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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희생 없이는 전도 없다 (행 11: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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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 없이는 전도 없다 (행 11:19-21)


터치 153 새생명 축제를 시작한지 엊그제 같은데 이제 다음 주면 그 동안 기도해왔던 전도자들, 태신자들을 교회로 초청하는 뜻 깊은 시간을 우리가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모두가 부담을 느끼는 전도에 대해 왜 이 강단에서 귀가 따갑도록 외치고 있습니까? 왜 그토록 한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엄청난 노력과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죄인인 인간이 지옥에서 당해야 하는 고통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요즘 지옥에 대한 설교를 우리가 들어 보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교인들조차도 이 내세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되었습니다. 갤럽 조사 보고서에서 보면, 이것이 바로 얼마 전에 조사가 끝난 거예요. 아주 최근의 조사이지요. 이 조사에 의하면 목사님들이 어떤 설교를 해 주었으면 좋겠느냐? 교인들이 희망하는 설교의 주제에 대해서 내세에 대한 설교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 구원과 영생을 포함한 내세에 설교를 듣고 싶다는 교인들의 퍼센테이지가 1.5% 예요. 그렇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에요. 

저는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내세신앙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취약하다고 생각합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왜 전도가 관심 밖이냐는 것입니다. 보세요. 요즘, 누가 우리 주변에서 세상을 떠나갔다 해도 그 분의 영원 한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까? 별 관심이 없어요, 심지어 기독교인들도 조차도 그렇습니다. 누가 우리 가족 중이나 이웃 사람들 중, 누가 죽었다 그러면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냉담하게 생각하고 혹시 가까운 사람한테 누가 죽었다 그러면 그 분의 죽음이 내 호주머니에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 거기에나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유산에나 관심이 있고, 그 분의 죽음으로 내가 어떻게 되느냐? 다른 사람이 죽든 말든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냉혹한 사회의 조류를 대표하는 조크가 수년 전에 유행했던 말 중에 "내가 죽으면 국보 손실이고, 당신이 죽으면 환경정리"라는 말이 있죠? 무서운 얘기입니다. 그렇게 물질주의적으로 가치가 세속화된 그런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즘 뭐, 좀 살만하니까, 아쉬움이 없어요. 그래서 내세에 대해 그렇게 긴박감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가지든 안 가지든 간에 분명히 때가 되면 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어떻하시렵니까? 

제가 신학교에 입학을 했을 때 원주에 있는 가나안 농군 학교에 가서 신앙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때에 거기에는 이 땅에 농촌 운동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일가 김용기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생도들이 가나안 농군학교에 들어와 훈련을 받고 있었고, 가족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마친 후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추운 겨울 한 밤 중에 500마리의 닭과 200마리의 앙고라토끼가 있는 농장에 불이 났습니다. 

한 밤중에 가족들과 생도들이 뛰쳐나가 보았지만 아비규환,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불이 붙은 날개를 퍼득거리며 살아보겠다고 몸부림하다가 잿더미가 되어 뚝뚝 떨어지는 닭들, 털 많은 앙고라토끼에 불이 붙었을 때에 빨간 폭탄처럼 동동 뛰다가 허무하게 쓰러지는 토끼들을 바라보며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장로님께서는 “그냥 지켜만 보자.”는 것입니다. 

모두들 멀찌기 서서 그 비참한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이 다 꺼진 후에 안타까이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을 데리고 예배당에 들어갔습니다. 누가 먼저 시작할 것도 없이 흐느끼는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죄악을 걸머지고 지옥에 떨어지는 비참함이 저렇겠구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온 예배당은 통곡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 날 밤 예배당에 성령의 불이 떨어졌습니다. 1,0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경찰관에게 폭행을 일삼던 깡패 두목이 그 날 회개를 하고 나중에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법대를 졸업하고 고시를 준비하던 유망한 청년이 거기 와서 훈련을 받던 중에 그 광경을 바라보고 예수를 믿었고 나중에는 농군이 되어서 장로님의 사위가 되기도 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지옥이 그들 앞에 보이는데 어느 누가 그것을 부인하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이 세상에서 전도만큼 귀한 일이 없습니다. 선교만큼 보람 있는 일이 없습니다.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전도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삼위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어떤 희생을 치르셨습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외아들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어떻게 희생하셨습니까?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셨습니다.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대신 바친 것입니다. 이것만큼 큰 희생은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어떤 희생을 치르셨습니까? 그분은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 끝날까지 교회를 떠나지 않고 교회 안에 함께 계십니다.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구원하기 위해서 먼저 희생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예수님은 참 좋은 예를 드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은 누구를 두고 하는 이야기일 것 같습니까? 바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이신 자기 자신, 성령 하나님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기 위하여 친히 썩는 밀알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희생하심으로 우리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희생 없이 생명을 건지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희생에 대해서는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 희생을 해주었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로 영접한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 나를 위해 희생해준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시간을 바치고 심지어 돈을 써가면서 나를 위해 수고한 사람이 있었기에 내가 오늘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저의 경우를 봐도 그렇습니다. 한 지난 번에 사랑에 수양관에서 있을 때 점심을 먹고 산 아래로 산책을 하는데 두명의 젊은 청년들이 언쟁을 높이는 것이 들렸습니다. 가만 들어보니까 자기 친구를 설득을 해서 수양관 대학생 집회까지 데리고 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적응이 안돼서 중간에 간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설득을 하다하다 안되니까 울면서 ‘야! 임마! 너 그러면 안돼!!’ 하고 통곡을 합니다. 지나가다 그 광경을 보고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그 눈물겨운 희생은 생명을 낳게 하는 참 기쁨의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뭐, 여기 모인 여러분들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올 때 반드시 누군가의 배려가 없이 어떻게 올 수가 있었겠습니까? 
  
본문(행11:19-21)을 보면, 안디옥에 가서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19절에 나오는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라는 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120여명의 사람들이 성령이 충만함을 받고 나자 드디어 입이 열렸습니다. “예수가 부활하셨다. 너희들이 죽인 예수가 살아나셨다. 너희들이 못박아 죽인 예수가 살아나셨다.” 그들은 겁도 없이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가슴을 치면서 하루에 3천 명, 5천 명씩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예루살렘이 교회로 바뀐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온 성에 있는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전무후무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악한 사탄과 그 영들이 드디어 교회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을 믿으십시오. 그분을 믿으면 당신의 모든 죄가 용서받습니다.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십니다.”라며 외치던 평신도 전도자 스데반을 끌어다가 돌로 쳐죽였습니다. 피에 맛을 들인 무리들은 사나운 야수가 먹이를 덮치듯이 믿는 자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그리고 공중 앞에 그들을 끌어내어 “예수를 욕하라. 예수를 모욕하라. 그러면 석방시켜 주겠다”고 회유했습니다. 
  
그것을 거부한 사람들은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무서운 핍박이 예루살렘을 하루아침에 뒤집어놓았습니다. 그 핍박을 피하여 많은 성도들이 먹을 것도 제대로 챙겨 나오지 못하고 빈 몸으로 예루살렘 성을 빠져나왔습니다. 가까이는 사마리아 지방으로 간 사람들도 있고, 유대나라 멀리 북쪽까지 피난을 간 사람들도 있었으며, 어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450킬로미터도 더 떨어진 안디옥이라는 도시까지 흘러들어 가기도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도 부지기수였을 것입니다. 
  
안디옥은 당시 로마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 인구가 50만 명이 넘었다는 기록은 안디옥이 얼마나 큰 도시였는지를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중앙대로의 길이가 무려 6킬로미터나 되었다는데, 이것은 서울에 있는 어떤 대로보다 훨씬 더 큰 규모입니다. 길바닥은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깔아놓았고, 양쪽에는 대리석 기둥이 가로수처럼 죽 늘어서 있었으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 기둥에는 밤에 가로등을 켜놓고 있었습니다. 대단히 화려하고 요란한 도시였습니다. 사방 각처에서 많은 부족, 다양한 민족들이 모여들어 함께 살았기 때문에 온갖 종교가 뒤섞여서 혼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성적으로도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경제적으로 번영한 항구 도시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쾌락에 젖어 하루하루 살아가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에서 귀족으로 살던 사람이 은퇴하면 안디옥에 와서 별장을 짓고, 온천욕을 하면서 잡담을 나누거나 경마장에 가서 돈을 걸고 노름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알고 여생을 보내는 곳으로 소문난 형편없는 도시였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시체들만 가득한 공동묘지였던 것입니다. 이곳에 핍박을 피해 도망 온 사람들이 복음을 들고 들어온 것입니다. 대부분은 유대 사람을 상대로 전도를 했지만, 그 가운데 구레네와 구브로, 그 두 지방 출신의 성도들은 헬라 사람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20,21절에 기록된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자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그들 위에 임하셔서 전혀 안 믿을 것 같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도무지 들을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는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니 그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당신은 영생을 얻는다.” 이 말 한마디에 그들의 마음이 열리고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겠다면서 두 손을 들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 도시에 교회가 생겼습니다. 

이 교회가 바로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안디옥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세계선교의 발상지입니다. 거기에서 바울이 탄생했고, 바나바가 파송을 받았습니다. 안디옥 전도를 통해서 바울의 일생 동안의 충성된 주치의였던 의사 누가가 구원을 받았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도시에 교회가 생겼습니다. 이 교회가 바로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안디옥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세계선교의 발상지입니다. 
  
어떻게 이런 경이로운 부흥이 그토록 짧은 시간 동안 안디옥에서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 대답은 간단하지만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한 자들은 가장 큰 희생을 치른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값비싼 희생의 대가를 지불한 사람들이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핍박을 피해서 예루살렘성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은 돈은 조금 가지고 나왔을지 모르지만 온통 다 털리고 나온 것이나 다름없는 처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족도 제대로 데리고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갈 곳 없고 기댈 곳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얼마나 외로웠으며, 얼마나 그 마음이 허전했겠습니까? 게다가 계속해서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 때문에 신세 망친 사람들입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그 정도로 신세 망쳤으면 절대 예수 믿으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는 곳마다, 길에서나 성에서나 사람을 만나면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메시아, 그리스도입니다. 믿으십시오”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사람들만큼 큰 값을 치른 사람들이 없습니다. 이제 남은 것이 있다면 생명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지막 남은 그 생명 하나 바쳐서라도 예수님을 위해서 살겠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명을 주님의 제단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를 전하기에 그 전도가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예수가 무엇이길래 저 사람들은 예수 때문에 가진 것 다 빼앗기고 남은 것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저렇게 얼굴에 기쁨이 충만하여 나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는가? 예수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영생을 얻는 것이 그렇게 소중한 것인가?’ 사람들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자연스레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대방이 그만큼 진지하게 나오기 때문에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희생하기를 꺼리는 사람은 능력 있는 전도를 못합니다.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 전도의 현장에 가보십시오. 그곳에는 반드시 생명을 거는 희생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진지하게 자문자답을 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값진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하고 있는가?’ 우리 한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해서 주님은 절대 만족하지 않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자신의 성공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자 오스카 쉰들러는 유대인이 경영하는 그릇 공장을 인수합니다. 그는 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나치 당원이 되고 뇌물을 바치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러나 냉혹한 기회주의자였던 쉰들러는 유대인 회계사인 스턴과 친분을 맺으면서 냉혹한 유대인 학살에 대한 양심의 소리를 듣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죽음을 맞게 될 유대인들을 구해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독일군 장교에게 빼내는 사람 숫자대로 뇌물을 주는 방법으로 유대인들을 구해내려는 계획을 세우고 스턴과 함께 구해낼 유태인들의 명단, 이른바 쉰들러 리스트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1,100명의 유대인을 구해냅니다. 

영화가 끝날 무렵, 쉰들러는 브린리츠 수용소를 탈출합니다. 차에 올라타기 전, 쉰들러는 그가 구한 천명의 유대인들과 작별을 나눕니다. 그 때 그를 도왔던 유대인 스턴으로부터 반지 하나를 건네받습니다. 그 반지는 쉰들러를 통해 살아난 유대인 중 한 명의 은 이빨을 녹여 만든 것으로, 그 안쪽에는 탈무드의 한 구절이 적혀 있습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자, 세상을 구하리라’(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world entire.) 

쉰들러는 복받치는 감정에 반지를 제대로 들지 못하고 떨어뜨립니다. 반지를 주워든 그는 스턴에서 귓속말로 이야기합니다. “더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쩌면 더 살릴 수도 있었을지도 몰라. 좀 더 구할 수 도 있었어...” 스턴은 고개를 저었지만 쉰들러는 계속 자책합니다. “사장님 덕분에 천 백 명이 살아날 수 있었어요.” “내가 돈을 좀 더 벌었다면... 너무 많은 돈을 낭비했어. 내가 만약...” “사장님 덕분에 후손이 이어질 수 있을 겁니다.” “충분하지 못했어.” “그 이상으로 하셨어요.” “이 차, 괴트한데 이 차를 팔 수도 있었어. 그랬으면 열 명은 더 구했을거야. 이 배지 금이니까 두 명은, 아니 최소한 한 사람 몫은 쳐 주었을거야. 최소한 한 명을 더 데려올 수 있었어. 한 사람, 내가 최소한 한 사람을 더 살릴 수 있었는데 난 그렇게 안 했어. 네가 그렇게 안 한거야...” 쉰들러는 무릎을 꿇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우리도 이 정도의 가책은 받을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세상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정성을 다 쏟아 시간도 내고, 돈도 쓰고, 관심도 기울이면서,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잃은 양,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망할 수밖에 없는 그 영혼을 위해서는 시간도 안 드리고, 돈도 안 쓰려 하고, 관심도 별로 기울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 입으로 사랑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육신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비하여 영혼을 살리는 일은 얼마나 더 중요합니까? 전도는 영원히 사는 생명을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위하여 내가 희생하지 않고서 되겠습니까?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희생하신 주님의 사랑에 감동 받은 우리가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다음 주에 우리가 그동안 준비하고 기도한 태신자를 초정하는 이 일은 어떻게 보면 사막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불모지를 생명이 흐르는 땅으로 바꾸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나무를 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친 돌과 메마른 흙 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지금은 모래먼지 밖에 보이지 않는 황무한 곳이지만, 이미 심는 자의 마음속으로는 꽃을 보아야 하고, 새가 깃든 우거진 나무를 보아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영혼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생명을 낳기 위해서는 믿음의 눈으로 끈기있게 복음을 심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정말 눈물과 정성, 그리고 상상도 못하는 희생이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가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심정으로 불붙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희생없는 전도는 없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돌아오면 천국에서는 기쁨과 희락의 국경일이 선포되고 새생명축제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슬픔과 고통, 찰나의 즐거움과 쾌락으로 신음하는 이 땅에서 우리의 영혼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극적인 기쁨일 것입니다. 원하기는 사랑하는 성도들 모두가 지금도 예수님을 모른 채, 지옥의 문턱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을 건져냄으로써 천국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하늘의 큰 기쁨을 소유하는 주인공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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