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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오직 믿음으로! (롬 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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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믿음으로! (롬 1:16-17)
 
교회가 위기를 맞았습니다

지난 10월 26일 서울시장 선거의 결과가 발표되고 다음날 아침 신문의 제호들의 내용이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20대, 30대, 40대의 분노·반란·선거혁명이다.” 
“세대 간의 사고의 차이가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젊은 세대들이 마음속에 갖고 있었던 불안과 좌절의 표출이다.” 
“정치적인 기득권층에 대한 반발과 도전이 나타난 것이다.” 

자기 갱신이 없고 변화가 없는 정치세력들과 정치적인 싸움에는 이제 신물이 났다는 젊은 세대들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글을 읽어보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교회였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위기의 소리가 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오히려 교회가 정치적인 현장보다 더 위험한 상태에 놓여있는 것은 아닐까? 20대, 30대가 세상에는 큰 소리라도 치지만, 교회에서는 큰 소리 치지 않고 그냥 조용히 교회를 떠나는 것은 아닐까? 기성세대들끼리 잘 해보시고 우리는 조용히 물러가겠다고 하면서 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교회 안에 있는 청년들마저 답답하다고 하면서 아파하고 신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젊은이들의 신앙의 장이 마음껏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교회의 책임이 아닐까? 어쩌면 지금도 숨죽이고 교회가 변화되기를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을 저 자신에게 해보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위기가 무엇일까요? 수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외면하고 있다는 통계가 나오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젊은이들이 바라볼 꿈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매력적인 모습으로 젊은이들에게 어필하고 있지 못합니다. 교회 안에서 참된 위로와 능력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신앙인이 됐다는 것이 자랑스럽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교회에 다니는 성도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떳떳하게 말할 수 없는 위치까지 와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잘못된 것에 대하여 저항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오늘은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0일에 비텐베르크 교회에 95개 조항으로 된 반박문을 붙이면서 종교개혁을 시작한 이래로 494주년을 맞이하는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이렇게 질문하고 저항하고 도전하는 세력을 향해서 가톨릭 교인들은 개신교를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불렀습니다. 저항하는 사람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개신교인들이 이것을 비난과 조롱의 소리로 받아들였지만, 나중에는 이것을 자부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protest하는 사람이다. 악에 대해서 protest하고, 거짓에 대해서 protest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protest하는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오늘날은 어떨까요? 오늘날 젊은 사람들과 생각이 깊은 사람들이 교회와 이 시대의 문제점,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 질문하고 도전하고 저항하면 그것을 받아드릴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렇다. 우리 교회에 이런 문제가 있다. 우리가 이렇게 변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하며 그들을 환영할까요? 아니면 “왜 시끄럽게 하느냐? 왜 어렵게 하느냐? 왜 자꾸 갈등을 조장하느냐? 왜 문제를 자꾸 제기하느냐?”면서 그들을 억누르려고 하지는 않을까요?

교회와 신앙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끊임없이 protest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 거짓된 것, 인습화된 것, 교리화에 멈춰서는 것, 자기보호막을 휘두르면서 기득권층에 머무는 모든 것들을 향해서 저항하고 도전하고 질문하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의 생생한 역동적 힘의 능력이 사라지고 맙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세 가지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현상적으로 교회성장이 정체되고 있습니다. 아니, 위축되고 줄어들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젊은이들이 교회를 기피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세 번째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위기를 인식하고는 있지만 실감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마치 타이타닉호가 항해 중에 거대한 빙산에 부딪힌 것과 같습니다. 잠깐 흔들렸다는 것은 깨닫지만 곧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먹고 마시고 잔치를 벌이면서 아직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던 타이타닉 호와 비슷한 모습이 우리들에게는 없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이와 함께 신앙의 세 가지 위기가 우리들에게 닥쳐오고 있습니다. 첫째로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형식만 붙잡고 있습니다. 여러분,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오히려 세속성을 향해 끊임없이 닮아가고 있고, 세속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교회가 갖고 있었던 가치관을 하나하나 그들의 것으로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었던 소중한 언어들, “사랑, 자유, 진리, 신뢰, 희망, 봉사”와 같은 것들은 세상의 기업들, NGO, 시민단체들이 받아들이고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오히려 본질을 잃어버리고 형식만 남아있습니다. 두 번째로 신앙은 거룩한 것인데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서지 못하고 거룩함이 결여된 무늬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이것입니다. 신앙의 중요한 핵심인 ‘오직 믿음’이라는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명백한 믿음의 역사가 교리와 공로주의 등을 통해서 복잡화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앙은 교리주의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갖고 있는 가치관을 자기의 것으로 삼아 그것을 확대해가고 있는 대표하는 인물, 대표적인 기업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스티브잡스, 그리고 그가 세운 Apple회사입니다. 

스티브잡스는 인생을 살면서 몇 가지의 전환기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그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심리적인 문제로 그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에게 괴팍하게 대했습니다. 때로는 모질었습니다. 때로는 잔인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줌으로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월터 아이작슨이 쓴 스티브잡스의 이야기를 보면 친구들과 인터뷰한 내용이 나옵니다. 친구들은 스티브잡스의 심리적인 상태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만들든 완전히 통제하려드는 그의 집착은 출생 직후 버려졌다는 사실과 그의 성격에서 직접적으로 비롯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주위환경을 조정하고 싶어 했고, 자기가 개발하는 제품은 자기 자신의 확장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버림받은 것에 대한 분노를 끊임없이 해갈하려하는 모습이 있었고, 어쩌면 그의 56년의 인생 자체가 그것을 해소하려는 그의 노력이었다고 이야기해도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이것입니다. 그는 어릴 때 버림을 받았지만 다행이 양부모를 만났습니다. 양부모의 신앙은 두텁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린 잡스를 루터교 교회에 데리고 다니면서 그가 신앙생활 속으로 들어오기를 기대했었습니다. 그런데 잡스는 열세 살 때에 더 이상 교회를 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그 손을 놓게 됩니다. 그에게는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잡스가 교회에 가서 목사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만약 지금 제가 이렇게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린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옛날부터 이 시간 이 때에 내가 손가락하나를 이렇게 들어 올릴 것을 아시고 계셨나요?” 

그때 목사님이 “그렇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단다.” 라고 말했을 때 스티브잡스는 또 하나를 물었습니다. 그때 그는 라이프지(Life)라는 잡지를 들고 갔는데 거기에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의 고통스러운 모습들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목사님, 그러면 이 어린아이들의 이 모습과 이 아이들의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하나님께서는 아시겠네요?” 그랬더니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하나님도 그것을 알고 계신단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잡스는 신앙을 포기합니다. 하나님께 더 이상 예배를 드리지 않고 하나님과는 어떤 관련도 맺기 싫다고 선언하면서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됩니다. 

목사님은 교리적으로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안 가르쳐 주었을까요? 하나님의 아픔과 하나님의 슬픔, 하나님의 눈물이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설명하는 아주 중요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숙명주의의 하나님, 운명주의의 하나님으로 추락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어린 나이의 스티브 잡스는 신앙생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고난의 현장을 보시며 얼마나 아파하시고 얼마나 탄식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벽에 새긴 그림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크신 하나님이 작아지고, 작아지고, 또 작아지셔서 팔레스틴의 예수님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병든 자를 만나셔서 그들의 연약한 부분을 만져주셨고, 외로운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셨고, 이 땅에 가난하고 힘들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꿈을 심어주셨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지 못했을 때 신앙은 퇴색되고, 교리주의화되고, 바리새인화되는 경로를 밟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의 하나님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인간 때문에 아파하신다는 사실, 어미가 자식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절대 버리지 아니하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탄식을 깨닫지 못하면 그 신앙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단순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세 번째로 잡스는 창의적 단순함의 태도로 그의 제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반복해서 외우는 주문중 하나는 집중과 단순함이다. 단순함은 복잡함보다 더 어렵다. 생각을 명확히 하고 단순하게 만들려면 열심히 노력해야한다. 그러나 그럴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일단 생각을 단순하게 만들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면 산도 움직일 수 있다.” 

여러분, 성경에서 무엇으로 산이 움직여진다고 말씀합니까? 믿음이 산을 움직일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겨자씨만한 믿음 하나만 있다면 이 산을 저리로 옮기라고 해도 옮겨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단순성의 신뢰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을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저것 따지게 만들었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무엇일까요? 성령님이 생명이시고 예수님이 생명이신 생명의 믿음을 가지고 거기에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면 산도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힘과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의 인물도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거기에 집중하면서 엄청난 일들을 만들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이런 것들을 다 빼앗기고 있습니다. 이 교회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땅위에서 해야 할 일들이 무엇입니까?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 믿음의 자리에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종말론적으로 인생을 살아가십시오

잡스에게 또 하나 중요한 도전으로 다가왔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네 번째로 그는 2003년에 자기 몸에 암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췌장암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해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는 17살 때 죽음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결심을 세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17살 때에 나는 이런 글을 읽었다. ‘만약 당신이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면 언젠가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이 말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때부터 33년 동안 나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나 자신에게 묻는다. 만약 오늘이 나에게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하려고 하는 일을 하고 싶을까? 만약 아니오 라는 대답이 나온다면 다른 일을 해야 한다 라는 것을 깨달았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나에게는 인생에 있어서 큰 고비마다 가장 중요한 극복의 도구가 되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하루를 마지막처럼 살라는 이 말을 매일매일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종말론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다.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잡스는 여기에 하나님이라는 인격을 상실한 채 이것을 행해나갑니다. 그래서 완전한 기쁨, 온전한 영혼의 즐거움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그는 그 나름대로의 인간적인 노력을 해왔습니다. 2003년에 암 선고를 받고 2005년에는 스탠포드대학에서 졸업생들을 향해서 졸업연설을 하게 됩니다. 그는 그때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그것은 인생의 중대한 선택들을 도운 그 모든 도구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은 아까운 게 많다고 생각하는 덫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미 알몸입니다. 가슴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전도서 기자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신앙의 핵심적인 요소를 다른 식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로마의 장군이 전쟁에 이겨서 개선장군처럼 들어올 때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면서 장군을 칭찬했습니다. 그때 장군 뒤에 뒤따라가던 하인이 장군에게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메멘토 모리.” 이것은 라틴어로서 ‘죽음을 생각하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내가 천하를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계속 말합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세요.” 

세상의 어떤 사람이라도 죽음을 기억하면 겸손해집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종말론적 인생을 살면서 문제와 부딪칠 때는 부딪치고, 멈출 때는 멈추고, 기뻐할 때는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닐까요? 비록 잡스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속에 분노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채 인생을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삶에 무엇을 극복해야할까요? 무엇을 변화시켜야 할까요? 무엇을 개혁해야 할까요? 우리 안에 어떤 신앙을 가져야 올바른 신앙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게 주어진 이 시간이 하나님께서 주신 마지막 시간임을 알고 생명이신 예수님을 마음껏 사랑하면서 내 인생을 즐거워하며 누리는 것입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여러분, 이렇게 멋지게 사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을 부르시고 당신의 사랑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배반할 제자들, 도망갈 제자들, 비겁한 제자들을 마다하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한복음 13:1)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사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바울은 우리에게 이것을 말합니다. 오직 믿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7)

여기에 우리의 모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인 것과 세상의 모든 지혜와 자유와 능력과 사랑과 은혜와 평안이 예수님 안에 있음을 믿고 그분을 향해서 우리의 삶이 열려질 때 우리가 변화되고 공동체가 바뀝니다. 세상이 우리를 향해서 “저 믿음의 사람을 보라! 하나님의 사람을 보라!” 칭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생명을 다해 예수님을 따라가는 믿음, 그 단순하고 직접적인 믿음을 통해서 신앙의 새로운 장이 우리 모두에게 열려지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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