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마음이 청결한 사람 (마 5:1-8)

첨부 1


마음이 청결한 사람 (마 5:1-8)

가을을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하늘이 높고 맑은 계절입니다. 맑은 하늘을 볼 때마다 우리 마음도 저렇게 맑았으면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복 중 여섯 번째로 <마음이 청결한 사람>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아마도 마음이 깨끗하고 맑고 투명한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청결, 혹은 정결을 좋아하십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소위 정결예식에 관한 많은 말씀들이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은 정결해야 합니다. 부정한 사람은 하나님께 나갈 수 없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어느 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바라보는 신비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이사야서 6장 1절 이하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순간 이사야는 매우 중요한 실존적 깨달음을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자신이 부정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다음 5절을 보면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부정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야는 그 이전에는 왜 자신이 부정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주변이 모두 검으면 자신의 검은 것이 눈에 띄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검은 것이 하얀 것 옆에 가면 비로소 검다는 것이 극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이사야는 부정한 백성들 틈에 섞여 살았습니다. 그 때는 자신이 더러운 줄 잘 몰랐습니다. 주변 사람 모두가 부정하고, 모두 더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게 되자 자신이 얼마나 부정한 사람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결할 것을 요구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쁨을 누리길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정결을 요구하십니다. 

부정한 채로 하나님 앞에 나가면 기쁨이 없습니다. 이사야를 보십시오. 이사야는 자신이 부정한 것을 깨닫는 순간 큰 고통을 느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탄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이 기쁨이 된 것이 아니라, 고통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보다 큰 복이 없는데, 부정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기쁨은커녕 오히려 부끄러움과 고통을 느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 마음이 청결해질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대목에서 크게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청결>을 더럽지 않고 깨끗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으로부터 모든 악한 것들을 버리면 청결해진다고 말합니다. 그 악한 것들이란 교만, 욕심, 정욕 등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을 버리면 청결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소위 비우고 버림으로써 얻는 <비움의 영성>입니다. 

그렇다면 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면에서 요즘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 불교의 템플 스테이입니다. 과거에 경부 고속도로로 언양 쪽으로 가다보면 통도사 관광호텔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호텔이 아니라 통도사에서 운영하는 템플 스테이 숙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모든 일을 멈추고 절에서 시키는 방법대로 명상을 하면서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아무 것도 없는 <무, 공의 상태>로 만들고자 합니다. 

이런 방법은 과거에 기독교 안에도 있었습니다. 고대 교회 시대부터 중세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소위 영성주의자들 안에 이런 경향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없는 들판, 사막, 깊은 산, 공동묘지 등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가만히 명상합니다. 비우려는 노력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과연 옳은 방법일까요? 

성경은 비우려는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씀합니다. 저희 부모님은 서울에서 수십 년을 사셨습니다. 작년 가을 너무 연로하셔서 부산에 모셔왔습니다. 문제는 사시던 집을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장롱이 세 개 있었고, 그 안에 많은 옷가지들이 있었습니다. 냉장고, 세탁기, 많은 그릇들과 물건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버리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처리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했습니다. 우선 어머니를 모시고 올라가서 입으실 옷가지들을 고르시게 했습니다. 그 많은 정든 옷들과 물건들 중에서 몇 가지만 고르고 나머지를 포기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세월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었습니다. 

고르고 난 나머지는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너무도 간단했습니다. 전화 한 통으로 해결했으니까요. 폐기물 처리를 하시는 분을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전화를 했더니 바로 연결되었습니다. 아파트 열쇠를 부동산중개사무소에 맡기도 내려왔더니 처리업체에서 와서 싹 정리해 주었습니다. 그 비용이 30만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냉장고 등 쓸 만한 물건 값을 쳐서 5만원을 돌려주었습니다. 일을 맡기고 내려오다가 아차 싶어 전화를 했습니다. 부모님이 입으실 수의는 가져가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 올라가 보았습니다. 집은 깨끗했습니다. 물건을 버리는 분들이 청소까지 다 해 놓았기 때문에 구석구석이 깨끗했습니다. 부모님께서 사실 때 있었던 보기 싫은 낡은 물건, 쓰레기 등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정말 깨끗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빈 집에서 저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눈물이 났습니다. 너무도 허전했습니다. 수의 두 벌만 작은 방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없어진 것은 물건만이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의 과거, 수십 년의 삶의 흔적이 사라졌습니다. 우리 식구가 함께 앉아 밥을 먹고 잠을 자던 과거의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습니다. 사라진 물건들과 함께 부모님의 인생도 사라지는 것 같아 슬펐습니다. 

성도 여러분, 깨끗하게 된 것만으로는 기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는 것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비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채움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복음은 비움과 채움 모두를 줍니다. 바로 이 점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청결과 다른 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청결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청결은 <없어야 할 것은 없고, 있어야 할 것은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청결은 무조건 마음의 것들을 다 버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템플 스테이 식의 방법, 도를 닦는다든지, 산속에 들어가 명상을 하는 방법으로는 안 됩니다. 

비움과 동시에 채움이 이루어지려면 주님이 주신 방법대로 해야만 합니다. 더구나 우리가 주님의 방법으로 해야 할 중요한 이유는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마음을 다스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명상이나 주문을 외우고 도를 닦는 방법으로는 우리 마음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사람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바울 사도도 로마서 7장에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고통을 고백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청결을 위해 우리는 주님의 방법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청결하게 함에 있어서 명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로는 스스로 씻으려 하지 말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바 있는 이야기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명한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보면 기독도가 여행을 하다가 한 여관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방을 안내받고 보니 너무 더럽고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습니다. 그는 청소를 부탁했습니다. 한 계집아이가 먼지떨이를 가지고 와서 열심히 털어댔습니다. 방이 조금 깨끗해 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계집아이가 나간 후 조금 있으려니까 공중에 떠다니던 먼지가 다시 내려 앉아 전과 같아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청소를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여관 주인이 양동이에 물을 가득 가지고 왔습니다. <그 녀석은 청소할 줄을 몰라요. 자 나오세요. 내가 청소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더니 방바닥에 물을 쏟아 붓고 빗자루로 쓸어냈습니다. 많던 먼지가 물에 씻겨 내려갔습니다. 드디어 방이 깨끗해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도 이렇게 씻어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의 청결은 우리 스스로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을 폐기처분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마음을 비우려는 명상이나 금욕 등은 먼지떨이로 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도움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면 안 됩니다. 양동이의 물로 씻어내듯 우리 죄를 씻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마음의 죄악을 씻어내야 비로소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그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도움을 받은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이사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입술이 부정한 자신을 한탄할 때, 어떻게 입술의 부정이 제하여졌습니까? 이사야서 6장 6-7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성도 여러분, 오직 주님만이 우리를 정결케 하실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는 마음을 오직 하나님께만 모아야 합니다. 

본문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청결을 <clean>이라고 하지 않고, <pure>라고 한 것을 보게 됩니다. clean은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pure는 단순히 깨끗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것>을 말합니다. 순수란 여러 가지가 섞이지 않은 상태, 한 가지로만 채워진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두 마음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마음으로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 

두 마음은 순수한 마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을 책망합니다. 야고보서 1장 6-8절을 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의심합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있고, 믿지 않는 마음도 들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기도 하고, 세상을 사랑하기도 합니다. 그는 열심히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다가 어떤 때는 자기 뜻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포기합니다. 이처럼 양다리를 걸치듯, 서로 다른 마음이 모두 들어있는 것은 청결한 마음, 즉 순수한 마음이 아닙니다. 

순수한 마음을 가지려면 우리 마음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고통이 닥쳐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멸망이 아니라 생명으로 인도하고 계심을 믿고 흔들림 없이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누가 와서 무슨 말을 해도 그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심을 믿는 그 마음이 곧 청결한 마음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비움만으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채움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채움이 무엇일까요?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인도하실 것을 믿고, 두 마음이 아니라 한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때 생기는 기쁨입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모습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명상이나 도를 닦는 방법으로는 이런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런 모습이 마음이 청결한 사람의 모습이라면, 이런 사람에게 어떤 복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여기서 어려운 문제가 대두됩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우리의 두 눈으로 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이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채워져 있어 모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아침에 출근하는 길가에 피어있는 코스모스 한 송이에서 하나님을 느낍니다.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일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일로 여겨집니다. 권태롭고 피곤한 삶이 아니라, 매일 매일이 기쁨으로 춤추며 일어서는 축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특별히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삶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깨닫는 것, 그리고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 안에서 해석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와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고생했고, 감옥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했지만, 늘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후에 그는 애굽 백성들을 흉년에서 구원하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에 보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생애 전 과정에 하나님의 손길이 숨 쉬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매순간 하나님께 충실했습니다. 그랬기에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해도 이길 수 있었고,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님들에 대한 분노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내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고백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낮에도, 밤에도, 힘들 때도, 어려울 때도 하나님을 느끼면서 살았습니다. 이게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왜 나를 이리로 인도하시는가, 왜 내게 이런 기회를 주시는가, 왜 나로 하여금 이 사람을 만나게 하시는가, 왜 나로 하여금 이런 일을 하게 하시는가.....>라고 늘 질문하면서, 그 질문에 신앙적 대답을 발견하는 기쁨을 맛보면서 삽니다. 이게 하나님을 보는 사람의 삶입니다. 

이해인 님의 <나의 별이신 당신에게>란 시를 읽어 드리고자 합니다. 이 시에는 하나님을 별에 비유하면서 늘 그분의 시선을 느끼는 마음을 잘 담고  있습니다. 

조용히 끝난 하루를 걷어 안고 그렇게도 멀리 살으시는 당신의 창가에 나를 기대이면 짙푸른 시원의 바다를 향하여 열리는 가슴 / 
구름이 써놓은 하늘의 시 바람이 전해온 불멸의 음악에 당신을 기억하며 뜨겁게 타오르는 작은 화산이고 싶습니다 / 
내가 숲으로 가는 한 점 구름이었을 때 더욱 가까웁고 따스했던 당신의 눈길 / 
문득 우주가 새로워지는 놀라운 환희의 시심을 처음으로 내게 알게 한 당신 / 
아프도록 순수한 영혼 속의 대화를 침묵 속에 빛나는 기도의 영원함을 날마다 조심스레 일깨우는 당신이여 / 
오직 당신을 통하여 하늘로 난 하나의 문이 열리면 나의 어둠은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하고 / 
어진 눈길 묵묵히 모아 당신이 계신 은하의 강가에서 가슴 적시옵니다 나는 / 
언제나 함께 사는 멀리 가까운 나의 별이여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오신 것이 주님의 인도하심임을 아십니까? 앞으로 살아갈 매일 매일의 삶에 주님의 함께 하실 것을 믿습니까?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삶입니다. 이 축복을 얻으시길 기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