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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2) (사 49: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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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2) (사 49:1-26)


이사야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는 42장에 이어 49장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42장에 나타난 종의 노래는 하나님께서 직접 부르신 노래이지만 49장에 기록된 두 번째 종의 노래는 메시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종 자신이 부른 노래입니다.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초반부는 종의 신분과 메시야에 관한 내용입니다. 중반부는 종의 사역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행복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Ⅰ. 하나님의 종 메시야의 신분입니다.

1) 본질적으로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본문 49장 1절에 『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라고 했습니다. 
여기 『 섬 』들이라는 말은 "모든 이방나라"를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 나를 들으라 귀를 기울이라 』고 명령한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절대하신 하나님을 불신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참된 자입니다.
요한복음 3장 33절에 『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고 했습니다.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다는 말은 누가복음 1장 31절에 『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고 했습니다. 

2) 말씀으로 역사하는 존재입니다.
본문 49장 2절에 『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본래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나타낼 때 찌르는 검에다 비유했습니다.
전도서 12장 11절에 『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고… 』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성경을 인용해서 그리스도를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6절에 『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21절에 『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말씀에 의하여 듣는 자들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마광(磨光-맑고 광택나게 닦아서 매우 예리하고 날카롭게 함)한 검과 같다고 했습니다.

3)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본문 49장 3절에 『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 『 종 』은 "그리스도 메시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자라는 말입니다(요 1:14).
메시야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일을 두고 예수님은 자신의 양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을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8절에 『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1절에 『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4절에 『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요 6:29).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우리의 영광은 예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주 안에서 하나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2절에 『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24절에 『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Ⅱ.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1)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존귀한 자입니다.
본문 49장 5절에 『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다시 야곱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자기에게로 모이게 하시려고 나를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자기 종을 삼으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확신 가운데서 나온 말입니다. 마치 『 나는 우리 부모님께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배다 』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빛이라고 했습니다(요 9:5).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과 나중입니다(계 1:17). 

그리스도는 대속의 사명 때문에 낮아지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 2:5-11).

하나님은 친히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세우시고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행 4:12).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습니다(요 5:22). 이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과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는 자라고 했습니다(요 5:23).

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베풀 이방의 빛입니다.
본문 49장 6절에 『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고 했습니다. 
여기 『 야곱의 지파를 일으킨다 』는 말은 이스라엘(유대인들)의 구원을 말합니다. 이것은 오히려 경(輕)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세운 목적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로마서 11장 25절에 『 …이방인의 충만한 수… 』라고 했습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는 이방인 중에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복음을 받아 다 믿게 되는 시기입니다(행 13:48).

그 시기는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 세상에 끝이 오는 시기입니다(마 24:14). 
로마서 11장 26절에 『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고 했습니다. 
여기 『 온 이스라엘 』이란 곧 유대인의 충만한 수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온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됩니다. 
이 수가 구원 얻을 총 수인 십사만 사천의 상징수입니다(계 7:4).

Ⅲ.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행복입니다.

1) 구원받은 행복입니다.
본문 49장 9절에 『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고 했습니다. 
여기 『 내가 』는 그리스도 자신을 말합니다. 이 말씀의 역사적 의미는 바벨론에 사로잡혀 있는 유대인들을 해방시키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죄로 인하여 영적 포로가 된 자들을 구원한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누가복음 4장 18-19절에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어두움에서 나와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에 『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에 『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5절에 『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라고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기쁨의 원인은 구원받은 데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33장 29절에 『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0장 20절에 『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2) 풍성한 은혜의 행복입니다.
본문 49장 9절에 『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자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오는 길 가운데도 먹을 것이 예비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 『 길 』이란 각자의 생업(일)을 말합니다. "길에서 먹는다"는 말은 생명의 양식을 먹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면 이 세상에서도 절대로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여기 『 자산 』은 풀 없는 붉은 산을 말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낙심하고 절망한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진실한 영적 생활 속에는 반드시 풍성한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 『 자산 』은 "높은 산"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은혜는 더욱 풍성한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반대로 생각하는데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깊이 빠지거나 교회생활에 철저하면 무슨 손해라도 보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막에서도 오아시스를 예비해 두신다고 했습니다. 본래 사막에는 꽃이 없는 곳입니다.

본문 49장 10절에 『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 』고 했습니다.
산에도 길을 낸다고 했습니다. 본래 산에는 길이 없는 곳입니다.
본문 49장 11절에 『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역설의 원리입니다.

3) 고난당하는 자들이 긍휼함을 받는 행복입니다.
본문 49장 13절에 『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임이니라 』고 했습니다.
"고난당한 자"는 바벨론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곧 이 말씀은 모든 죄악에 포로된 인생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죄에 사로잡혀 있는 인생들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구원하신다는 말입니다.

4) 끝까지 잊지 아니하시는 행복입니다.
본문 49장 15절에 『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에 비유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부모와 비슷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생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다른 비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부모의 사랑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 9-11절에 『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9절에 『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이사야 55장 8-9절에 『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고 했습니다. 

5) 내가 주의 손바닥에 새겨진 행복입니다. 
본문 49장 16절에 『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손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잡혀 간 것도 알고 보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 이름을 그의 손바닥에 새기시고 못 박힌 손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창조의 손과 전능의 손바닥에 우리를 새기시고 한 순간도 놓지 아니하신다는 뜻입니다. 

6) 우리의 성벽이 항상 주 앞에 있는 행복입니다. 
본문 49장 16절에 『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 『 성벽 』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잡혀 갈 때 그들의 무너진 성벽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택한 백성의 성벽을 항상 눈앞에 둔다는 말은 폐허가 된 성벽을 때가 되면 다시 세울 것을 항상 생각하신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요 13:1). 황폐케 하던 자들로 떠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신앙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나 사람들의 조건을 따라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의하여 모든 것을 진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삶으로 맹세한다고 했습니다(사 49:18).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맹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생들에게 믿는 마음을 더욱 고조시키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데 대한 기쁨이 없는 자는 성도로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갈수록 힘들고 어렵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풍성합니다. 신앙생활이 어렵고 힘들기만 한다면 누가 주를 따르겠습니까. 해산하는 여인이 죽음의 고통 뒤에 새 생명이 없다면 누가 다시 해산하겠습니까.

주님은 사막에서도 오아시스를 내고 산에도 길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의 부모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전능자의 손바닥에 아예 나를 새겼습니다. 인생들이 살아가면서 실패한 것들과 후회스러운 것들과 무너진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암울한 현장이 항상 주님 앞에 있어서 때가 되면 회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가 아니면 우리의 후손에서라도 반드시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데 조금도 양보하지 아니합니다. 입시시험이나 자격시험에 구두시험과 면접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에 따라 모든 일을 집행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 앞에 우리의 신·망·애가 헛되지 않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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