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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심 (마 12: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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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심 (마 12:19-20)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 12:19-20) 

I. 본문해설 

본문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어떻게 어떤 인격으로 구원사역을 하실 지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무슨 기사를 보도하다가 이 해설이 나왔는지 살펴보겠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손 마른 사람을 만났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불쌍히 여기셨기에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소하려는 의도에서 예수님께 여쭈어 보았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이 율법적으로 옳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질문하셨다. 

“너희가 만약에 안식일에 너희의 양이 웅덩이에 빠졌으면 내버려 두겠느냐? 아니면 건져 내겠느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드러내셨다. 손 마른 병자를 고쳐주는 것이 안식일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이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에 충성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없기 때문임을 예수님은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손 마른 병자를 고쳐주셨고, 하나님이 인간들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를 보여주심으로 율법에 대한 충성이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이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셨다. 그러면서 저자는 메시야에 관한 이사야 선지서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구약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응답된 것이라고 기록을 한 것이다. 

II. 성령과 그리스도의 인격 

인용되는 이사야 구절은 42장으로, 구약에서도 아주 유명한 종의 노래의 장이다. 즉, 하나님이 영적인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에 당신의 사랑하는 종을 메시야로 보내실 터인데 그가 아주 탁월한 사랑과 긍휼로 백성들을 돌보게 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그 구절은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그에게 줄 터이니”로 시작한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과 그리스도의 인격의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실제로 이 예언은 정확히 성취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먼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요단강으로 오셨다. 원래 세례는 죄 있는 사람의 죄를 깨끗이 씻는 표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받으실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몸소 세례를 받으셨다. 첫째는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받는 세례에 참여하심으로 당신 자신이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백성들과 한 형제요 한 지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더 중요한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은 이 세례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공표하고 공적으로 취임하시는 계기로 삼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세례를 받은 후에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하노라”고 하는 세례자의 선언이 들린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라고 하는 하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던 것이다. 

그리고는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임하시는 놀라운 성령 강림의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한없이 부음 바 되신 예수님이 되셨고,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의 사명을 감당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A. 다투지 않으심 

예수님께서 어떤 태도로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실 것인지에 대해 오늘 본문은 세 가지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첫째는 다투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충만한 성령으로 예수님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되 일체의 다툼 없이 그리하셨다. 그러나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정말 다툼이 없는 생애였을까? 그렇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생을 사시는 동안 마지막 십자가에 죽으시는 순간까지 대적들과 대면하셨다. 

예수님의 생애는 철저한 투쟁의 삶이었다. 이것은 영적인 전쟁이고, 영적인 다툼이었다. 바울은 “종말로 내가 너희들에게 이른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것이라”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체는 본질적으로 영적인 전투이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누구와도 다투지 않으셨지만, 영적인 면에 있어서는 일평생 치열한 전사로서의 삶을 사셨다. 

B. 들레지 않으심 

두 번째는 “들레지 않으실 것이라”고 명백히 말하고 있다. ‘들렌다’라고 하는 말은 희랍어로 ‘크라우가세이’[κραυγάζω]라고 하는 단어인데 그것은 소리를 지른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소리를 지르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진리이셨기 때문에 소리쳐서 진리를 홍보할 필요가 없었다. 진리는 홍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진리를 터득한 사람의 간절한 고백을 통해서 진리가 전파되는 것이다. 

진리는 자체가 사람을 끄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백이면 충분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홍보하거나 내세우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보람은 사람들이 진리를 알고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온전한 내적인 평안 속에서 진리 자체로서 진리를 보여주고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시든지 사람들에게 진리를 보여주는 존재가 되셨다. 진리의 위대한 힘은 진리 자체 안에 있고, 그 진리와 매우 가까이 있는 진리와 하나 된 사람들의 고백과 인격을 통해서 사람들은 그 진리의 힘을 비로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원래 진리라고 하는 이 말은 희랍어로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인데 ‘스스로 명백하다’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명백한 진리로 세상에 오셨고 진리에 가득찬 인격을 보이시고 진리에 합당한 삶을 사시는 가운데 눈부신 진리의 많은 빛들이 그분의 입술과 섬김을 통해 흘러 나왔다. 그래서 예수님은 들레어 외치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 시대가 이런 종류의 진리의 증거를 필요로 하고 있는 시대이다. 떠들썩한 마케닝이나 홍보가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진리에 나 자신을 합치하고 나 자신의 언어와 인격과 행동이 그 진리에 배어서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C. 길에서 소리를 듣지 못함 

세 번째는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문자적으로는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길거리에서도 사람들에게 가르치시고 사람들의 질명을 고쳐주시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거리에서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하는 의미는 예수님이 시끄럽게 떠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들리는 목소리를 그런식으로 기대해서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는 뜻이다. 

문제는 물리적인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길거리 같기 때문에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마음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끊임없이 침잠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에 아우성치고 소동치는 이런 들레는 모든 것들을 잠잠케 해야 한다. 


III. 상한 갈대를 꺾지 않음 

A.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마음 

그러면서 메시야가 오셔서 사역 하시는 행동 양식에 대해서 본문은 이렇게 말한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마음이다. 갈대는 바람이 불면 나부끼다가 분질러지기도 한다. 그럼 분질러진 그곳에 흠집이 생기고 상하기 시작하며 썩어간다. 갈대 자체도 별로 가치가 없는데 썩어간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그 마음으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예고하셨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어진 하나님의 마음이었으니 사랑은 사랑을 흐르게 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충만한 성령의 은혜를 받을 때 가장 확실한 인격적 특징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첫째는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고통중 대부분은 잘못 사랑하기 때문이고 그 사랑은 결국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불행이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잘못된 질서에 대한 사랑이 바로 악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신앙은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사랑의 질서를 허물고 하나님 중심의 사랑을 다시 질서롭게 세우도록 만들어 준다. 

한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시간 속에 스러져 가는 육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한 사람의 존재의 가치는 그 사람의 선한 의지의 크기에 달렸다. 그 선한의지의 크기가 바로 사랑의 크기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마음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어 이 세상에 있는 쓸모없는 죄인들을 섬기셨다. 우리도 이 사랑을 흘려보내는 주님의 도구들이 되길 바란다. 

B. 상한 갈대 같은 인생들 

그 사랑의 대상은 상한 갈대와 같은 인생들이다. 갈대와 같이 나부끼는 힘이 없고 연약한 인생이다. 우리는 죄로 인해 상한 존재가 된다. 혹은 죄의 결과로 상처와 고통을 받아 우리의 육신과 영적인 생명이 심각하게 훼손되어 상하고 망가진다. 가치로 보면 쓸데없는 쓰레기 같은 존재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충만한 능력과 사랑으로 상한 갈대와 같은 인간들을 찾아오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을 때 혹독하게 비난을 받으셨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님은 죄인들과 먹고 마시느냐? 너희 선생님은 창기의 친구고 세리의 형제냐?’라고 비난 받으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가슴에 안으셨다. 사창가에 있는 창기들이 예수님의 품에 쓰러질 듯 안길 때에 예수님은 그들을 받아주셨고, 낙인찍혀 개 취급을 받는 세리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그분 홀로 사람으로 맞아주셨다. 그들이 가진 죄 때문에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다. 

예수님도 죄가 좋은 것이 아니라 죄 때문에 상한 갈대가 된 영혼들이 좋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말하는 이 상한 갈대는 단지 죄를 짓고 부패한 사람의 썩은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썩고 부패해 아무 구제할 소망이 없는 상한 갈대와 같은 자들을 지금도 당신의 공의로 다스리신다. 

C. 꺾지 않으시는 하나님 

이러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죄인일뿐만 아니라 그 죄인이 상한 갈대처럼 되었을 때 하나님의 눈앞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효용으로만 보시지 않으셨다.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가진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 하나 때문에 우리들이 이렇게 분에 넘치는 돌봄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있는 것이다. 


IV. 결 론: 다시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리스도인은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지만 하나님이 구원하신 의도를 따라서 이 세상에 빛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가변적이다. 성령 충만할 때도 있고 시들어 갈때도 있다. 우리의 마음은 불순종하면서도 우리의 마음을 에이는 기억이 있다. 성령 충만하고 주님을 뜨겁게 섬길 때에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상하고 쓰러질때에도 언제나 우리를 도와주신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 아무데서도 발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지금도 상한 갈대와 같은 여러분들을 꺾지 아니하고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신 생명을 가사상태에 두지 말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여러분들의 심령에 예수의 생명을 넘치도록 받아 다시 주님께 사랑을 받으며 주님의 사랑을 힘입어 어두운 세상에 빛처럼 사는 주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로 거기에 여러분들의 진정한 행복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도 거기에 있는 것이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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