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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칼뱅에게 길을 묻다 (합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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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에게 길을 묻다 (합 1:2-4)


최근 영화 [도가니]가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2005년 청각장애아동을 가르치는 광주인화학교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을 다룬 영화입니다. 개봉 20일 만에 4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인기 있는 액션이나 멜로가 아닌 사회고발성 장르로 이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는 것만으로도 영화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더 큰 파장은 사회 전반에서 일어났습니다. 사회적 약자나 소외계층에 대한 권력의 횡포를 고발하고, 이에 대해 분노하는 여론이 비등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찰은 이 사건을 재수사하기로 했습니다. 정치권은 소위 [도가니법]을 제정하여 국회에 통과시켰습니다. 이 일로 정의롭지 않은 세상을 향해 분노하고 바로잡으려는 계기가 마련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이 영화를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 영화가 오늘의 한국교회에 커다란 경고를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서 성폭력을 저지른 가해자 교장과 행정실장이 모두가 다 교회의 장로입니다. 그리고 저들이 경찰에 연행되자 교인들이 집단으로 몰려가 시위를 벌입니다.

사회의 약자를 보듬고 따뜻하게 돌봐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추악한 성폭력자가 된 것입니다.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 되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어둠이요, 부패의 상징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황동혁 감독은 의도적으로 기독교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성폭력을 저지른 장본인들이 “내가 ..교회 장로야!”라고 소리치는 장면을 부각시킵니다. 마치 교회 장로가 무슨 벼슬이요 권력자나 된 것처럼 떠벌이는 것으로 조롱합니다. 그리고 성폭력을 저지르는 참혹한 장면 사이사이에 벽에 걸린 십자가를 화면에 담아냅니다.

분명히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기독교를 폄하하려했습니다. 사실 영화 속 교장은 장로가 아니라 집사입니다. 그리고 행정실장은 천주교 신자이고, 다른 가해자들도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배우 공유가 아동들 편에서 헌신적으로 수고하는 인물로 나옵니다. 사실 그는 [실로암 사람들 대표]인 김용목 목사입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목사는 고사하고 기독교인이라는 것조차 감추고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자 앞장 서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점을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한 것은 이 학교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서 설립한 학교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가해자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선한 이웃이 되어야 할 텐데 분명히 그렇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보듯이 세상으로부터 따끔한 질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오늘의 한국교회에 계속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져 달라고,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들 다워져 달라고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분명히 개혁되어야 합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자리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 앞에 95개조항의 반박문을 내 걸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당시 부패한 교회를 새롭게 개혁한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인답게 새롭게 새워가기 시작한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이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종교개혁주일을 새삼 뜻 깊게 맞이하게 됩니다. 새롭게 개혁되어야 할 한국교회의 무거운 과제를 대하면서, 무겁게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분명히 오늘의 교회를 새롭게 개혁하고자 할 때, 당시 종교개혁자들에게 길을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개혁자들의 교회 개혁의 정신 안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는 장로교와 개혁교회의 창시자인 종교개혁자 칼뱅에게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를 새롭게 개혁하려고자 할 때,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 지 길을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I. 죄에 대한 분노

칼뱅은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제일 먼저 시도했던 것이 교회 안에 그리고 그리스도인들 안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죄와의 전쟁이었습니다.

칼뱅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단행하고자 시를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이 때 교회 안에 수많은 죄악이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네바 시의회 기록을 보면,  로마 천주고 신부들과 수도사들이 창녀와 성적으로 문란한 여인들 때문에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고 나와 있습니다. 게다가 종교개혁으로 새롭게 세워진 초기 개신교 목사들도 여신자들과 성적으로 문란한 행동을 하다가 발각되는 일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칼뱅은 이 일로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방향을 거창한 구조적 개혁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죄와의 전쟁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박국 선지자가 3절을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하박국 선지자가 당시 자기 앞에 드러나는 죄 때문에 크게 분노하고, 깊이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개혁하고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려고 할 때, 먼저 죄에 대해 분노해야 합니다. 한국교회 안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죄에 대해 분노해야 합니다. 특히 내 안에 있는 나의 죄에 대해 분노해야 합니다. 개혁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 인기리에 방영됐던 TV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두 얼굴의 사나이]입니다. 

이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 데이빗은 실험 도중 잘못 돼서 문제가 생깁니다. 평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분노를 느끼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호르몬 이상분비로 인해 괴력을 지닌 괴물로 바뀝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얌전하고 성실한 청년이었지만 불의를 보거나 죄가 저질러지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면 괴물이 됩니다. 그리고 불의와 싸웁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이런 모습을 가지고 계십니다. 노아 홍수시절 인간이 저지른 죄가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되자, 하나님께서 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그 지경에 죄가 가득하자, 하나님께서 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유황불로 그 지경을 심판하셨습니다.

출애굽 과정에서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악이 자리 잡게 되자, 크게 분노하셨습니다. 저들이 시내광야에서 금송아지를 숭배하자,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셔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해 분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어느새 자리 잡게 된 죄에 대해 분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심령 속에 나도 모르게 자리 잡게 된 죄에 대해 분노해야 합니다. 

죄에 대한 이 거룩한 분노가 바로 개혁의 출발점이 됩니다. 죄와 불의를 용납하거나 유야무야 넘어가게 되면 결코 개혁은 시작될 수 없고, 시작되어도 개혁은 완결될 수 없습니다.

칼뱅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면, 제네바 교회는 적극적으로 불의와 부패를 개혁해 가는 일에 앞장섰다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불의한 채권자들, 독과점자들, 투기꾼들, 고리대금업자들, 힘없는 사람들을 짓밟는 악한 자들을 징계했습니다. 그야말로 사회에 드리워있는 죄악과의 전면전을 치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먼저 우리 자신 안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죄가 있는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힘들고 아프더라도 이것들을 척결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교회다운 교회, 교인다운 교인은 이루어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II. 코람데오

칼뱅은 성경을 깊이 연구한 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마음에 새겨야 할 삶의 태도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삶의 좌우명으로 삼았고, 또 그것을 힘주어 가르쳤습니다. 바로 “Coram Deo”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시 139:7-10에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한 마디로 말해, 다윗은 자신은 늘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코람데오”입니다. 칼뱅은 다윗처럼 자신이 늘 “하나님 앞에”있다는 것을 깨닫고 살았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창 39:9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며 했던 말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지금 보고 계시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코람데오입니다. 칼뱅이 요셉처럼 늘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죄를 멀리하며 살았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 마음속에 양심을 담아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네비게이션처럼 올바른 길을 제시하며, 인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브레이크처럼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 중지시키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뒤에 이 양심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고장이 난 것입니다. 제대로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문제가 생겼을 때 제동을 걸지 못합니다.

딤전 4:2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양심의 상태가 화인을 맞은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참 많은 사람들이 양심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이런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주저함이 없이 잘못된 길로 나갑니다. 두려움 없이 죄를 저지릅니다.

딤 1:19를 보면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양심을 고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양심이 제대로 잘 작동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양심이 착한 양심입니다.

윤동주의 시 구절이 생각이 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착한 양심이 예민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양심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착한 양심을 회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코람데오의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코람데오 즉 “지금 하나님 앞에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양심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 양심이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III. 경건한 삶

칼뱅은 진정한 종교개혁은 온전한 신앙생활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교회 그리고 나아가 제네바 시민들이 그런 삶을 살도록 힘써왔습니다.

이런 노력을 추구하면서 칼뱅이 마음 속 깊이 담아두었던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경건"(piestas)입니다. 이 경건이라는 말은 칼뱅신학을 대표하는 그의 독특한 신학적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경건이란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며 주로서 두려워하고 경외할 뿐 아니라 그분의 의로움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거역하는 것을 죽음보다 더 무서워하는 신실한 감정”입니다.

경건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 붙잡혀 사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며 삶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은 죽음처럼 싫어하며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정말 최선을 다해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칼뱅은 이런 경건을 실천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기도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살피며 회개하는 일에도 전력을 다했습니다. 나아가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전력을 다했습니다.

유명한 전도자였던 빌리 선데이의 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원래 야구선수였다가 회심했습니다. 회심 초기에 멘토 격인 한 신자가 선데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대에게 세 가지 간단한 규칙을 주려하오. 만약 이 규칙을 지킨다면 그대는 결코 신앙의 퇴보자는 되지 않을 것이오. 하루에 15분 동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이시요. 하루에 15분 동안 하나님께 말하시요. 하루에 15분 동안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하시오.”

빌리 선데이는 깊은 감동을 받았고, 이 세 가지를 자기 생애의 규칙으로 삼고 철저히 지켰습니다. 하루 첫 시간을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고, 또 하나님께 기도로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 15분 동안 누구에게든 하나님에 관해 말하려고 힘을 썼습니다.

그러자 그의 삶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그는 경건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 속에 경건을 세워가야 합니다. 진정 하나님께 붙잡힌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한국교회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정말 이대로는 안 됩니다. 어떤 형태로든 개혁이 되어야 합니다. 구조 개혁도 필요하고 눈에 보이는 교회의 개혁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시급한 것은 신앙 개혁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의 개혁입니다.

이 개혁을 위해 칼뱅의 후예로서 칼뱅에게 길을 물어야 하겠습니다. 칼뱅은 우리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던 당시의 교회를 성공적으로 개혁했기 때문입니다.

칼뱅에게서 배우게 되는 것은 우선 철저하게 죄를 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분노하고 엄격하게 쳐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코람데오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점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잡힌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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