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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말씀 (요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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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요 1:1-5)


오늘부터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가장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스스로를 칭하고 있는 사도 요한이 기록한 책입니다. 일반적으로 복음서를 정리한다면 마태복음은 예수를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로 설명하며, 누가복음은 종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누가복음은 인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이야기합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를 이야기합니다. 또한 사 복음서가 각각 독자 대상을 달리하는바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요 마가복음은 로마인을 위한 복음서이며 누가복음은 헬라인을 위한 복음서입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교회를 위한 복음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함께 부르는바 공관복음서와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말씀의 책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행적보다는 말씀 위주로 기록되어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 누가복음에는 다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탄생 기록이나, 세례 받으시는 일과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그리고 승천하신 일 등이 요한복음에는 없습니다. 

마가복음이 주로 예수님의 행적을 많이 기록했다면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행동보다는 제자들을 가르치신 교훈이나 설교가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둘째, 예루살렘 중심 사역입니다. 공관복음의 예수님 사역은 주로 갈릴리지방이지만 요한은 유대 예루살렘 사역을 주로 다루었습니다. 셋째, 유월절 사건을 많이 다룹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유월절이 한번 정도씩 언급됩니다. 그러나 요한은 주님의 공생애에 맞이한 유월절을 다 언급했습니다. 넷째, 태초의 근원부터 기록했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부터 기록하고, 마가는 예수님 세례 받으심부터 기록하지만 요한은 태초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신구약 성경이 다 없어질지라도 로마서와 요한복음만 있으면 기독교 진리를 충분히 보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은 또 ‘독수리 복음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상징적으로 나타난 네 가지 생물, 즉 네 영물들이 나오는데, 첫째 모습은 사자와 같고, 둘째 모습은 송아지 같고, 셋째 모습은 사람 같고, 넷째 모습은 모양이 독수리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 네 생물들의 특성과 복음서의 특성들 이 서로 비슷하다고 해서 네 생물을 4 복음서에 비유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은 사자복음, 마가복음은 송아지 복음, 누가복음은 사람 복음, 요한복음은 독수리 복음이라고 각각 별명을 붙였습니다.    

마태복음을 ‘사자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자는 동물들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왕권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강조함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또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을 강조하고 있는 복음서가 마태복음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사자복음’이라고 합니다. 또 마가복음은 ‘송아지 복음’, 혹은 ‘소 복음’이라고 하는데,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사역이 아주 능력 있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권세 있는 예수님, 말씀보다는 행동이 많으신 예수님으로 소개하고 있는 복음서가 마가복음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송아지 복음’ 혹은 ‘소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인자 복음’ 또는 ‘사람 복음’이라는 별명이 붙어있습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가 의사였기 때문에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예수님의 이야기와 특히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 관한 예수님의 관심이 많이 나타나 있는 복음서가 누가복음입니다. 어린아이들을 사랑하시며, 사회적 약자들인 과부들과 장애자들을 돌보아주시고,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님을 기록한 성경이 누가복음서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을 ‘독수리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독수리는 높이 나는 새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구약 이사야 39장에도 보면 하나님 안에서의 능력 있는 생활을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독수리는 높은 하늘을 나는데,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높은 곳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입장에서 기록한 복음서가 요한복음이라는 말입니다. 

특히 요한복음은 그 기록 목적이 뚜렷하게 나타난 복음서입니다. 요한복음 20: 30~31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그리고 둘째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앞으로 요한복음을 읽고 말씀을 들을 때, 언제나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는 이  기록 목적이 우리 가슴에 와서 닿아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요한복음은 첫 말씀에서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모든 이적과 행사와 모든 변론이 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증거해 내려가다가 20장에 가면, 부활의 아침에 의심 많던 도마의 입을 통해 “당신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이렇듯 요한복음은 특히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가장 중심 되는 단어가 바로 믿음 혹은 신앙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요한복음의 헬라어 원문에 자그마치 48번이나 나옵니다. 그만큼 우리의 구원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이끌고 있는 책이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요한은 제일 먼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말로 시작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태초는 창세기에 나오는 태초보다도 앞선 시점의 태초입니다. 즉 세상을 만들기 이전부터 말씀은 있었습니다. 이 말씀이라는 단어는 로고스인데 이 말의 뜻을 말씀, 근원, 근본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말은 “태초에 모든 것의 근원 되시는 분이 계셨다. 다시 말해서 창조주가 계셨다” 그런 뜻이 됩니다. “

그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는 말을 1절에 이어 2절에서 다시 한 번 반복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바로 말씀으로 되어졌음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온 세상을 지으셨는데 이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즉 생명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이 세상의 빛으로서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즉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 눈에 보이는 하나님으로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의 빛, 생명으로 인도하는 빛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말씀되신 그리스도입니다.
태초부터 있었던 것은 말씀입니다. 사람이 있기 전부터, 이 세상이 있기 전부터 있었던 것은 말씀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이 세상에 사람도 사라지고 모든 피조물이 다 사라진 후에도 존재합니다. 말씀은 사람보다도 더 오래 전에 있었습니다. 그 태초라 함은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태초에 속합니다. 태초부터 계신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말씀은 그 무엇으로도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실 때 말씀으로 지으셨습니다. 

빛아 있으라 하시니 빛이 생겨났습니다. 다른 무엇을 도구삼아 세상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말씀만으로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곧 세상을 창조하는 능력입니다. “대저 주의 말씀은 능히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을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다른 모든 것을 지으실 때 말씀으로 지으셨던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는 흙을 재료로 삼아서 지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나타나는 한 가지가 바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입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말을 주셨습니다. 말씀되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도 말이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이 능력이 됩니다. 우리 입술의 말에 권세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으신 목적대로 복을 받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릴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말의 권세를 사용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말을 조심해야 하느냐 하면 말에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습니다. 

자 보십시오. 막 11:23~24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욕설이나 저주의 말을 하지 마십시오. 

어디 그뿐입니까? 우리가 구원받는 과정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벧후 1:10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롬 1:9~10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으로 믿고 예수를 주라고 우리 입으로 시인할 때 구원이 우리 가운데 임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말은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 영원히 죄악의 형벌 가운데 멸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능력이 우리 입술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그리고 이 말의 권세는 곧 이렇듯 죽은 자로 살리는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여 항상 믿음의 말을 우리의 고백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곧 말씀이시기에 우리가 주님만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우리의 마음을 말씀으로 채우고 우리의 입술을 항상 주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입술의 고백이, 아니 나도 모르게 하는 말들이 어떤 말들입니까? 말씀되신 그리스도가 말씀하는 것 같은 말을 합니까? 아니면 나 스스로나 나와 함께 하는 자들을 죽음의 구렁텅이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까? 

이 시간 다시 한 번 말씀의 권세를 기억하여 우리 입술로부터 하나님의 역사를 막는 불신앙의 말, 불신의 말, 저주의 말, 희롱의 말, 욕설이나 상소리 그리고 믿음 없는 말은 다 사라지고 오직 은혜가 넘치는 감사와 찬양이 가득한 말, 칭찬과 격려가 넘치는 그런 말 상대방을 세워주고 죽은 마음도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그런 예쁜 말, 날마다 새 힘을 더하여 주는 축복의 말로 서로를 세워나가는 말씀되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말씀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만드실 때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생명은 다른 피조물에게 준 생명과는 다른 생명입니다. 다른 피조물에게도 생명을 주었지만 다른 피조물에게 준 생명은 영원하지 않은 생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만큼은 영원한 생명을 주었습니다.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사람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은 그 생명이 영원하질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순환의 법칙을 따라 피고 지는 일만 계속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 피고 지는 일을 계속하는 존재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생령으로 만들었습니다. 다만 사람은 하나님의 명하심에 대하여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영벌에 이르게도 하시고 영생에 이르게도 하실 뿐입니다. 

생명에 대한 이런 정하심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이렇게 정하실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피조물 각각에게 생명의 차이를 둘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정하신 명령에 따라 지금도 피고 지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정하신 명령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받아들이지 아니할 수도 있게 하였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자와 받아들이지 아니한 자들에게는 각각의 생명을 부여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자는 그 명하심을 따라 영생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하심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는 싫건 좋건 관계없이 영벌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런 일은 이미 에덴동산에서부터 계획되어진 일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셨는데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명하셨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행하게 하였지만 다만 하나님의 명령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한에서만 마음대로 행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행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림 받고 지키면서 마음대로 행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림 받거나 지키지도 아니하면서 마음대로 행하는 것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게 하였습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고 지키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은 사람에게도 에덴동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고 지키게 하였습니다. 오직 사람에게만 이 세상을 다스리고 지킬 수 있는 권세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의 그 전제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하나님이 일러주신 말씀으로 다스림 받고 지키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일러주신 말씀으로 다스림 받지 않고 그 말씀 지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게 하십니다. 이런 자는 겉으로 볼 때에는 살아 있으나 하나님이 볼 때에는 죽은 자일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생명이 있게 하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도 생명나무의 과실이 있게 하였듯이 오직 예수님에게만 생명이 있게 하였습니다. 다른 것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다른 것은 순환의 법칙에 따라 피고 지는 일을 반복하거나 모든 사람조차 생명을 이미 잃어버린 동일한 죄인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제외하고 생명에 대하여 이런저런 말을 하는 자들은 모두 거짓말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 아들 예수님에게만 생명을 주었습니다. 

다른 피조물이나 다른 사람에게는 이런 생명을 주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 안에 생명이 있게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없으면 생명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가 없는 자는 육체가 아무리 강건할지라도 생명이 없는 자입니다. 육체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별의 별 일을 다 이루고 있는 자라 할지라도 예수가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는 자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이런 정하심을 무시하고 생명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는 이후에 생명 없는 자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가를 하나님이 직접 보이실 것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은 말씀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습니다.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창조에 동참하셨습니다. 그에게 있는 생명이란 다름 아닌 말씀입니다. 그 안에 있는 말씀이 생명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미 생명을 잃어버린 자는 다른 무엇보다도 말씀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말씀 아닌 다른 것으로 사람을 회복시키려 합니다. 

사람의 말이나 세상의 유전이나 철학이나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사람을 회복시키려 합니다. 이런 회복은 아무리 회복시킬지라도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멸망에 점점 가까이 가게 할 뿐입니다. 오직 죄를 범하기 전의 에덴동산의 상태로 회복하려면 말씀밖에 없습니다. 말씀만이 사람을 회복시킬 수 있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요10:10은 말씀합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이미 약속의 말씀을 따라 예수를 믿어 예수 안에서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걸음 더 나가가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로 하여금 말씀 안에서 즉 예수 안에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회복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일러주신 말씀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 얻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 생명 곧 말씀이 믿는 그 사람에게서 왕 노릇할 때에 그 사람은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요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순종의 끝은 사랑입니다. 

요일 4:7~8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따라 순종하되 서로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심으로 세상에서 빛 된 직임을 다하는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과 베티는 깊은 산골에서 큰 농장의 꿈을 키우며 살아가는 젊고 용감한 부부였습니다. 요한은 일주일에 한 번씩 읍내에 나가 장을 봐왔는데 거리가 너무 멀어서 하룻밤 묵고야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 아내는 아들과 딸을 데리고 꼬박 이틀을 남편 없이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을 보러 떠나는 요한은 밀린 일 때문에 하루, 이틀 더 걸릴 거라고 말했습니다. 집에 남은 베티가 장작을 패려고 손을 내미는 순간 장작더미 속에 있던 독사가 베티의 다리를 물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베티는 곁에 있는 도끼를 들어 독사를 죽였으나 이미 혈관에 독이 스며들어 오래지 않아 죽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제 죽게 되지만 남편이 돌아오려면 이삼일이나 걸리는데, 두 아이는 어떻게 될까? 도와줄 가까운 이웃도 없지 않은가? 아들 쟈니는 한 살도 안 되었고 딸 키티는 겨우 네 살이 아닌가?’ 여기에 생각이 이르자, 몸속에 독이 더 퍼지기 전에 아이들을 위해 최후의 할 일을 해야 했습니다. ‘우선 먹을 것을 준비해 놓아야지, 빨리 빵도 굽고 우유는 손닿는 데 놓아두자. 그러면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 아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겠지?’ 그녀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빵을 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계속 기도하면서 딸에게 “키티야, 이제 곧 엄마는 깊은 잠에 빠지게 될 텐데. 너는 네 동생 쟈니를 잘 돌봐 주어야 돼. 빵도 먹이고 우유도 먹여라” 하고 여러 번 반복해서 일렀습니다.

정오의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뜨거운 아궁이 앞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자녀를 위해 애쓰는 베티의 온몸에서는 물 흐르듯 땀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줄줄이 흘러내린 그 많은 땀 덕분에 그녀의 혈관에서 독이 씻겨 나와 그녀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게 될 줄은 베티 자신도 알지 못했습니다. 정신없이 준비하는 동안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자신이 아직 살아있음에 비로소 깜짝 놀라게 됩니다. 어린 자녀만이라도 기어코 살리려 했던 뜨거운 사랑이 모두의 생명을 살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분이 또한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단지 말씀을 따라 순종함으로 믿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약속을 따라 순종함으로, 그리고 서로 사랑함으로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믿음은 결국 순종이며 순종의 끝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순종하며 사랑하는 귀한 삶을 사심으로 약속을 따라 주어진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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