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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독교의 시작 (행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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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시작 (행 2:1-24)

기독교의 시작은 언제부터였을 것 같습니까. 기독교는 정확하게 언제 시작했습니까. 막상 생각해보면 대답하기가 좀 난처합니다. 대한민국이 언제 시작했느냐는 질문과 비슷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대한민국은 1948년 미군정에서 벗어나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을 때 시작했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대한민국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냐. 그건 아닙니다. 이름은 달랐지만 엄연히 존재했습니다.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이라고 이름을 선포했을 때 그때 벌써 대한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었고 삼일운동을 할 때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또 그 이전 조선왕조든 고려왕조든 통일신라든 삼국시대든 고조선이든 이 모든 나라가 이름과 왕조는 달랐을지 모르지만 모두 한민족의 역사요, 유산이요, 그 바탕위에 대한민국이 건국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기독교라는 이름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지만 구약시대에 이미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는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에녹의 시대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때 벌써 신앙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기독교가 존재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요. 

또 아브라함의 시대, 아브라함을 뭐라고 부릅니까.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로 말미암아 믿음의 전통이 시작되었고 이스라엘의 민족이 유래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기독교가 탄생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 모세의 시대는 어떻습니까.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서 유대교의 신앙이 본격화되었지만 기독교는 아직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신약시대로 넘어와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그때에 기독교가 정식으로 시작된 것이냐. 시작은 시작인데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신 것도 아니고 단체를 만드신 것도 아니고 조직을 만드시지도 않고 제자들을 남기고 떠나가셨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니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남긴 것은 끝까지 당신을 따랐던 백이십 명의 성도들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공식적인 시작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교회의 탄생이요 기독교의 공식적인 탄생입니다. 그 이유는 성령강림도 성령강림이지만 본격적인 기독교의 케리그마가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케리그마 라는 말은 헬라어로 선포한다는 말입니다. 번역하면 preaching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케리그마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내용의 복음을 전하는 그 전함입니다. 그것을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이 케리그마가 언제 공식 출범했느냐면 오순절날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 일어나 최초의 설교를 하는 그 설교문 속에 케리그마의 탄생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사도행전 2장을 본문으로 설교할 때 성령의 은사라든가 성령의 세례를 주목하려는 경향이 많지만 그것도 중요합니다마는 베드로의 설교 내용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설교 내용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믿었고 무엇을 전했고 어떤 믿음의 고백을 했느냐는 아주 귀중한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신학자들은 사도행전에는 별로 신학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사도행전 대신에 복음서를 주목했습니다. 

사도행전은 변두리 문서 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간과하는 것은 사도행전의 저자가 복음서도 썼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가 사도행전도 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에서 묘사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서가 소개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분이 아니고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제가 왜 이것을 강조하느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 예수 그리스도, 복음서가 말하는 실제로 존재한 예수 그리스도와 이후의 사도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가 다르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설에 의하면 실제 예수님은 자기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고 하나님 나라에 주로 말씀하셨는데 이후의 사도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예수님을 그들의 메시지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렇게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많이 있지만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같이 썼다는 사실은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가 다를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같은 예수님이에요. 누가가 같은 관점에서 복음서를 쓰고 사도행전을 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와 실제로 존재한 예수 그리스도가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크 트웨인이 톰 소여의 모험도 쓰고 허클베리 핀의 모험도 썼습니다. 그렇지만 같은 저자이고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보면 톰 소여도 등장합니다. 다만 줄거리가 발전하는 것뿐이지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신다고 하시는지, 예수님이 어떤 식으로 인류를 구원하려고 하시는지, 예수님이 이루려고 하시는 게 무엇인지 제자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언제 제자들의 신앙이 구체화 되었느냐.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이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셨을 때 제자들은 이제 비로소 예수님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일어나서 첫 설교를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일어난 사건도 주목해야 되지만 기록된 사도들의 설교 내용을 봐야 됩니다. 왜냐하면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의 설교내용이 그것이 기독교의 케리그마요 그들이 무엇을 믿었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했고 그들의 믿음을 뭐라고 고백했는지를 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처음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삼천 명이나 됐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에요. 이것은 이날 성령의 역사가 강해서 이렇게 큰 결과가 나타났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후로 줄기차게 어디를 가든 이와 같은 복음의 케리그마가 증거되는 곳에는 이와 같은 역사가 일어났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역사가 그것을 우리에게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는 이후에도 복음이 이방민족들에게 증거될 때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 패트릭이 아일랜드에 복음을 전해서 아일랜드 사람들이 기독교화 됐기 때문에 지금도 아일랜드 사람들은 성 패트릭 데이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또 러시아에 성 키릴이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영화 어부의 신발을 보면 러시아 사람으로서 최초의 교황이 되는 사람이 자기의 이름을 키릴 1세라고 불러달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와 같이 복음의 케리그마를 전할 때에 사람들이 거기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현상이 사도행전 2장에만 이례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이와 같은 복음을 전달할 때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의인이든 죄인이든 다 동일하게 믿음으로 응답하는 현상이 줄기차게 모든 곳에 나타났다는 얘기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이 증거되는 곳에 성령이 함께 역사하셔서 이것이 진리라는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본문 사도행전 2장에서 우리는 성령이 강림하셨다는 사실만 보면 안 되고 방언이 터져 나왔다는 사실만 보면 안 되고 베드로가 뭐라고 설교했는지를 봐야 됩니다. 제가 몇 달 전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이 떠나가시고 한참 후에 이와 같은 메시지가 만들어진 게 아니고 오십일 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와 같은 설교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설교 내용을 살펴보면 설교가 길기 때문에 다 읽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긴 설교를 다 인용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긴 설교를 한 장에 걸쳐 기록했습니다. 

베드로는 첫째로 성령강림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사람들이 이 다락방에 모여들게 된 이유는 성령강림이라는 초자연적인 역사에 강한 흥미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현상에 대해 흥미를 가집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인 현상,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하여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그걸 알고 싶어 하고 경험하고 싶어 하고 이해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사도들에게 능력을 주시기 위한 것뿐만이 아니고 예루살렘에 모인 이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게 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강한 성령의 역사를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서 베드로는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설명합니다. 그 말은 이건 그냥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고 구약 예언의 성취다,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다시 말하면 이것은 말세의 시작이다, 이 말세에 대한 예언의 성취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가 설교 내용을 누구로 옮겨가게 되느냐면 예수 그리스도로 옮겨갑니다. 성령에 대해서 설명하다가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을 하나님이 주시는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은 성령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고 마치 컴퓨터 스크린의 커서와 같습니다. 마우스를 움직이면 커서가 움직이는데 커서가 사람의 손가락 표시입니다. 이게 성령과 비슷합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십니다. 성령을 받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성령 충만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알게 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성령의 능력이든 성령의 은사를 자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령이 아니요 복음이 아니요 기독교의 진리가 아닙니다. 

성령의 체험은 성령의 체험으로 끝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나는 예수님을 전하고 싶다는 소원이 있으시다면 여러분은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섬기기 원하신다면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성령받기 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을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성령과 복음, 성령과 교회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것은 첫째로 예수님의 공생애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 또 예수님의 부활, 이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22절에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지금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이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에 대해서 그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너희도 아는바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 그리고 복음서 기록의 신뢰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만일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없고 또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없었다면 베드로가 이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할 때 거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서 이견을 내지 않고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들도 동의했다는 얘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고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요. 누가는 누가복음을 이미 기록한 전력이 있기 때문에 사도행전에서는 누가복음에서 말한 것을 되풀이 하지 않고 사람들이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정말로 계셨다. 예수님이 정말로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고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리고 25절에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예수님의 수난은 우연히 어쩌다가 생긴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그러나 동시에 너희가 죽였다, 법 없는 자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다. 예정입니까? 인간의 자유의지입니까? 둘 다에요. 둘 다 나와요. 하나님의 예정도 있고 인간의 자유의지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죽인 것입니다. 

그 다음 절에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그러면서 시편 16편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이 시편 16편 말씀이 장차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32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witness 이로다’ 우리가 사도들의 케리그마를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증인이기 때문에 그들의 증언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전하는 것은 어떤 철학도 아니고 사상도 아니고 이들이 목격한 사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증인이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의 증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목격하고 그들의 증언을 전하고 가르치고 성경으로 기록했습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오늘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결론이 36절에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기독교의 케리그마는 정보를 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결단, 회개, 믿음을 촉구합니다. 38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아, 오늘 좋은 말씀 들었다. 아, 오늘 많이 배웠다.’ 이러고 집으로 돌아간 게 아니고 이들은 가슴을 치면서 ‘우리가 어찌할꼬’ 그들이 어떤 반응을 할 것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가를 알고자 했습니다. 

케리그마는 사람들이 그냥 듣고 지식을 쌓고 정보를 얻는 것으로 끝나게 하기 위한 게 아니고 사람이 회개와 믿음으로 응답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응답이 없는 케리그마의 전달은 실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지식을 전하고 지혜를 전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우리에게 진리를 말씀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우리의 응답, 우리의 믿음, 우리의 순종을 요구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이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가 되게 하셨느니라’ ‘주’라는 말은 주인이라는 말이에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닌, 이제부터는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신다는 얘기에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자가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이제부터 예수님입니다.’ 이것은 일회적인 고백이 아니고 우리의 인생 순간순간마다 우리가 결단하고 그리고 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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