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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화께로 말미암는 평강 (왕상 2:32-33, 빌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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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화께로 말미암는 평강 (왕상 2:32-33, 빌 4:6-7)

유대인의 인사는 ‘살람’입니다. ‘샬롬’과 같은 말인데 ‘평안하십니까?’, ‘평안하세요’라는 뜻입니다. 이슬람의 인사는 ‘앗살람 알라이쿰’인데 ‘알라의 평화가 당신에게 있기를’이란 뜻입니다. 이들은 늘 평안을 이야기하고 평안을 전하지만 평안하지 못하고 항상 마치 개와 고양이처럼 싸웁니다. 

우리교회에서 길을 하나 건너면 평화시장이 있습니다. 청계천을 따라 길게 평화시장이 나타나는데 평화시장, 동평화시장, 신평화시장, 제일평화시장, 청평화시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가보면 거기에도 평화는 없습니다. 오래 전에 전태일씨가 분신한 곳도 평화시장입니다. 인간이 사는 곳 어디에든 가보면 사람이 만든 평화는 일시적이고, 부분적입니다. 그리고 영구적인 평화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가 인사할 때 ‘안녕하세요?’라고 합니다. 평안(平安)을 비는 것은 인간의 욕구입니다. 사람들이 갈구하고 바라도 인간에게는, 인간이 주는 참 평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평화란 인간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평화를 줄 수 있는 평화의 주인이십니다. 
  
‘찻잔 속의 폭풍’(Storm in a Tea cup)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폭풍이 몰아친다 해도 찻잔 속에 있으면 폭풍이 아닙니다. 세상이 요동쳐도 전혀 나를 흔들 수 없는 폭풍이 있습니다. 나를 흔들 수 없다면 폭풍이 아닙니다. 나를 넘어뜨릴 수 없다면 시험이 아닙니다. 폭풍이 찻잔 속의 폭풍이 되게 하고, 시험이 나를 넘어뜨릴 수 없는 시험이 되게 하는, 나와 무관한 것이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화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누구도 줄 수 없고, 흉내 낼 수 없는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작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에 나가셨을 때에 풍랑이 일어 예수님의 타신 배가 물에 잠기데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고물에 베게하시고 주무셨습니다. 바람이 부는 것도, 물결이 치는 것도, 배에 물이 찬 것도 예수님의 고요함을 파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평강이란 외부의 풍랑 가운데서 얻는 내면의 평강이었습니다. 아무리 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잠들 수 있는 평강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평강입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제공자로서 진정한 평화의 모습 보여주셨습니다. 
  
사막의 교부들의 글을 모은 ‘깨우침’이란 책에 보면 “내적 슬픔과 겸손을 달라고 주께 구하라. 언제나 자신의 죄를 돌아보고 남을 판단하지 말라. 모든 사람의 종이 되라. 어떤 사람이 당신 의견에 반대하더라도 다투지 말라.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논쟁하지 말라. 그러면 마음의 평화를 얻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죽으면 가능합니다. 죽어 살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도 없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육체가 죽기 전에 다 버리고 비우고 죽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버리고 비우고 죽을 때에 진정한 평안을 얻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참 평안을 주십니다. 
  
요한복음 14:27에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과 예수님께서 풍랑 일던 바다에서 보이신 평화가 일치하지 않습니까? 평안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비로소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이나 사람의 재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즉위했습니다. 솔로몬의 형 아도니야가 수넴 여인 아비삭을 아내로 달라고 밧세바를 통하여 솔로몬에게 청했습니다. 솔로몬은 그의 형 아도니야를 죽이고 제사장 아비아달을 추방하였습니다. 그를 따르던 요압은 이스라엘의 군사령관 아브넬과 유다의 군사령관 아마샤를 칼로 죽였는데 솔로몬은 요압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피가 요압과 그 자손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다윗과 그 자손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고 선포합니다.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평강의 근본을 알고, 그 평강을 선물로 받고, 그 평강을 누리며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의 자손은 죽은 자의 피가 돌아갑니다. 

33절 상반절에는 “그들의 피는 영영히 요압의 머리와 그의 자손의 머리로 돌아갈지라도”고 합니다. 히브리인들의 사고에는 무고히 흘린 피살자의 피는 피 값이 속량될 때까지 계속 하나님께 호소한다고 믿었습니다. 

창세기 4:10에는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한 살해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당대 또는 자손들에게서라도 반드시 그 피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출애급기 20:5에는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아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생명을 귀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공평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귀하지 않은 생명이 없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 보니 어떤 사채업자가 장부에 증빙서류 하나 없이 여러 명의 채무자에게 수십억 원의 이자를 받았습니다. 소위 악덕 사채업자가 국세청의 집요한 추적에 덜미가 잡혔습니다. 이 사람은 자금사정이 어려운 부실기업을 상대로 하여 어음을 담보로 10% 선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번 돈이 수십억 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세금을 안냈습니다. 국세청은 이 사람에게 거액의 세금을 추징했습니다. 우리 옛말에 ‘남의 눈에 눈물 내면 제 눈에는 피눈물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옛 속담을 보면 -속담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50개가 넘는 인터넷 ‘안티 기독교 사이트’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보면 하나님을 살인자라고 한 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없는 무자비한 신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죽이라”는 말을 몇 번 했다고 하는 말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죽이라고 하십니까? 공의의 하나님이니까 죽이라고 하십니다. 생명을 창조하시고 아끼는 하나님이시지만 죽이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 때문입니다. 의가 없으면 그냥 용서하고 무관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잘 한 것에 대하여 상주시고, 잘못한 것에 대하여 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권선징악의 규율이 분명한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레위기 24:17에는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라고 합니다. 왜 죽이라고 하십니까? ‘쳐 죽인 자’란 악의로 죽인 자를 말합니다. 악한 마음을 가지고 죽인 자는 죽여서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과실치사에 대하여는 용서해주라고 하십니다. 과실치사이지만 가족들이나 부족이 복수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도피성을 6개를 만들어 도피성에 들어온 사람은 죽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고의살인은 절대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은혜의 교리가 가정하고 있는 영역에는 네 가지 핵심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의 도덕적 피폐함입니다. 둘째는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셋째는 인간의 영적인 무기력입니다. 넷째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나 은혜는 공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공의가 없는 사랑이나 은혜는 오히려 받는 사람을 죄짓게 만들고 결국 멸망당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공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의가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를 포함합니다. 이것이 보응하는 공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박하고 종살이하게 하고 죽인 애급인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는 자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애급인과 그 후손들의 장자들이 다 죽게 하십니다.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의 백성을 추적하는 자들을 모두 홍해에 몰사시켰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 하나님의 자녀를 박해하는 자에게는 여지없이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이렇게 하실 수 있고, 이렇게 하셔야 하나님이십니다. 
  
그 자손에게 피가 돌아간다는 것은 가장 악한 보응입니다. 가장 큰 벌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에 당시에 관례에 따라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려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지만 군중들은 강도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했고 군중의 소리에 빌라도가 졌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손을 씻으면서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다”고 했지만 군중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그 피 값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세요? 그 유대인들이 피 값을 받느라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함락된 후에 1948에 다시 팔레스타인 땅에서 독립할 때까지 무려 1900여년을 전 세계에 유리방황하는 민족이 되고 독립하였지만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 아랍과의 죽고 죽이는 충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4:24에는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보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마태복음 7:12에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법은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는 것이고, 대접한대로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공의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을 죽인 자를 반드시 벌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자손은 평강이 영원히 있습니다. 

33절 하반절에는 “다윗과 그의 자손과 그의 집과 그의 왕위에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고 합니다. 요압을 처형함으로써 솔로몬은 다윗 집안에 여호와의 평강이 영영히 깃들 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 사는 자들과 그 자손에게 평강이 영원히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의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질서를 만드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만드신 그 질서대로 살아가는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질서대로 살면 평강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의 예수님의 8복을 보시면 의를 행하는 자의 복이 2가지나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의 복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 가운데 의가 왜 둘이나 있을까요? 하나님은 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의를 행하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의는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것을 행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최근 인터넷에 보면 ‘자존심 손상 죄’라는 게 있습니다. 노점 상인에게 왜 골프 안치느냐 묻는 죄는 징역 1년입니다. 왜 강남에 살지 않느냐고 묻는 죄는 징역 3년입니다. 자녀들이 모두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갔느냐고 묻는 죄는 징역 5년입니다. 아들딸이 언제 결혼하느냐고 묻는 죄는 징역 10년입니다. 손자손녀 얻었느냐고 묻는 죄는 징역 15년입니다. 자식이 취직했느냐고 묻는 죄는 무기징역입니다. 시대감각에 맞는 유머라고 하는데 자녀에 관한 것이 많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자녀가 가장 염려거리이고 어떤 부모이든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이나 기성세대에게 가장 큰 소원은 자녀들이 잘 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위한 것은 이미 지나간 꿈입니다. 이제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잘 되고 우리 후손이 하나님의 영원한 평강 가운데 사는 것이 누구에게나 가장 큰 소망일 것입니다. 
  
시편 37:25에는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고 합니다. 의인이 손해보고, 고통당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의인의 후손은 뒤가 잘 됩니다. 끝이 좋습니다. 자손들이 잘 됩니다. 우리교회에도 순교자의 자녀가 있습니다만 특히 순교자의 자손들을 보면 자랄 때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후손들이 잘 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렇게 고생하면서 살아도 목사 장로가 많고, 교회의 좋은 일꾼들이 많습니다. 자손들이 하나님의 평강 가운데 사는 것을 봅니다. 
  
중국 섬서성 역사박물관에 가보면 진나라, 한나라 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옛날에 도예가 발달하여 도기로 군인이나 사람을 많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도기로 만든 사람을 보면 옷을 입은 사람도 있고, 벗은 사람도 있습니다. 현재 유물을 보면 귀족이나 고급 장군들은 옷을 벗고 있고, 하위병사들이나 평민들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참 역설적이었습니다. 지체가 높은 이들은 도기로 형상을 만들 때 몸을 만들고 옷은 비단 옷으로 입혔답니다. 그런데 2000년이 지나고 보니 비단은 다 썩어 없어지고, 도기만 남게 되어 옷을 벗고 있습니다. 낮은 사람들은 흙으로 옷을 만들었기 때문에 2000년이 지나도 흙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습니다. 낮은 사람이 다 낮은 것이 아닙니다. 없는 자가 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왕권 시대에 지배자는 힘을 누렸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피지배자 잘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의가 없는 삶은 시간이 흐르면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의로운 삶은 세월이 지나도 가치가 있고 오래 기억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6에는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 의의 자손에게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평강의 주님이므로 평강을 주실 수 있습니다. 평강의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를 삼으시고 제자들을 내보내시며 “그 집에 들어가거든 평안을 빌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시기를 원하신 것은 평강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여인들을 만나 “평안하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원하신 것은 그들이 평안한 것입니다.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의 서신들에는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는 말이 단골로 서간 형식으로 나옵니다. 편지의 서두에는 ‘샬롬’이 대 주제인 것을 성경을 통하여 봅니다. 
  
스위스는 평화를 사랑하는 영세 중립국입니다. 그러나 스위스가 항상 평화로웠던 것은 아닙니다. 1700년대에 스위스는 전쟁으로 인구의 3분의 1을 잃었습니다. 많은 군인들이 죽고 평민들도 희생이 되었습니다. 스위스가 영세 중립국을 택한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이타주의 때문이 아니라 자국의 생존을 위한 것 때문입니다. 이미 이전의 냉전시대가 끝났지만 지금도 스위스는 핵전쟁에 대비하여 700만 명의 전인구를 보호하기 위한 참호를 건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위적인 평화는 없습니다. 평화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의의 자손에게 주시는 하나님 은혜입니다.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410장 찬송가 가사에 보세요.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나 즐겁게 늘 부르네. 이 노래를 부를 때에 큰 평화 임하도다.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 그 놀라운 주의 평화 하나님 선물일세”. 평화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비로소 평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하나님의 선물이 늘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민수기 6:26에는 아론의 축복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성경의 표현을 보세요. 평화나 평강은 주신다고 합니다. 주신을 나는 단지 누린다고 합니다.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얻으라고 합니다. 평화는 내 것이 아님을 증명합니다. 평강은 하나님의 의의 자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받고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라니다. 

  
결론 

어느 날 저녁 성자 프란시스에 누군가가 찾아와 집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프란시스가 나가보니 험상궂은 한센 환자였습니다. 그는 몹시 추우니 잠시 방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프란시스는 그의 손을 잡고 방으로 안내하였습니다. 이 환자는 다시 저녁을 함께 먹도록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식탁에 앉아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얼마 후 밤이 깊어지자 다시 부탁을 합니다. 너무 추우니 알몸으로 자기를 녹여 달라는 것입니다. 프란시스는 옷을 모두 벗고 자신의 체온으로 한센 환자를 녹여주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프란시스가 일어나 보니 그 환자는 간 데 온 데 없었습니다. 환자가 왔다간 흔적조차도 없었습니다. 프란시스는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닫고 비천한 자신에게 찾아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기도가 ‘평화의 기도’라고 합니다. 

그는 이 일 후에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머무는 사람은 영원한 평화의 도구로 세상을 삽니다. 여호와로 말미암는 평강, 여호와의 선물인 평강이 늘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머물고 이 평화를 세상에 전달하는 평화의 도구로 사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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