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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러므로 서로 용납하십시오 (엡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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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서로 용납하십시오 (엡 4:1-3)

: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정원 가꾸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정원에는 잘 다듬어진 정원수가 가득했습니다. 그는 그의 꽃과 나무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잘 정돈된 정원에 민들레 씨앗이 떨어져 피어났습니다. 그는 그 민들레를 뽑아버렸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민들레 씨앗은 담장을 넘어왔습니다. 그의 정원에는 계속해서 민들레가 피어났습니다. 

그는 잡초 제거 전문가를 불러 민들레를 제거하려 했습니다. 온갖 약을 뿌렸습니다. 그래도 민들레는 계속해서 피어났습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하다 지친 이 사람은 아주 저명한 전문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 전문가는 이 사람이 이미 모든 방법을 다 사용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민들레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세요.”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이것이 바로 용납입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세 가지의 권면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겸손과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입니다. 겸손과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그러므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해도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그러므로 이렇게 살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제, 그 네 번째 모습입니다.  

IV. 용납

다시 2절 말씀입니다.
: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 부르심에 함당하게 살아가야 할 가장 기초적인 생활의 방식은 겸손, 온유, 오래 참음 그리고 용납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용납은 네 번째 덕목이자, 겸손과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으로써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겸손과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으로 통하여 비로소 용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경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여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겸손하고 온유하고 오래 참아야만 용납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용납은 어려운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그러므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늘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까!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하늘에 속한 사람의 모습을 이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용납이 무엇인지를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함께 받도록 하겠습니다. 용납이란 무엇입니까?

2절 세 번째 구절입니다.
: 2c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여기에서 ‘용납[ajnevxomai/아네코마이]’은 본래 ‘태연하다’, ‘침착함을 잃지 않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을 참아 견디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오래 참음과도 비슷합니다. 온유와 겸손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하여 태연하다면 용서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고통에도 불구하고 태연하다면 견디는 것입니다. 놀리고 조롱하는 사람들 앞에서 태연하다는 것은 너그럽게 보아주는 것입니다.

1. 용납은 태연함입니다.

우리의 얼굴은 감정의 거울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생각은 모조리 얼굴에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기쁜 일이 있으면 얼굴에서 웃음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나쁜 일이 있으면 얼굴에서 근심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생각은 얼굴에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쉽게 기쁨과 슬픔을 드러내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의 가벼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더욱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좋고 싫음을 얼굴에 금방 나타내는 것은 실례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전에 세상을 떠난 스티브 잡스를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애플의 창업자입니다. 그의 사업적 명성은 익히 세상에 알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씁쓸함을 더해 줍니다. 인간적으로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1955년, 그는 태어나자마자 다른 가정에 입양되었습니다. 그리고 50년이 지난 뒤에야 아버지도 아들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잡스는 자신의 전기 작가에게 아버지를 만나지 않은 이유를 “뭔가 요구하거나 언론에 알릴까봐 그랬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친아들을 만나 차 한 잔을 나누는 기쁨을 원하였지만 아들은 아버지가 무엇인가를 요구할 까봐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인간적인 너그러움이 없었습니다.

잡스의 독설과 괴팍함은 세계적이었습니다. “뭐가 먹히는지 놀라운 본능으로 포착해내는” 능력을 가졌지만, “근본적으로 이상하고 인격에 결함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최대 경쟁자였던 빌 게이츠의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감정을 자제할 수 있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조차도 태연함을 잃지 않는 것이 아름다운 일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쉽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존경받을 일이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태연함을 잃지 않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용납하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누구에게로 가야 합니까?
마태복음 17장 17절 말씀입니다.

(마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하지만 여기에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삼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세상을 떠나 하늘로 다시 돌아가셔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나 더 함께 있어야 하는지, 얼마나 더 참아야 하는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 참으셨습니다. 그들의 어리석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과 어리석음을 참으셨습니다. 

2. 용납은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이 때, 산 아래에서는 한 아버지가 병든 아들을 고쳐 달라며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고쳐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그 아버지는 예수님께 달려와 꿇어 엎드려 자신의 아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간절히 요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보셨습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우셨습니다. 그들의 믿음 없음은 예수님을 탄식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참으셨다는 말이 바로 용납이라는 말입니다.

용납은 아무런 감정도 가지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없는 제자들을 보면서도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형편없는 점수를 맞아 온 자식의 성적표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자식에게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잘못을 하고도 뉘우칠 줄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슬픈 일을 보면 슬프고 안타까운 일을 보면 안타까워야 합니다. 이것이 뜨거운 피가 돌고 있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용납하다는 것은 죄에 대한 태도가 아니라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랑 없이는 결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것이 용납입니다. 흔한 이야기로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지만 죄가 미우면 사람조차 미워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의 잘못을 꾸짖으시면 서도 그 사람은 끌어 안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 배우는 용납입니다. 

예수님께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용납이라는 말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용납은 무엇에 대한 태도일까요?

창세기 4장 6절 말씀입니다.
(창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여기에서 우리는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의 비극을 봅니다. 가인은 탯줄을 자르고 태어난 최초의 인간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첫 번째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는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동생을 죽인 형입니다. 그것도 예배 때문에 사람을 죽였습니다.

가인과 아벨 두 형제가 각각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동생 아벨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셨는데 형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가인은 화가 났습니다. 예배를 받으시고 받지 않으심은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결정에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의 결정이 자신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에 태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창 4:6)고 물으셨습니다. 그에게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4:7b). 하지만 가인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의 예배를 둘 다 받으시든지, 모두 받지 않으셨다면 가인은 이토록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과 동생이 비교되는 것이 싫었습니다. 자신과 동생이 하나님께 다르게 받아들여졌다는데 화가 났습니다. 자신과 동생이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가인은 동생과 자신이 하나님께 다르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3. 용납은 다름에 대한 태도입니다.

살아가면서 어쩌면 이렇게도 내 생각과 다를 수가 있을까하는 것들을 우리는 자주 경험합니다. 이 다르다고 하는 것이 불편하고 불만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관대함이 필요합니다. 특히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인 교회 안에는 나와 다른 생각과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지체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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