 풀어짐을 느낍니다. 

그 당시 카톨릭 교회에서 그들이 1대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베드로를 기념하기 위하여 바티칸에 큰 성당을 짓던 중에 재정이 부족하자 소위 면죄부를 팔기 시작하였습니다. 동전이 연보통에 뗑그렁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연옥에 있는 영혼이 천국으로 간다고 속여 성당을 지어야만 하는가? 성서보다 교회의 제도, 전통, 교리에 더 역점을 두는 것이 카톨릭 교회의 모습이 과연 성서적인가? 행위로도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과연 옳은가? 등의 의문은 그 당시 루터만이 가진 고민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당시에 성경은 오직 사제만이 읽어야 한다는 그릇된 관념이 있어 평신도는 전혀 읽지 못하였고 모든 미사는 라틴어로 드려지다보니 평신도들은 문자 그대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보기만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평신도도 성서를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성서를 처음으로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제만이 제사장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이 제사장이라는 만인 제사장설을 주장하였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진행하면서 엄청난 영전 전쟁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지하 방에서 집필을 하고 있는데 환상 중에 마귀가 나타나 루터를 유혹합니다. 그는 책상 위에 있던 잉크병을 마귀를 향해 던지며 "사단아 물러가라"고 외쳤습니다. 그 이후로 루터는 더욱 담대하게 개혁을 추진했다고 합니다. 이 개혁의 불길은 전 유럽으로 확산되어 각 나라의 종교개혁을 촉발시켰으며, 왜 우리가 낸 헌금이 로마로 가야하는가 하는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유럽전체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개혁에 참여한 사람들을 가리켜 '반항자'라는 의미에서 Protestant 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 지구상의 수많은 개신교회가 있지만 모든 교회는 본질적으로 종교개혁의 영향 아래 머물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의 외침 속에서 출발하였고,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을 돌려 드리는 데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은 개신교회의 역사적 근원이며, 신앙적 근거입니다. 그래서 시대를 막론하고 참된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와 성도들은 바로 이 종교개혁의 정신에서 개혁되는 교회의 모형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어떠합니까? 지속적으로 개혁돼야 할 교회는 중세교회가 그러했듯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에 얽매여 있고 양적성장주의와 세속주의에 많이 물들어 있고 사회적으로 반기독교 문화가 팽배해져가고 있습니다. 가장 개혁적이어야 할 교회가 개혁의 대상으로까지 치부되고 있는 오늘의 상황은 제2의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 모두는 종교개혁의 처음 시작할 때의 정신으로 돌아가서 우리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열왕기하 22장과 23장은 역사의 암울한 현장에서 발견된 말씀 앞에 회개하고 말씀에 순종하여 철저한 개혁을 실행함으로 종교개혁의 원리를 보여준 요시야 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왕의 규례로 알려진 신명기 17장은 모범적인 왕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신 17:19-20). 이스라엘의 역대 왕 중에서 다윗 이후로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지킨 왕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에 히스기야가 그런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보려고 산당을 일부 훼파했지만 그것은 작은 부분에 불과했습니다. 요시야는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율법의 규례에 합당한 이상적인 왕으로 규정됩니다.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합니다(22장)

요시야는 팔세에 즉위하였고, 십육 세에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구했고, 이십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우상들을 제거하며 비로소 정결하게 했습니다(대하 34:3). 요시야가 본격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게 된 계기는 재위 18년인 주전 621년에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다가 발견된 율법책 때문입니다. 힐기야는 성전 안에서 발견한 두루마리를 서기관 사반에게 줍니다. 요시야 전에 우상을 섬기던 므낫세나 아몬은 바른 믿음의 사람들을 많이 죽였을 뿐 아니라 율법의 말씀을 모두 불태워 버렸기에 왕이나 제사장이나 백성들이나 하나님의 율법을 잘 몰랐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엄청난 핍박 중에서 누군가가 하나님의 율법책을 성전 깊숙이 감추어 놓았는데 이번 성전 수리를 대대적으로 하면서 발견된 점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엄청난 보물이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성전이고 또 하나는 율법책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데 이 세상 어느 곳도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성전에서 피의 제사를 드리면 그들의 죄가 씻어졌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백성답게 살도록 주신 지침입니다. 

하나님께 진실하게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책의 발견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사반이 왕 앞에서 그 두루마리를 읽자 요시야 왕은 그것이 율법책임을 알고 옷을 찢습니다. 그 말씀을 듣기 전에는 유다가 잘못된 것 같다고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 유다는 그야말로 영적으로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는 말기암환자 같았습니다. 이는 자기를 비롯해서 자기 조상이 지은 죄악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시야는 먼저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기도하게 하고 여선지자 훌다에게 사람을 보내 물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훌다를 통해서 요시야에게 응답하신 말씀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유다가 율법의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에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다 왕들과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우상을 섬긴 것이 용서할 수 없는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2장 13절을 보면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진노의 원인은 조상들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한 것인데 죄는 조상들이 짓고 심판은 당대 사람들이 받음으로 조상들과 당대 사람들이 운명공동체로 여겨집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누적되어온 죄값이 한계점에 달하여 멸망의 때가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의 우상의 뿌리가 너무 깊어서 요시야의 노력으로는 증세만 약간 누그러뜨릴 뿐 완전히 치료될 수 없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바알 신을 버린 것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70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만큼 우상을 뿌리 뽑는 것은 어려운 수술입니다. 두 번째 말씀은 요시야의 겸손과 눈물과 기도를 보았으므로 그가 죽을 때까지는 유다의 멸망이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시야의 개인적인 운명을 백성의 운명과 분리하고 있습니다. 회개하라는 명령은 왕과 백성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개인적으로 행해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요시야 왕은 개인의 자격으로 율법 앞에 회개합니다. 요시야 왕은 백성들을 행하여 회개를 요청하지도 않았고, 제사장이나 서기관 그리고 어떤 백성도 왕과 함께 회개의 자리에 서지 않았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회개에 이른 유일한 사람은 요시야 왕입니다. 그렇다면 회개한 대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라의 멸망을 보지 않으며 평안히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백성과 언약을 갱신합니다(23:1-3)

요시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안전을 약속받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예언을 들은 직후에 백성들과 언약을 체결합니다. 요시야는 언약을 체결하는 과정에 모든 동사의 주어로 나타납니다. 주도적으로 지체 없이 진행시킵니다. 모인 사람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 유다 모든 사람, 모든 예루살렘 거민, 제사장들, 선지자들, 모든 백성들로서 “모든”이란 단어를 강조함으로써 모든 백성이 갱신에 참여하였음을 알립니다. 절차도 여호와의 전에 모두 모이고 왕이 율법을 낭독하고 왕이 먼저 언약을 세우고 백성이 다 언약을 좇기로 하는 형식을 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의 책임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왕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결단을 했습니다. 단지 징계가 두려워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겠다고 결단했습니다.  


철저하게 개혁을 합니다(23:4-24)

요시야는 발견한 말씀에 대한 예언을 통하여 민족의 멸망에 관하여 듣게 됩니다. 요시야가 유다의 멸망을 보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은 것은 요시야가 행한 개혁 때문이 아니라 말씀을 들은 직후에 보인 회개 때문입니다. 요시야가 만일 백성의 멸망을 보지 않으리라는 예언에 만족하였더라면 더 이상의 개혁을 시도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시야는 지도자로서 백성의 운명을 아프게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개혁을 시작합니다. 왕에게 일임된 권위를 가지고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하도록 도와주고 즉각적인 개혁을 시작합니다. 영토도 남 유다와 북 왕국을 망라하며 그동안 열왕들이 범했던 모든 범죄를 제거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철저하게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개혁은 성전과 땅의 개혁이 포함됩니다. 우상숭배로 인하여 성전과 땅이 가증한 상태에 이르렀으므로 정화가 요구됩니다. 요시야는 유다에서 하나님의 복을 막는 것은 우상 숭배의 죄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부터 시작해서 유다와 나아가서는 이미 망한 이스라엘 땅까지 광범위한 우상 파괴운동을 벌였습니다.  첫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우상을 몰아냅니다. 성전 방마다 들어있는 우상의 물건들을 다 끄집어내서 불태우고 가루를 만들어서 기드론 시내에 버립니다. 둘째로 요시야는 유다 안에서 모든 미신적인 풍습을 못하게 합니다. 아하스가 다락에 세운 단들을 부순 것과 므낫세가 세운 성전 마당의 두 제단을 부순 것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솔로몬이 자기 부인을 위해서 세운 산당들을 더럽힙니다. 셋째로 유다 안에서 모든 산당과 산당의 제사장을 폐지합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철저합니다(부서뜨리고, 훼파하였다). 그리고 포괄적입니다 (모든 제사장들, 게바에서 브엘세바까지). 우상과 이방신과 관련된 성물들이 제거되고 불에 태운 것은 가루로 빻아서 유다 지경으로 옮겨집니다. 솔로몬 시대로부터 므낫세 시대까지 성전과 땅을 더럽힘으로 가증함을 불러일으켰는데 성전과 땅의 정화를 다윗 시대로 연결하려는 의도를 가집니다. 개혁의 절정은 유월절의 지킨 것입니다. 사사시대부터 요시야 이전까지 유월절을 제대로 지킨 적이 없다고 규정함으로써, 요시야를 멀리 여호수아 시대로 연결합니다. 집이나 마을에서 행하던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만 거행아도록 제한함으로 유월절 절기를 전국적인 절기로 재정립합니다. 


개혁이 갑자기 중단됩니다(23:25-30) 

요시야 스토리의 마지막은 그의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요시야 왕이 바로 느고를 만나려(개역개정에는 '맞서'로 번역)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를 개인적으로만나러 간 것인지, 그의 군대를 저지하려는 것인지 그와 협상하려고 하는 것인지 드러나지 않습니다. 본문의 초점은 애굽 왕이 므깃도에서 요시야 왕을 죽인 후에 국민들이 왕의 시체를 전쟁터에 버려두지 않고 예루살렘에 와서 장례를 지냈다는 것입니다. 유다의 마지막 등불은 요시야였습니다. 여덟 살의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그는 바른 길을 갔습니다. 그가 왕이 되어 한 가장 중요한 일은 우상을 제거하고 성전을 수리하여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은 요시야와 유다 백성들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은 하나님의 말씀의 재발견입니다. 그리고 왕과 유다 백성들이 언약을 갱신했을 때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요시야의 개혁은 침몰하는 유다 왕국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복을 계속 받고 누리도록 만들었습니까? 다시 말하면 그의 개혁은 성공하였습니까? 요시야는 지금까지 유다의 왕들이나 백성들이 만들어 놓은 모든 우상의 제단과 악한 풍습을 철저하게 제거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요시야의 이런 철저한 개혁도 하나님의 진노를 완전히 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의깊게 보아야할 부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계산하셨다는 점입니다. 다윗 이후의 왕들이 범한 죄와 백성들이 범한 죄악을 총체적으로 계산하셨습니다. 노아 때 온 땅에 악이 관영했을 때 홍수로 망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악이 극이 달하니 유황비로 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레벨에 달하니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임했습니다. 각 왕들과 백성들은 개인적으로 인과응보의 혜택을 누릴 수 있지만 나라의 운명은 총체적인 것입니다. 문제는 요시야의 개혁이 역사 이래 특별한 것이었지만 나라의 운명을 되돌릴 만한 것이 되지는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는 므낫세가 흘린 피와 죄악이 너무 큽니다. 결국은 멸망할 강퍅한 백성들을 향하여 소명을 받은 이사야의 사역이나 백성을 향해 멸망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갈 것을 눈물로 예언한 예레미야처럼, 요시야는 마지막 순간까지 백성들의 운명을 돌이키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여 개혁을 이끌었던 왕이었습니다. 요시야와 유다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이 부흥의 불길을 조심스럽게 계속 타오르게 하는 것이었는데 요시야가 너무 일찍 죽는 바람에 유다의 부흥의 불길은 꺼지게 됩니다. 백성 전체가 위기의식을 함께 느끼고 개혁에 참여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요시야의 후임 왕들은 요시야가 이룬 부흥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였기에 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개혁이란 앞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끝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종교개혁자들의 이상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개혁이 필요합니다. 영적 각성이 필요합니다. 부흥이 일어나야 합니다. 개혁을 제대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말씀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요시야가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바로 개혁을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개혁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발견된 율법책 때문이었습니다. 개혁은 말씀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개혁은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지지만 특히 지도자의 순종을 통하여 시작됩니다. 요시야는 말씀 앞에 선 신실한 사명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말씀을 들은 요시야의 첫 번째 반응은 옷을 찢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 앞에 서야 하는 인간의 전형적인 반응으로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옷을 찢으며 통곡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 앞에 애통하며(마 5:4), 다시는 그러한 죄를 곁에 두지 않으며 죄를 멀리하겠다는 고백입니다.  

2) 지속적인 기도가 필요합니다.

유다는 신정국가입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를 받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가 그친다면 세상적으로 아무리 강한 것 같아보여도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은 북 이스라엘이 이미 겪었던 일입니다. 사마리아는 유다에 비해 다섯 배나 큰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첫 번째 왕인 여로보암부터 한결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만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북 이스라엘의 신앙은 죽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경제적으로는 부강했지만 신앙을 잃어버린 채 앗수르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앗수르는 내친 김에 예루살렘도 침공했지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하룻밤 사이에 18만 5천명이라는 군대가 하나님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히스기야 때는 그래도 성전의 기능이 살아 있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라의 위기 속에서 히스기야 왕은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이사야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도 이 원리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눈물의 기도가 있을 때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지켜 주십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도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막 11:17)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으면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이미 부흥의 역사는 시작된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부르짖으면서 기도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복은 임하기 시작합니다. 

3) 공동체가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언약을 갱신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면 가나안 땅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을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겠다고 약속하고 그런 그들을 하나님이 다시 받아주시는 의식을 말합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왕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백성들의 위치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고 그들을 설득해서 바른 말씀으로 돌아가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안타까운 점은 이런 부흥이 몇몇 왕이나 제사장들의 몸부림으로 끝나고 일반 백성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우상을 없애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개혁을 행한 요시야가 애굽과 앗수르의 전쟁에 개입했다가 우연히 쏜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고 결국 전사하게 됩니다. 그가 유다를 완전히 살리지 못하고 개혁을 하다가 죽은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백성들이 요시야를 위하여 기도를 많이 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부흥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다 할 수 없습니다. 요시야가 이런 정도의 개혁을 일으켰을 때 백성들이 전심으로 마음을 합하여 함께 기도하는 일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결국 요시야의 엄청난 개혁과 부흥은 유다 백성들을 물가에는 데리고 왔지만 마시게 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부흥은 요시야가 죽음으로 끝나고 맙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택하신 사람들을 통하여 영적 각성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교회를 부흥시켰습니다. 루터나 칼빈이 그랬고 영국의 존 웨슬레, 조지 휘필드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드, 무디가 그랬고 한국에는 길선주 목사, 이성봉목사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면서 함께 일할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함께 성령의 불, 부흥의 불을 일으킬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오늘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요시야같이 부흥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부흥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부흥의 불이라고 하는 것은 함께 타오를 때 강력한 불이 될 수 있는 것이지 한두 사람이 일으키는 불은 불을 붙일 수는 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꺼진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모인 무리들이 함께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쓰다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 초대교회를 시작하며 복음이 온 땅에 퍼져갔던 것 같이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말씀의 기초위에 든든히 서고 기도에 힘씀으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적인 복이 지속적으로 부어져서 충만해야 합니다. 말씀에 기초를 세우고 기도에 전념하고 함께 격려하고 나아가면서 이 귀한 주님의 부흥에 동참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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