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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경의 최후 초청 (계 22: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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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교회는 예배 공동체입니다. 교회로 모인 성도들이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할 사역은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함께 참여한 성도들과 공동체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배의 형식은 교파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모든 예배의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예배의 진행 과정을 따라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인 ‘죄인 초청’ 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라 할 것입니다. 

예배에서의 초청은 죄인들을 구원에로 부르는 초청이고, 믿음을 잃어버린 타락한 자들을 산 믿음에로 부르는 초대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예배하는 회중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죄인을 부르시는 초청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죄인들을 부르시는 2,000번 이상의 초청 기록이 있습니다. 주님은 노아를 세상에서 불러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창 7:1). 

주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가나안으로 이주시키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또한 주님은 모세를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시기 위하여 광야 떨기나무에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출 3:4). 

오늘 본문은 성경의 수많은 초청 가운데 마지막 초청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예언의 말씀을 모두 주신 후에 최후로 초청의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17절).

본문에 나타난 초청을 통하여 성령 하나님의 마음, 교회에 주신 사명, 그리고 인류에게 주신 축복과 선물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성령님의 최대 부담 

17절=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본절은 예수님의 재림 선언에 대한 성령님과 교회의 화답입니다. 본절에 두 차례 언급된 ‘오라(에르쿠)’ 는 초청은 세상을 향하여 구령의 열정을 토하는 모습입니다.  

오늘도 성령님은 사람들을 구원에로 부르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합니다. 죄인으로 하여금 자기 속에 어찌할 수 없는 죄악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느끼게 하시고, 스스로는 결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지금도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를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치유하시고, 그의 마음 속에 좌정하십니다. 그리하여 성도로 변한 사람의 일생동안 함께 하시면서 그를 위로하시고 깨우치시며 능력을 공급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을 초청하는 일은 하나님의 가장 큰 과업입니다. 죄인을 구원에로 이끄시는 일은 성령님의 최대 부담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창조의 사역보다 더 큰 일이고 피조물을 운행하시고 섭리하시는 것보다 더 부담되는 일입니다. 

죄인을 감동시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끄는 것은 열방을 예언대로 움직여가는 것보다 더 큰 일입니다. 이것은 온 세상을 예언된 말씀대로 성취시켜 나가는 것보다 더 무거운 짐입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하늘의 별들을 지정된 코스대로 운행시켜 나가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어려운 일입니다.

성령님의 최대 최고의 부담은 죄인을 깨우쳐 예수 믿게 하고 말씀 안에서 그 믿음을 성장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우리를 키우시는 것 -- 이것은 성령님의 최대 부담입니다.

성령님은 왜 이런 부담을 마다하지 않으십니까? 그것은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 우리 예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자신의 물과 피를 쏟아부어 우리를 위한 대속(代贖)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이 사랑으로 우리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이끄시기 위해 최대의 부담까지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오라’ 고 부르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귀를 갖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교회의 최대 과업 

17절=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여기 ‘신부’ 는 계 21:2,9 에서 이미 ‘새 예루살렘’ 의 표상으로 언급되었는데, 이것은 ‘교회’ 의 상징입니다. 

성령님을 힘입은 교회가 말하고 있는 내용은 ‘오라’ 는 것입니다. 종말의 참 교회인 ‘해입은 여자 교회’ 는 세상을 향하여 가슴을 크게 열고 구령의 열정을 토하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최대의 과업은 ‘목마른 자들’ 을 향하여 값없이 생수를 받아 마시도록 초청하는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본절의 ‘신부’ 는 분명 대환난 때의 ‘해입은 여자’ 를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는 중에 마지막으로 성령님이 주시는 영감을 받은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오라’ 고 부르는 음성을 듣습니다. 이 모습이 현대 교회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어떤 모습입니까? 성령님의 소원과는 달리 다른 일들 때문에 너무 바빠서 정작 세상을 초청하는 일에 소홀한 것은 아닙니까? 

교회마다 종교적인 세레모니나 행사들은 연중 계속되고 있습니다. 컨퍼런스를 열고 프로젝트들을 추진하는 일에 열심입니다. 여러 가지 사업들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일로 인하여 연중 행사표가 복잡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최대 과업은 세상을 향하여 ‘예수님께로 오라’ 고 초청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른 일들로 분주하여 정작 최대의 사명을 망각하지 않도록 항상 근신해야 합니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세상을 초청하는 전도 사역에 참여하는 데는 예외가 없습니다. 교회의 오래된 멤버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이제 갓 회심한 초신자라 할지라도 전도 사역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님의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17절을 다시 보면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해 신학자 파러(Farrer)는 다음과 같이 멋있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성령과 신부는 한 목소리를 낸다. 즉 영이 촉구하는 것을 몸이 말하는 것이다.” 

과연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는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요 14:16,17)인 동시에 성도들을 감동시켜 세상에 예수님의 말씀을 외치도록 하는 영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행 1:8). 성령 충만한 교회, 성령 충만한 성도는 세상을 향해 ‘예수께로 오라’ 고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찬송가 508장(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의 작시자 엘라이져 캐슬(Elijah Cassel)은 본래 의사였습니다. 그는 성공적인 의사요 평신도 지도자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았고 그가 출석하던 네브라스카의 한 침례교회에서 모범적으로 봉사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전도에 사명을 느끼며 병원에서 많은 환자들을 전도했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삶의 이유, 존재의 이유는 복음 전도라고 고백하는 그런 성도였습니다. 어느날 그는 돈 버는 것보다도 전도 하는 것이 그렇게도 좋으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렇구 말구요. 결국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가 아닙니까? 나그네 인생에서 영혼 구원보다 더 가치 있고 고귀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도는 천사도 흠모하는 일인데요”  

옆에 있던 부인이 ‘천사도 흠모하는 일’ 이란 말에 감동을 받고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그 말을 시로 쓰면 자신이 작곡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의 부인은 본래 음악 전공자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찬송이 바로 찬송가 508장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끝까지 힘써 일하세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그런데 캐슬의 나이 60을 넘기면서 그는 파트타임이 아닌 풀타임으로 자신의 전 시간을 드려 복음을 전하고픈 불타는 마음을 견디지 못해 마침내 목회에 헌신하게 됩니다.  

더 이상 돈도 못 벌고 인간적인 융숭한 대접도 못 받게 되었지만 그는 너무 기쁘고 너무 감사해서 그의 첫 부임지인 콜로라도 덴버의 한 작은 교회에 목사로 부임하면서 취임사를 대신해서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그런데 캐슬이 이 교회 목사님으로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 부인은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누군가가 장례식에 와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되신 것 후회가 안 되십니까? 목사님 안 되시고 의사 하셨으면 부인이 그렇게 빨리 가지 않으실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캐슬 목사님의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 아내는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찬송을 작곡하면서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그네 인생길에 행복한 전도자의 곁에 머뭄이 자기의 행복이라고. 혹시 자기가 먼저 이 세상을 앞서 가는 일이 있으면 난 변함없이 당신의 하늘의 응원자가 되어 함께 복음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요.” 

그리고 그는 부인의 장례식에서 다시 회중들이 이 찬송을 불러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주 내게 부탁하신 일’ -- 성도의 최대 사명이고 교회의 최대 과업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명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3. 인류의 최대 선물 

17절=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세상에는 영혼의 기갈(飢渴)로 몸부림치는 자들이 많습니다. 성령님과 교회의 초청은 목마른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우리 예수님도 목마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요 4장에서 예수님은 우물가 여인의 목마름을 알아보시고 영원히 샘솟는 샘물을 소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명절 끝날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수많은 무리들에게 큰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요 7:37). 

성도 여러분! 주님 주시는 해갈(解渴)은 인류가 누리는 최대 축복이요 최고 선물입니다. 이 축복은 먼저 믿는 우리가 반드시 받아야 하는 축복이요 세상을 향해 초청의 손을 내미는 전도자가 먼저 마음껏 누려야 하는 선물입니다.

본절(17절)의 말씀은 주님께로 나오는 자는 반드시 목말라야 함을 의미합니다. 초청을 받는 사람의 나이가 많든지 적든지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말라야 합니다. 그의 인종이나 혈통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황인이나 백인이나 흑인이나 혼혈이나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반드시 목말라야 합니다. 

그의 사회적 지위나 재정적 형편은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누구든 어떤 형편에 있든 주님께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반드시 목말라야 합니다. 죄사함에 목말라야 하고, 구원에 목말라야 합니다. 천국 소망에 목말라야 하고 주님과의 동행하는 복된 삶에 목말라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목마름을 가지고 나오셨습니까?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목마른 자를 위해 준비된 것은 생명수입니다. 이 말씀은 계 21:6과 언어적으로 병행됩니다: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그러나 거기는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인 반면 여기는 성령의 감동을 입은 교회의 선포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예수님의 말씀과 교회의 선포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성령님에 힘입어 가감 없이 전해야 합니다. 교회의 생명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종말에 이처럼 성령님과 교회가 한 목소리로 외치는 내용은 “목마른 자는 모두 와서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수’ 는 새예루살렘에 흐르는 그 생명수가 분명하고(1절), ‘값없이 받으라’ 고 하였으니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해 받을 은혜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생명수의 값(price)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미 치루어졌습니다. 목마른 자에게 주시는 생명수의 값은 무료입니다! 인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최대의 축복이요 최고의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세상을 향한 복음 증거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얻게 되는 천국 생명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세상 사람들에게 천국 잔치를 알려 그 기쁨과 축복을 함께 나누도록 널리 초청하는 일입니다. 

작은 배가 몇 시간 동안 강풍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바람은 자고 바다는 고요하여졌으나 엔진이 고장나 배는 며칠이고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배 안에는 마실 물이 바닥나서 승객들은 목이 말라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수평선 저 너머 멀리서 큰 배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선객들은 갈라진 입술로 손짓했습니다. “물, 물 좀 주시오!”  

“물동이를 내려요. 여기는 아마존 강입니다.” 배가 바다에서 강으로 거슬러 올라간 줄을 몰랐기에 생수를 옆에 놓고도 모두가 목말라 죽을 뻔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를 향해 두 손 벌려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허공을 바라보고 목마르다, 세상이 괴롭다 한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여러분의 주위에 이런 사람은 없는지요?

 사 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물에 물동이를 들고 왔던 사마리아 여인처럼 우리 가운데 영육간에 목마른 사람은 안 계십니까? 그 여인은 미래에 대한 환상을 좇아 철부지 10대를 보내고, 백마를 탄 왕자님을 만나기 위해 20대를 보내고, 결혼 후에는 집을 마련하기 위해 온통 마음을 빼앗겨버립니다.  

그 후에도 할 일은 많습니다. 화사한 커튼과 풍성한 식탁과 아이들 교육, 문화생활 등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30대를 보냅니다. 그리고 사회의 명성과 부와 위엄이 40대의 중후함과 함께 필수 조건처럼 뒤따라 마음을 빼앗습니다. 

여인은 쉬지 않고 자신의 물동이에 물을 퍼부었습니다. 깊은 우물에서 재물을 퍼올렸습니다. 명예와 부귀 영화를 퍼올려 세상의 쾌락을 마셔보았지만 마실수록 갈급함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남편도 자식도 재물도 부귀영화도 갈증을 씻어주지 못했습니다

그 날도 목이 타는 갈증에 두레박을 첨벙 우물 속 깊이 떨어뜨리고 물을 퍼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여인에게 다가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우리가 바로 현대판 수가성 여인은 아닙니까? 내 마음을 빼앗고 남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 재물입니까, 부귀영화입니까, 아니면 허무라는 정체불명의 마귀입니까?  

세상이 말하는 다섯 가지의 복은 수가성 여인의 다섯 남편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복들은 육신을 살찌우게 하는 근원입니다. 육신의 비만은 영혼의 빈곤과 갈급을 의미합니다. 이것들로는 영혼의 갈증을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여인에게는 생수를 공급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성경에 기록된 많은 초청 중 마지막 초청입니다. 죄인을 불러 천국 백성을 삼아 천국까지 이르게 하는 이 초청은 성령님께는 엄청난 부담이요 교회에게는 반드시 이루어야 할 최대의 과업이고 사명이지만 정작 초대받는 당사자인 죄인들에게는 최대의 축복이요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초청은 지금도 참 교회(= 해입은 여자)를 통해 세상에 증거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구원의 초청장은 와서 생명수를 마셔야 하는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어져야 하고, 그 전달을 오늘의 교회가 맡아 있음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우리에게 남은 이 초청의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내가 속히 오리라”고 거듭 말씀하고 계시며(7,12,20절), 또한 일단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더 이상 복음을 전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 구절에서 주님의 심정을 느껴보십시오. 

마 22: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처하여 오라”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구원 초청장을 전달하는 사역에 동참할 성도들에게 사역 초청장을 발부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이 초청 사역에 힘을 모으는 은혜가 넘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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