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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아계신 하나님 (눅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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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신 하나님 (눅 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눅 11:2) 

I. 본문해설 

예수님이 한 곳에서 상당한 시간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기도가 끝났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 기도가 배움을 통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평소에 하셨던 기도의 패턴을 보여줍니다. 이 기도의 패턴은 예수님이 평소에 사셨던 삶의 패턴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패턴을 주기도문 속에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일 먼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지만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더 간절히 추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사람으로 변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영광이 첫 번째 기도제목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패턴을 가르쳐 주시기 전 먼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들이 먼저 호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는 호격입니다. 

II.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A. 신이 없다고 믿는 세대 

먼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분은 분명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은 신이 없다고 믿는 세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명백한 증거를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음속에 하나님에 관한 증거를 지워버렸던 것입니다.

회의는 믿으려고 하는데 증거가 부족해서 안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앙은 증거가 있는데도 안 믿겠다는 고집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죄입니다. 이런 것들을 가리켜 무신론이라고 합니다. 이미 오늘날의 과학은 하나님 없는 무신론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녀들에게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거듭난 과학을 다시 가르쳐야 합니다. 

이런 사상적 무신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천적인 무신론은 더 무섭게 밀려옵니다.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모든 도덕도 다 지워버렸으며 절대적인 가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각 사람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속에서 하나님이 없다고 담대하게 고백하며 사는 불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들만이 무신론을 실천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주일날마다 와서 예배도 드리고 찬송도 부르지만 일주일동안의 삶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천적으로 무신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학자 존 오웬의 설명에 의하면 그들이 생활하고 있는 무대만 달라졌을 뿐이지 여기서도 무신론이고 저기서도 무신론입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아름다운 기도의 첫 번째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B. 존재하시는 하나님 

성경은 인간이 그 사실을 믿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존재하신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구약의 시작 일 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시작이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시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간단하게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말입니다. 이 세계 안에는 하나님의 존재의 증거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1. 사물의 존재방식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과학이라는 미신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 자체를 편견을 가지고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명백한 증거들을 부당한 방법으로 다룸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물들을 생각할 때 잘못된 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을 측정하기 때문입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 중 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이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 신학자는 사물의 있음과 없음을 판단하는 세 개의 규범들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제한적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것으로 이 컵처럼 특정한 부피와 길이, 폭, 손으로 만져지는 사물을 가지고 어떤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물질입니다. 여기까지는 컵이고 여기서부터는 컵이 아닙니다. 이런 기준을 가지고 사물이 있다 없다를 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정적으로 측정해야 하는 사물도 있습니다. 영혼 같은 것입니다. 나의 영혼은 내 안에 있고 어렸을 때도 내 안에 있었고 나이가 들어서 몸집이 커졌어도 영혼은 내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해부학적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을 칼로 갈라 뒤져도 그 안에 영혼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제한적인 의미와 한정적인 의미에서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튜레틴은 충만적으로 존재하는 분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충만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물질이 하나님을 떠날 수 없으면서도 하나님은 어느 물질 속에도 베어 계신 분이 아니고, 또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이 물질과 저 물질이 가까이 있는 것보다 하나님이 이 물질에 더 가까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시간과 공간보다도 크신 분이고 그것을 능가하시는 분입니다. 

2. 충만하신 하나님 

이 세상의 아름다움의 원인은 하나님이 거기에 충만히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정신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주 만물 속에 초월하시는 분으로 또 내재하시는 분으로 물질과는 다른 방식으로 가득히 존재하십니다. 세계 안에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탁월한 질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십시오. 

지구와 태양이 속해있는 은하계는 약 2000억 개의 별들로 이루어져 있고 온 우주는 그러한 은하계가 약 1천억 개 이상 있는 공간이라고 추측합니다. 그 2000억 개의 별 중 단 하나의 별이 바로 태양입니다. 그리고 태양 주위를 9개의 별들이 돌고 있고, 다시 167개의 더 작은 별들이 9개의 위성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의 항성에 우리 태양계와 같은 공식을 적용한다면 우리 은하계 안에만 3조 2천 7백 개의 별들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은하계가 1천억 개 넘게 존재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놀라운 이 세계를 하나님이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계에 두신 아름다움은 질서의 아름다움입니다. 그 질서 속에서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시고 유지하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의 증거를 아름답게 뿜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의 모든 삶속에서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을 경험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우리의 찬송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세계, 인간의 지혜로 만든 모든 학문들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도덕의 현상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발견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III. 살아계신 하나님 

A. 자연적 신지식의 한계 

그러나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만을 가지고는 주기도문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올릴 수 없습니다. 실제로 기도하지 않는 많은 유신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자연적인 신지식의 한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철저하게 무신론자로 살아왔던 한 과학자가 있었습니다. 우주를 열심히 탐구하다가 유신론자가 됐습니다. 과학적 사실들 사이에 탁월한 일치와 조화를 생각해 볼 때 누군가 이 우주를 지적으로 설계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세상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이 말을 덧붙혔습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신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과학을 더 과학적이게 만듭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고백했다고 해서 당신들은 내가 회개하고 예수장이가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는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을 통하지 않고 자연 세계를 통해, 인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증거를 발견하는 한계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교만한 마음을 쏟아놓고 물같이 마음이 녹아본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안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경의 진리 속에서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들의 법칙을 능가하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B. 살아계신 하나님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난 탁월하신 하나님, 영원과 영원에 잇대어 존재하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위대하신 존재 앞에 우리는 오늘 들풀처럼 있다가 사라질 허무한 인생들인데도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를 맺으십니다.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복음을 믿지 않는데 우리의 마음에는 그 복음이 믿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의 어두움을 찢으시고 당신의 찬란한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IV. 결 론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이 벌레 같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으신 것,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게 해주신 것,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하며 살게 해주신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이 느껴질 때, 나 같은 죄인을 살려 주셔서 그 분을 아바 아버지라고 불러 주신 것이 뜨거운 감격으로 다갈 올 때 우리는 아무리 바빠도 기도합니다. 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사라질 때 우리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위대한 주기도문을 해설하기 전 여러분의 마음에 영적인 부흥이 오기를 바랍니다. 

이제껏 여러분들은 세상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이제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여태까지 여러분들은 자신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이제는 마음의 눈을 들어 거룩하고 위대하시고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신 우리 하나님을 주목합시다. 그 분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우리의 마음속에 다시 생각합시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그 분께 기도합시다. 그리고 기도한 것처럼 삽시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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