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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긴과 보아스 (왕상 7: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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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왕상 7:13-22) 
 
 
❚교회를 교회 되게!

오늘은 종교개혁 494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의 아버지인 마르틴 루터와 장로교의 아버지인 존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종교개혁을 일으켰다가 모진 박해도 받고, 때로는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화형까지 당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이 이런 희생까지 당한 것일까요? 그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진정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바른 신앙으로 지켜야 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중세시대 로마가톨릭(천주교)의 교권주의 때문에 겉으로 볼 때는 교회의 권위가 점점 더 막강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교황의 권위가 하늘을 찔러서 교황이 한 나라의 황제를 마음대로 폐위하기도 했습니다. 

교회의 권위가 세속의 권위를 넘어서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이 된 것입니다. 교회가 많은 토지와 재산을 소유하고 세상의 모든 법을 뛰어넘어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때 오히려 교회의 참된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황의 권위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동일하다고 여기고,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기보다 화려한 건물을 짓고 치장하여 세상에 과시하는 데 더 힘쓰며 막대한 돈을 들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으리으리한 성당을 짓다가 돈이 모자라서 면죄부를 팔기도 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시대에,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권력이 점점 더 막강해지고, 교회는 더욱 크고 화려해 지지만 반대로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참된 권위를 잃고 하나님의 말씀 또한 권위를 잃어감을 안타까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어떤 사회운동이나 혁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참된 믿음과 말씀중심의 교회로 만들기 위한 개혁이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교회가 힘이 있다고 교회다운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화려하고 커 보인다고 해서 교회다운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교회다워야 교회입니다. 한마디로 종교개혁은 교회를 교회 되게 하기 위한 개혁운동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자들이 피 흘려 지키려 한 교회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 하는데 특별히 오늘은 교회를 세우는 두 개의 기둥, 야긴과 보아스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솔로몬 임금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아버지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기를 간절히 원해서 모든 재료를 준비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셔서 결국 지을 수 없었고 이제 그 아들인 솔로몬 대에 이르러 드디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역대하는 이렇게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을 기록하는 가운데 좀 특이한 시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 앞에 세워진 두 개의 기둥입니다.

❚성전의 기둥

이 두 개의 기둥은 15절에 나와 있는 대로 놋으로 만든 기둥입니다. ‘놋’은 당시 아주 귀한 금속이었습니다. 아주 많은 비용을 들여 이 두 기둥을 놋으로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 두 기둥이 그만큼 성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뜻이 됩니다.

계속해서 본문은 이 두 개의 놋 기둥은 어떤 크기로 만들었는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높이가 각각 18규빗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길이로 환산하면 약 8.1미터 정도가 됩니다. 또 너비는 12규빗, 약 5.4미터 정도 됩니다. 꽤 큰 기둥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16절에 보면 놋을 부어서 기둥 머리를 만들어 기둥 꼭대기에 두었다고 합니다. 

이 기둥 머리의 높이는 5규빗, 즉 2.25미터 정도 됩니다. 또 기둥 머리에는 바둑판 모양으로 얽은 그물과 사슬 모양으로 땋은 것으로 장식했는데 각각 일곱 개씩 장식물을 달았습니다. 또 두 줄 석류(석류 모양의 장식)를 그물 위에 둘러 만들었습니다. 19절을 봅니다. 주랑 기둥 꼭대기에 있는 머리의 네 규빗은 백합화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둥글게 생긴 머리에는 석류 이백 개를 줄지어 달았습니다. 이런 설명을 보면 이 두 기둥이 상당히 화려하게 장식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1절에 비로서 이 두 놋 기둥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성전 주랑(기둥으로 이어진 벽이 없는 복도) 앞, 오늘날로 치면 교회 현관 입구 앞에 이 두 놋 기둥을 세웠는데 오른쪽 기둥의 이름은 ‘야긴’이라고 하고, 왼쪽 기둥의 이름은 ‘보아스’라 불렀습니다. 이 야긴과 보아스라는 두 개의 기둥에는 아주 귀중한 영적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부터 그 교훈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두 기둥에서 얻을 수 있는 첫 번째 교훈이 무엇이냐? 성전의, 교회의 참된 기둥이 누구인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기둥의 이름을 보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도 ‘야긴’과 ‘보아스’라는 낱말에 번호가 1)번 2)번 붙어 있을 것입니다. 성경 맨 아래 여백에 보면 이 1)번과 2)번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지요? 1)번 ‘야긴’의 뜻이 무엇이라고 나와 있습니까? “저가 세우리라”입니다. 교회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교회를 세우고 지탱해 나가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성도들의 삶도 오직 하나님이 세워주시고 붙들어 주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2)번 ‘보아스’는 무슨 뜻이라고 나와 있습니까? “그에게 능력이 있다”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워져야 하며 성도들 또한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때로 험한 세상에서 넘어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다시 세워주십니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 37:24)

그러므로 교회를 세우시고 능력으로 붙드시는 분도 하나님, 우리 성도들의 삶을 세우시고 능력으로 붙들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교회의 기둥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도, 담임목사인 저도, 장로님들도 아닙니다. 재정도 건물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교회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이 기둥을 의지해야 함을 말씀해 줍니다. 앞서 하나님만이 성전의 기둥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둥이라는 것이 흔들리면 큰일입니다. 어떤 흔들림이 있어도, 지진이 나고 천지가 진동해도 기둥은 성전을 떡하니 받치고 있어야 합니다. 기둥이 흔들리면 온 건물이 다 무너집니다. 기둥이 튼튼하여 흔들리지 않으면 온 건물이 요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전의 기둥으로 떡 받치고 계시면 어떤 풍파나 시험이 와도 교회는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그 기둥에 의지하면 삶에 어떤 문제가 생겨도 요동하지 않고 이겨내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맙시다. 사람도 의지하지 맙시다. 세상도 변하고 사람도 변합니다. 세상도 흔들리고 사람은 조금만 무슨 일이 생기면 요동칩니다. 보세요. 서울 시장 한 사람 바뀌니까 서울만 요동칩니까? 온 나라가 요동칩니다. 마치 세상이 다 뒤집어지기라도 하듯 난리법석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이나 세상의 것을 기둥 삼고 살면 우리도 언젠가 흔들리고 무너지는 법입니다. 기둥은 흔들리지 말아야지요. 그래야 우리도 안 무너지지요. 

하나님이 교회의 기둥으로 떡 버티고 계셔야 교회가 어떤 일에도 안 흔들립니다. 사람 의지하고 다른 것 의지하니까 조금만 시험이 오고 문제 생기면 교회가 흔들거리고 무너지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흔들리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으시는 하나님, 세상 모든 것은 다 변해도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분만 기둥으로 붙잡고 사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셋째, 우리도 성전의 기둥이 되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물론 교회의 기둥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3:12입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 말씀은 주님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어떤 시련과 고난에도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견뎌내어 승리한 성도들은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믿음으로 끝까지 승리하면 성전의 기둥이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야긴과 보아스 두 기둥 머리에 백합화 장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두 기둥에 붙은 석류 이백 개는 성도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모든 성도들은 성전의 기둥을 이루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계 3:8)

비록 우리의 능력이 작을 지라도, ‘보아스’의 뜻의 무엇입니까? “그에게 능력이 있다.” 하나님께 능력이 있는 줄 믿고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믿음을 끝까지 지켜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우리에게 면류관을 주시고,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직 그의 능력으로!

마지막으로 ‘야긴과 보아스’라는 성전의 두 놋 기둥에서 깨닫게 되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바로 이 야긴과 보아스를 만든 사람 이야기입니다. 본문 13절과 14절을 함께 읽을까요?

13 솔로몬 왕이 사람을 보내어 히람을 두로에서 데려오니 14 그는 납달리 지파 과부의 아들이요 그의 아버지는 두로 사람이니 놋쇠 대장장이라 이 히람은 모든 놋 일에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구비한 자이더니 솔로몬 왕에게 와서 그 모든 공사를 하니라

열왕기는 일부러 이 야긴과 보아스를 만든 히람이라는 사람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주보에 나와 있는 역대하 본문도 똑같이 야긴과 보아스에 대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지만 히람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있어 일부러 본문을 열왕기상으로 바꾼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열왕기는 역대기가 다루지 않은 내용, 즉 히람이라는 기술자에 대해 일부러 아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는 것인데 거기에는 분명히 중요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니 솔로몬 왕은 성전을 건축하면서 일부러 두로에 사람을 보내 히람이라는 기술자를 스카웃하고 있습니다. 히람은 놋쇠 대장장이었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지으면서 히람을 특별 스카웃한 것을 보면 그는 아마 이 분야에서는 당대 최고의 기술자였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14절에 그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는 납달리 지파 과부의 아들이요 아버지는 두로 사람입니다. 납달리 지파라면 어머니는 이스라엘 사람이고 아버지는 두로 이방인인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 역시 놋쇠 대장장이였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놋쇠를 다루는 기술자가 된 것이지요. 그런데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이 히람은 모든 놋 일에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구비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놋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당대 최고의 기술자, 즉 명장(明匠) 소리를 듣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바로 히람에 대한 명성을 듣고 일부러 이방인의 피가 섞인 히람을 불러 하나님의 성전에 쓰일 모든 놋으로 만든 기구들을 만들게 했고 그 중에 대표적인 작품이 야긴과 보아스라는 두 기둥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솔로몬 성전에 들어갈 때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성전 주랑 앞에 떡하니 세워진 야긴과 보아스 두 놋 기둥이겠지요? 그러면 이 두 기둥이 누구의 작품입니까? 바로 히람의 작품이지요. 그러므로 히람의 작품은 거룩하고 웅대한 성전을 대표하는 명 작품이 된 것입니다.

히람은 이방인인 데다가 과부의 아들입니다. 대장장이로 남들 보기에 화려하지도 좋아보이지도 않는,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대장장이나 하다가 끝날 만도 한 별 볼일 없는 인물입니다. 이처럼 타고난 조건은 별로 안 좋지만, 환경도 안 좋았지만 그는 적어도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기술을 준비한 사람이었기에 솔로몬 임금의 특별 스카웃을 받아 당대 최고의 기술자로서 성전의 대표적인 두 기둥을 작품으로 남긴 사람으로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혹시 지금까지 내 조건이나 환경이 남들보다 안 좋다고 불평하지 않습니까? 집안도 안 좋고, 남들처럼 그럴듯한 부모를 만난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 직업이 안 좋다고 불평불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모든 삶이 왜 이리 남들보다 떨어지고 못나 보이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히람을 보십시오. 누가 뭐래도 내 분야에서 최고로 인정받도록 준비된 사람이 되니까 하나님께 스카웃 되고, 특별 부름 받아 귀하게 쓰임 받지 않습니까?

야긴과 보아스가 주는 마지막 교훈이 이것입니다. 우리의 환경이나 조건을 탓하지 말고, 내 직업이나 현실을 비관하지 말고 히람처럼 내 분야에서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구비한 사람이 되십시오. 지혜와 총명과 재능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나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준비해야겠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이 히람처럼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주셔서 언제든지 부름 받아 쓰임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 반드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습니다. 

“저는 가방끈이 짧아서요, 저는 건강이 안 좋아서요, 저는 능력이 부족해서요.” 이런 핑계를 대기 시작하면 더 이상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내게 없는 것만 찾기 시작하면 절망뿐입니다. 지금 내게 있는 것, 하나님께 받은 것을 먼저 찾으십시오. 그리고 누가 뭐래든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십시오. 직업에서도, 교회에서 봉사하는 분야에서도, 그러면 하나님이 들어 귀하게 쓰십니다. 지금 내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사용하십니다.

‘야긴’의 뜻이 뭐라고 했지요? 꼭 기억하세요. “저가 세우리라!”입니다. ‘보아스’의 뜻은? “그에게 능력이 있다!” 히람이 귀하게 쓰임 받은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이 세우시면” 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능력도 없고 조건도 안 좋지만 “오직 능력은 하나님께”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시면 우리는 야긴과 보아스처럼 교회의 기둥으로 쓰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자주 기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성전의 기둥같이 쓰임 받는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 성도 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세워주시기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성전의 기둥처럼 귀히 써주시고 세상의 기둥으로 세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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